우성그룹, 접전 끝에 한일그룹 손에
  • 金芳熙 기자 ()
  • 승인 1996.05.2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일그룹, 미원 제치고 손에 넣어…‘인수전의 정치성’ 놓고 논란
우성그룹 인수전의 양상을 가장 잘 보여준 것은 지난 8일 롯데호텔에서 열린 회의였다. 57개 기관으로 이루어진 우성그룹 채권단의 대표 격인 7개 금융기관 대표가 모인 이 자리에서는, 우성그룹 인수에 가장 적극적인 미원그룹과 한일그룹의 인수 의향서를 제일은행으로부터 제출 받아 최초로 공식 검토하는 자리였다. 이밖에도 한화그룹이 의향서를 제출했으나, 인수 조건이 나빠 최종 후보에서 빠져 있는 상태였다.

회의의 초반 분위기는 미원에 우호적이었다. 인수 조건으로만 따지자면 한일그룹이 나았으나, 미원그룹은 건설업에 대한 경험이나 인수 능력이 앞선 것으로 평가되었다. 두 그룹 가운데 한쪽을 인수자로 선정하자는 분위기에 갑자기 제동이 걸린 것은 나응찬 신한은행장이 두 그룹의 인수 능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부터였다. 회의 참석자들은 두 그룹이 자산 규모에서 우성에 뒤지며(자산 규모에서 우성은 21위, 미원은 36위, 한일은 27위), 흑자를 내는 계열사가 별로 없어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다시 불안해졌다.

이 날 회의는 두 그룹의 인수 계획에 대한 추가 자료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막을 내렸다. 지난 1월 부도를 낸 후 5개월 가까이 끌어온 우성그룹 처리 문제가 다시 한번 원점으로 되돌려지는 순간이었다.
‘전북 기업은 전북에게’ 한때 미원 유리한 국면

5공 당시의 국제상사 다음으로 규모가 큰 우성그룹 처리 문제가 이렇게 단단히 꼬이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인수전 초기 우성그룹을 5대 그룹과 같은 거대 그룹에는 줄 수 없다는 정부의 방침이 나왔다. 경제력 집중을 막겠다는 취지에서였다. 그러나 채권단의 처지에서 보면, 정부의 이 방침은 우성을 인수할 만한 자금 여력이 있는 후보 대부분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결과를 낳았다. 더욱이 건설 경기가 어려운 상황이어서 건설 업체를 모기업으로 하는 이 그룹을 인수하러 나서는 곳이 없었다.

제일은행 역시 비교적 까다로운 조건들을 내걸었다. 여기에는 제일은행이 우성과 유사한 유원그룹을 처리하면서 축적한 협상 비결도 한몫했다. ‘선 인수, 후 정산’ 인수 방식에서 제일은행과 인수 후보 그룹들 간에 문제가 되었던 것은, 법정관리 확대 적용 여부와 증자를 통한 우성 계열사 자구책, 2천억원에 이르는 은행 이자 문제 세 가지였다. 초기 협상 결과 유력한 후보는 한화·코오롱·미원 등 세 그룹으로 좁혀졌다.
우성 처리 문제는 15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나면서 두 번 고비를 맞았다. 첫 번째는 ‘전북 기업은 전북 기업에 넘겨줘야 한다’는 취지로 전북내 4개 상공회의소가 청와대와 제일은행에 낸 탄원서이다(우성 최주호 회장은 전북 임실 출신). 전국 최하위의 지역 경제 규모가 더욱 악화하고 있다는 점을 든 이들의 탄원서는 전북 연고 기업인 미원의 입장을 크게 강화시켜 주었다.

게다가 그 달 말에는 우성 처리 문제에 관해 전권을 갖다시피 했던 이철수 제일은행장이 전격 구속되었다. 그는 인수를 희망하는 그룹들 가운데 가장 덩지가 큰 한화그룹에 상대적으로 무게를 두어 왔던 인물. 한화그룹은 이행장이 구속된 후에도 협상을 계속해 의향서까지 제출했으나, 증자와 은행 이자 처리 문제를 둘러싼 제일은행과의 견해차는 더욱 벌어졌다. 다크호스로 지목되었던 코오롱그룹도 인수 의사를 철회했다. 코오롱은 우성그룹의 모기업인 우성건설만 분할 인수하겠다는 입장이어서, 처음부터 일괄 매각을 추진하던 채권단의 입장과 맞지 않았다. 이철수 은행장 구속과 더불어 유력한 두 후보가 떨어져 나간 것을 두고 여러 가지 정치적 해석이 불거져 나왔던 것도 시점이 절묘했기 때문이다.

우성 인수전의 정치성을 더욱 증폭시킨 것은 막판에 느닷없이 한일그룹이 뛰어들었다는 사실이다. 한일은 5월 초 인수전 참여 사실을 공식화했는데, 그 1주일 전쯤부터 준비를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업체들의 제안 내용을 이미 파악한 후 한일그룹이 작성해 제출한 의향서는, 우성 계열사에 2∼3년 동안 3천억원 이상을 증자해 경영을 정상화해 놓겠다는 파격적인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채권단이 의아해한 것은 한일그룹이 과연 그럴 여력이 있느냐 하는 점이었다. 5공 당시 국제그룹의 계열 4개 사를 인수한 후 한일합섬과 국제상사 등 주력 계열사가 부실해져 지난 한 해 그룹 전체 적자액이 7백억원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해부터는 국제그룹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국제의 주거래 은행이던 제일은행으로부터 떠안은 빚을 갚는 데 곤란을 겪을 정도였다. 더욱이 한효건설을 분리한 후 그룹 내에는 건설업체가 전무한 형편이었다.

인수 조건이나 덩지 면에서 한일에 밀리는 미원은 각 계열사들이 비교적 건실하고, 지난해 경영 실적도 한일에 비해 낫다는 점을 내세웠다(도표 참조). 특히 올해 30대 그룹에서 빠짐으로써 정부의 여신 규제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 내년으로 예정된 서울 도봉구 방학동 공장 부지 자산재평가로 2천억원 가량의 자금 여유가 생긴다는 이점도 있다.

13일 오후 3시 제일은행 본점에서 열린 채권단 운영위원회는 표결까지 가는 대접전 끝에 한일그룹을 인수자로 최종 선정했다. 자산 기준 14위의 새 그룹 탄생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15개 금융기관들로 이루어진 운영위원회의 결정은 이번주 중에 57개 채권단 회의에서 공식 추인된다. 쭦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