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검, 경제 부처에 칼 뽑다.
  • 이정훈 기자 ()
  • 승인 1996.06.20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검 중수부, 증감원장 기소 앞두고 마무리 수사 박차…경제 부처와 팽팽한 힘겨루기
 
‘태풍 전야의 고요’. 대검 중수부가 백원구 증권감독원장과 한택수 재경원 국고국장을 뇌물 수수 혐의로 구속한 후, 서울 여의도 증권가와 서초동 검찰청사 주변은 태풍 전야의 고요처럼 잔뜩 긴장되어 있다. 증권가와 재경원에 태풍이 불어닥칠 시기는 백원장 구속만기 3일 전인 6월18일쯤으로 예상된다. 이 날 대검은 백원장 등을 기소함과 동시에 추가 혐의자에 대한 기소 여부와 증감원의 고질 비리에 대한 수사 결과를 일괄 발표할 전망이다. 때문에 6월15∼16일부터 백원장 구속 때처럼 주가가 큰 폭으로 하락하는 사정(司正) 장세가 펼쳐질 가능성이 있다.

증감원 비리에 대한 수사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는 재경원·증감원을 비롯한 증시 관련 기관의 최대 관심사이다. 이에 대한 해답은 이 사건 수사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에서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이 사건 수사에 정통한 관계자에 따르면, 중수3과(과장 박상길 부장검사)가 증감원의 고질적인 비리에 대한 첩보를 수집하고 내사에 들어간 것은 15대 총선이 있던 지난 4월 무렵이었다. 첩보 입수는 투서 등 외부에서가 아니라, 중수3과 직원들의 사건 인지에서 출발했다. 증권가와 경제 신문 등에 나오는 루머를 토대로, 극비리에 몇몇 기업체 직원들을 참고인으로 불러들였다.

애초부터 수사 목표는 증권감독원이었다. 그런 만큼 참고인으로 소환한 기업체 직원들로부터는 정보만 입수하고 사법 처리 대상에서는 제외한다는 기본 방침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돈을 받은 것으로 드러난 몇몇 증감원 직원(실무자)을 불러 조사하자, 다른 기업으로부터도 돈을 받은 사실이 확인되었다. 부패의 먹이 사슬이 드러난 만큼 검찰은 수표 추적 전문가를 동원해 증거 확보에 나섰다. 그리하여 증감원 고위 간부들의 혐의 사실이 포착되었다.

 
청와대 민정수석,깐깐한 성격으로 ‘보안 철통’


대검은 증감원 최고 책임자를 수사 대상으로 삼기로 결정하고, 하급 직원에 대해서는 죄질이 나쁘지 않은 한 사법 처리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방침으로 철저히 함구할 것을 요구했다. 중수부가 이러한 내사 결과를 검찰총장에게 보고한 것은 지난 5월 하순이었고, 같은 내용의 보고서가 청와대 민정수석실로 올라갔다.

과거 청와대에 올라오는 각종 보고서는 수석비서관회의 등을 통해 공개되어 청와대의 국장급 이상 간부들은 금방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청와대 간부들은 대개 각 부서에서 파견된 사람들이라 이들이 입수한 고급 정보는 즉각 ‘친정’ 부처의 책임자들에게 전달된다. 그러나 올해 초 새로 임명된 문종수 민정수석은 보고서를 간부들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들고 비서실장을 찾아가는 성격이라고 한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문수석은 청교도적 생활을 하는 원칙주의자이다. 일이 잘못되면 언제든지 나가겠다는 생각으로 사표를 지니고 다닌다는 이야기가 있을 만큼 깐깐하다”라고 말했다. 문수석의 성격이 이러한 만큼 청와대에서도 철저히 보안이 지켜졌다.

