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새벽’ 2라운드, 민주노총 출범
  • 朴晟濬 기자 ()
  • 승인 1995.11.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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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단투 결의·정경유착 청소 등 활동 방향 제시…“대화 제의 거부하면 총력 투쟁”
‘이적 단체’로 몰려 주요 간부가 수배되고, 은행 계좌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이 발부되어 집뒤짐을 당하는 등 온갖 고초를 겪어 온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이 마침내 ‘권력과 자본의 강고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11월12일 공식 출범했다.

이 날 서울 여의도에서 민주노총측은 창립을 기념하는 대규모 노동자대회를 열고‘민주노총이야말로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의 전국 중앙 조직’이라고 주장하며 출범을 공식 선언한 것이다.

민주노총이 주최한 노동자대회는 오후 2~5시 산하 8백31개 노조 조합원과 시민단체 회원, 학생 등 3만여 명이 참석하여 열띤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민주노총은 창립 선언문을 통해‘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과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는 노동 조건을 확보하고, 노동 기본권을 쟁취하며, 노동 현장의 비민주적 요소를 척결하기 위해 더 가열찬 투쟁을 벌이겠다’고 결의했다. 노동자들은 창립 선언문 낭독이 끝나자 박수와 환호로 결의 사항을 추인했다.

노동자 대회가 있기 하루 전 연세대에서 열린 대의원대회에서 초대 위원장으로 선출된 권영길씨(수배중·전 언노련 위원장)는 창립 선언에 이은 대회사를 통해, 민주노총이 무조건 투쟁 일변도만을 고집하지는 않을 것임을 분명히하면서도, 대화 제의가 거부될 때에는 단호하게 총력 투쟁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ILO에 정부 제소할 계획

이 날 발표된 대회사에서는 그동안 준비 과정에서 몇 차례 언급됐던 민주노총의 활동 방향이 좀더 분명한 어조로 제시됐으며, 이와는 따로 결의문도 채택됐다. 민주노총측은 활동 방향으로서 ‘△민주노총의 완결된 형태는 산업별 노조연합체이므로 앞으로는 산별 노조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임금·단체협약 투쟁(임단투)을 진행한다. △노태우 비자금 사건으로 확연하게 드러난 정경유착 폐단을 청소하기 위해 본격적인 사회 개혁 투쟁을 벌여 나간다. △노동자를 정치의 주체로 세우기 위한 정치 세력화 작업을 구체화하겠다’고 밝혔다. 또 민주노총의 합법성 쟁취와 주요 간부에 대한 수배 해제를 비롯해 10개 결의 사항을 채택했다.

민주노총이 대규모 노동자 대회를 통해 활동 방향과 결의를 공식화함에 따라, 민주노총과 정부 당국,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더욱 큰 마찰을 빚을 것으로 예상된다. 당국은 이미 11월6일 민주노총에 대해‘이적성 여부’를 조사하겠다고 밝힌 데 이어, 노동자대회가 있기 직전 ‘민주노총측이 설립 신고서를 제출하더라도 이를 반려하겠다’고 공식으로 밝혔다. 민주노총은 합법 단체가 아님은 물론 이적 단체일 가능성까지 있으므로 결코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시사저널〉 제316호 참조).

민주노총측은 11월7일 기자회견을 갖고 이같은 정부 입장을 강하게 비난하고 대응 방안을 마련하는 데 부심하고 있다. 민주노총의 합법성에 결정적 장애가 되는 복수노조 금지 조항·제3자 개입 금지 조항 등 노동법상 ‘독소 조항’에 대해 개정 투쟁을 벌여나가고, 한편으로는 국제노동기구(ILO)에 정부를 ‘규약 위반’으로 추가 제소하겠다는 것이다. 국제노동기구는 94년 6월 국내 노동법의 복수노조 금지 조항이 ‘노동조합의 자유로운 기능을 심각하게 제한하고 있으므로 철폐해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권고문을 한국 정부에 보내왔다. 국제노동기구는 규약을 상습 위반하는 회원국에 대해 최후 수단으로 무역 제재 조처를 내릴 수 있다.
시민단체 지지가 큰 힘

민주노총과 한국노총간 노동운동 주도권을 둘러싼 다툼도 한층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명분 싸움은 이미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한국노총은 노동자 대회가 열리던 11일 민주노총 앞으로‘노동계 대통합’을 호소하는 공개 제안서를 보냈다.‘가뜩이나 어려운 노동 상황에서, 또 하나의 노총이 만들어지면 노동계의 조직 분열을 피할 수 없게 되므로 두 단체의 통합을 통해 불행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민주노총측은‘한국노총측의 대통합 제안은 상층부 논의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거부 입장을 분명히했다. 한국노총의 노동계 대통합 제의는 이번이 두 번째로, 지난해처럼 양측이 평행선만 달리다가 무산될 공산이 크다.

민주노총은 정부 당국·한국노총·전경련을 비롯한 사용자 단체의 반대로 출발부터 사면초가의 위기를 맞고 있다. 하지만 민주노총에게도 원군은 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녹색교통운동·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등 시민 단체들의 지지를 얻고 있는 것이다. 이 시민단체들은 민주노총이 출범하기 직전‘정부가 노사 관계의 새 모델을 만들어 나가고 합리적인 중재자 역할을 찾으려면, 노동자들의 자율 결사체인 민주노총의 존재를 인정하고 대화 상대자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성명을 냈다. 민주노총을 불법 단체로 묶어두려는 당국의 노력이 결코 쉽게 이뤄지지 않을 것임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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