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 금융 신청 늦춘 ‘임창렬 미스터리’
  • 李敎觀 기자 ()
  • 승인 1998.03.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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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11월19일 발표’ 약속 어겨…미·일·IMF 경악, 신인도 추락
강경식 경제팀이 전격 경질되고 임창렬 경제팀이 들어선 시점은 외환 위기로 인해 국가 부도 상황으로 내몰리던 지난해 11월19일이었다. 강경식 경제팀은 밤을 꼬박 새워 마련한 금융안정대책과 국제통화기금(IMF) 구제 금융 신청안을 그 날 오전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재가 받았다. 같은 날 오후 임창렬 신임 경제 부총리는 이를 발표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임부총리는 증시가 마감된 직후 금융안정대책을 발표하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구제 금융 신청을 빠뜨렸다.

당시 임부총리가 구제 금융 신청을 발표하지 않은 ‘사건’은 지금까지도 ‘IMF 사태’와 관련한 최대 미스터리로 꼽히고 있다. 실수든 고의든 임부총리가 이 날 구제 금융을 신청하지 않음으로써 강경식 부총리가 경질되기 직전 국제통화기금·미국·일본 정부와 합의한 약속을 뒤집은 꼴이 되어 한국 정부의 대외 신인도가 급속히 추락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당시 외환 위기가 더욱 가속화한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지적한다.

“YS·임창렬, 구제 금융 신청 번복”

그렇다면 임부총리가 구제 금융 신청을 빠뜨린 이유는 무엇인가. 지난 한 달 동안 이 미스터리를 추적한 <시사저널>은 그 중심에 임 전 부총리가 있음을 확인했다. 11월19일 구제 금융 신청이 번복되는 과정을 잘 알고 있는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임 전 부총리는, 부총리로 임명된 직후 자신이 경제팀을 맡게 된 이상 IMF로 가지 않게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구제 금융 신청을 발표하지 말자고 김대통령에게 건의해 재가 받았다”라고 증언했다.

당시 임부총리는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 총재, 루빈 미국 재무장관, 미쓰즈카 일본 대장성 장관에게 양해를 구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백악관은 한국 정부가 11월19일 구제 금융을 신청하지 않자 충격을 받고 루빈 장관을 참석시켜 긴급 대책을 강구했다. 일본 정부도 경악에 가까운 반응을 나타낸 것으로 전해졌다. 일본의 <마이니치 신문>이 사설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반미 성향의 임부총리를 임명한 것이 최대 실책’이라고 지적한 배경은 여기에 있다.

따라서 한국 정부의 대외 신뢰를 추락시킨 책임은 임 전 부총리와 김 전 대통령이 함께 져야 할 것이라고 앞서의 소식통은 주장했다. 11월19일 하루에 구제 금융 신청 결정을 재가했다가 이를 뒤집는 결정을 재가한 것도 모두 김 전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 IMF로 가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긴 YS는 임 전 부총리의 건의가 있자 구제 금융 신청 결정을 번복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앞서의 정부 고위 관계자는 지적한다.

YS는 이 때문인지 1월12일 강 전 부총리와 김인호 전 경제수석 등과 가진 청와대 만찬에서 ‘11월19일 구제 금융 신청이 발표되지 않은 이유가 뭐냐’는 한 참석자의 집요한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당시 임부총리의 건의를 수용한 배경에 자신의 임기 중에 IMF로 가는 것을 피하려는 심정이 자리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당시 임부총리의 건의에 따라 결심을 바꾸었다는 사실을 감출 아무런 이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임 전 부총리측은 이같은 사실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그의 비서실장으로 근무한 재경부의 한 관계자는 지난 3월2일 <시사저널>과 가진 전화 통화에서, 임 전 부총리는 강 전 부총리로부터 11월19일에 IMF 구제 금융 신청 결정에 대해 들은 바 없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임 전 부총리는 금융안정대책만 인수해 발표했을 뿐 IMF 구제 금융 신청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좀더 상세한 확인을 위해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임 전 부총리측은 거절했다.

그러나 임창렬 전 부총리측의 주장은 사실과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임씨가 부총리로 임명된 직후 열린 경제장관회의에서 김 전 대통령이 재가한 구제 금융 신청 결정에 대한 난상토론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때 경제장관회의를 주재한 부총리가 구제 금융 신청 결정을 몰랐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이는 당시 한은 이경식 총재조차 구제 금융 신청이 발표되지 않자 김용태 청와대 비서실장과 김영섭 경제수석에게 항의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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