월드컵 공동 개최가 확정된 5월31일 금요일, 온국민의 관심이 느긋하게 월드컵에 쏠려 있는 주말 시간을 틈타 중수3과는 비밀리에 백원장을 소환했다. 백원장 구속 사실이 보도된 6월3일 월요일, 월드컵 공동 유치 분위기를 타 치솟을 것으로 예상되던 주가는 11포인트 곤두박질쳤다. 한택수 재경원 국고국장 구속 역시 전격적이었다. 이후 재경원에서는 자리를 비운 간부가 있으면 검찰에 소환되었을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증시 루머에 익숙한 경제 부처나 증권계 사람들은 이러한 소문이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휴가나 출장 중이던 간부들 중 오해를 염려해 황급히 돌아와 사무실을 지키는 사람도 있었다. 휴일을 끼고 백원장을 소환한 만큼 검찰의 2차 소환이 현충일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있자, 6월6일 일부러 출근한 간부도 있었다. 증감원은 재경원 이상으로 뒤숭숭했다. 부원장보 세 사람과 국·과장급 간부들이 검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고 돌아왔다. 업무차 폴란드로 출장갔던 이근수 부원장은 귀국 예정일을 넘긴 6월10일 현재 지병을 이유로 스위스에 체류하고 있는 상태이다.

 
중수부 세 과, 기획 수사로 내부 경쟁 치열


한 검찰 관계자는, 기업 공개와 합병·주식 불공정 거래에 대한 검사 과정에서의 유착 등 증감원의 고질 비리를 이번 기회에 상당 부분 뿌리뽑겠다는 것이 중수부장을 비롯한 대검 간부들의 의지라고 표현했다. 그는 증감원장 등을 구속한 직후 김기수 검찰총장이 미국으로 출장간 것은 증감원 등의 로비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의미도 있다고 해석했다. 대검은 증감원과 재경원이 추가 구속을 줄이기 위해 주가 하락 등 경제 논리를 동원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관련 기사 76쪽). 이에 대해 한 청와대 관계자는 이런 의견을 내놓았다.

“이미 대검과 경제 부처 간의 파워 게임이 시작되었다. 경제 부처 쪽은 반도체 등 주력 상품의 수출증가율이 줄어들고 주가가 떨어지는 등 경제가 나빠지고 있다는 논리로 검찰의 수사 확대를 막으려고 하고 있다. 어차피 경제계는 뻘밭에서 뒹구는 것인데 이를 사정한다면 경제가 얼어붙는다는 논리를 경제 부처 출입 기자를 통해 확산시키려고 하고 있다. 또 장학로 사건 때는 검찰이 무려 21억원을 떡값으로 분류해 기소하지 않은 것을 들먹여 백원장 등이 받은 1억여 원은 장학로의 떡값에도 못미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검찰 역시 이를 의식하고 매우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있다. 그러나 대검 간부진과 민정수석의 성격으로 볼 때 이 사건이 경제 부처 희망대로 축소되지는 않을 전망이다.”

중수부 사정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공정거래위원회 사건은 중수1과가, 제일은행장 사건은 중수2과가, 증감원 사건은 중수3과가 담당한 것에 주목하라”고 말했다. 그는 “과거 중수부는 이철희·장영자 사건, 명성 사건 등 이미 사회적 문제가 된 사건을 하명받아 수사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안강민 중수부장 취임 이후엔 3개 과가 내사를 토대로 기획 수사를 벌이는 경쟁 분위기가 만들어졌다”라고 말했다. 이 소식통은 “현재 추가 사법 처리자를 발표하지 않는 상황에서 검찰은 나름대로 경제계의 주장을 흡수하고 있다. 검찰은 이러한 수렴 과정을 거쳐 사법 처리 기준을 정한 후, 6월18일쯤 백원장 기소와 함께 이를 일괄 발표할 예정이다. 이 날을 주목하라”고 말했다. 주가 속락이 곧 정권 불안이라는 증권계의 논리가 칼자루를 쥔 중수부를 얼마나 설득해 낼지 궁금하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