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개국 석학 긴급 진단]등소평 사후 중국은 어디로
  • 卞昌燮 기자 ()
  • 승인 1995.05.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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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일·독·대만 전문가 ‘등소평 사후’ 중국 긴급 진단
중국의 최고 지도자 등소평(90)의 사망 임박설이 최근 또다시 강하게 흘러나오고 있다. 그에 대한 사망 임박설은 올해 초부더 끈질기게 제기됐으나 얼마 전에는 ‘식물 인간설’과 ‘건강 회복설’이 번갈아 나돌았었다. 이번 소문의 진원지는 중국 정부의 고위 관리들과 맥이 닿아 있는 것으로 알려진 홍콩의 유력 영자지 <이스턴 익스프레스>이다. 이 신문은 지난 4월24일자에서 등소평의 다섯 자녀가 앞으로 한달 동안 북경을 벗어나 여행할 계획을 모두 취소했다고 보도했다. 이같은 보도는 이틀 전인 22일 홍콩의 <연합보>가 ‘등소평이 뇌를 사용할 수 없고 말도 할 수 없으며 단지 심장만 뛰고 있다’고 보도한 뒤여서 등의 사망 임박설을 뒷받침해 준다.

78년 이래 중국의 개혁·개방을 주도해온 등소평이 없는 중국은 어디로 갈 것인가. <시사저널>은 미국·일본·독일·대만 4국의 대표적인 중국 전문가들의 특별 기고를 통해 등소평 사후 중국의 장래를 포괄적이고 심층적으로 진단해 보았다.

해외 전문가들은 대체로 중국이 등소평 사후 권력 이양에 따른 정치적 혼란은 크게 겪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오히려 중국이 맞게 될 가장 큰 불안 요인은, 올해로 시장 경제 도입 7년째를 맞아 걷잡을 수 없이 뛰고 있는 물가와 빈부 격차, 도시와 농촌 간의 개발 격차 등에 따른 상대적 빈곤감 등 주로 경제·사회적 현상에 있다고 진단했다. 물론 다른 불안 요인으로 지역분리주의와 지도부 내의 권력 투쟁도 제기됐다.

미국의 아시아 전문 연구 단체인 미·아시아 연구소의 토머스 로빈슨 박사는 “가장 중요한 것은 등소평 사후 들어설 중국 지도부가 힘겨운 난제들을 극복해낼 지도력을 얼마나 발휘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라고 지적했다.

도쿄 대학 조교수를 지낸 중국 문제 전문가 마쓰조에 요이치씨는 “물가 불안과 빈부 격차 등과 같은 경제적 요인이야말로 등소평 사후 중국을 큰 혼란에 빠뜨릴 수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또 등소평 사후 중국이 해군력을 중심으로 군비 강화에 나설 경우 일본이 안고 있는 안보 불안을 가중시킬 수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대만 대학의 이병남 교수는 등소평 사후 강택민 국가 주석을 중심으로 집단 지도체제가 순조롭게 이뤄질 경우 두 나라 관계는 안정 속에 발전을 꾀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았다. 특히 그는 중국 정부가 등소평 사후에도 일국양제(하나의 국가를 전제로 두 체제를 인정하는 것)를 바탕으로 한 평화 통일 정책을 계속 추구할 것으로 전망했다.
독일 함부르크 소재 아시아연구소의 중국 문제 전문가인 오스카 베겔 박사는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 간의 갈등, 물가 불안, 사회 전반의 부패 등이 등소평 사후 중국의 장래를 위협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특히 “등소평 사후 중국은 군사력 강화와 무역 분야에서의 갈등으로 유럽연합과 마찰을 빚을 것”으로 진단했다.

등소평은 자신의 사후에 대비해 이미 오래 전부터 강택민에게 당·정·군의 최고직을 모두 이양한 상태다. 그러나 강택민은 군부와 아직 굳건한 관계를 다지지 못한 상태인 데다 당내 지도력 역시 확고하지 않다는 점이 약점으로 꼽힌다. 따라서 그는 등소평 사후에 집단 지도체제를 택할 것으로 보이며, 이 체제의 안정 여부에 따라 등소평이 뿌려놓은 개혁·개방의 씨앗이 21세기에 만개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판가름 날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 공산당은 등소평 이후 최고 지도자끼리의 권력 배분을 위해 최선을 다해 왔다. 등소평 이후의 지도자들로는 江澤民 당 총서기·李鵬 총리·朱鎔基 부총리·喬石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을 꼽을 수 있다.

강택민 총서기는 국가 주석과 당 중앙군사위 주석을 겸임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군부와의 관계가 취약한 데다 지도력이 강력하지 않기 때문에 입지는 확고해 보이지 않는다. 화국봉과 달리 강택민에게는 당 내에 그와 투쟁할 만한 카리스마적인 경쟁자가 없다. 앞으로 1~2년 동안은 권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붕 총리는 천안문 사태 당시 유혈 진압을 명령한 장본인이라는 점에서 호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심장병을 앓고 있다. 그는 주은래의 양자라는 사실 때문에 정적들로부터 보호 받을 수 있었다. 그 역시 당분간 권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나, 등소평 이후 권력 이양이 순조롭게 이뤄진 뒤에는 권력에서 소외될 가능성이 높다.

많은 사람이 주시하는 인물이 주용기 경제 부총리이다. 지략이 풍부한 그는 물가 상승과 재정 적자, 그리고 자본주의화의 부작용 속에서도 오늘날 중국 경제를 개발 대열에 무리 없이 연착(軟着)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는 중앙 정부와 상해 시에 친구가 많다. 그를 제거할 경우 중국에 중앙 통제식 경제가 부활해 외국인 투자가들이 발을 빼는 상황이 올 것이다. 따라서 자기 직책에서 벗어나지 않는 처신을 하는 한 그는 상당히 오랫동안 현직을 유지할 것 같다.

북경에서 지역으로 ‘권력 이동’

마지막으로 교석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은 과거 레닌 생존 당시 스탈린처럼 뒷전에서 일을 꾀하는 사람이다. 그는 또한 국내 치안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등소평 이후 최고위직까지는 오르지 못할 듯하다.

등소평 이후 2년 동안은 비교적 안정적인 지도체제가 들어설 것이다. 강택민 총서기는 군부와 가까워지려고 노력할 것이다. 주용기 부총리는 자기가 경제 개혁의 기수임을 내세울 것이며, 이붕 총리는 주용기 부총리가 성공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한 방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교석은 당분간 시간을 벌면서 이붕 총리와 주용기 부총리 사이에 불화가 발생하기를 바랄 것이다.

등소평 이후 권력 구조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핵심적 요인은 현재 중국이 당면한 경제 및 사회 문제들이다. 이미 중국 전역에는 부패가 만연해 당의 위신을 급속히 떨어뜨리고 있다. 마르크스-레닌-모택동으로 이어지는 이념 노선이 도전 받고 있으며, 개방 정책은 부분적으로 축소될 조짐도 있다. 정치 권력의 축이 당으로부터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이익 단체로, 북경에서 지역으로, 정치 단체에서 경제 단체로 이동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재조정 과정은 새롭게 분출될 사회·경제적 도전에 대처하는 데 미흡할지 모른다. 물가는 계속 치솟아 지난해 20% 이상 올랐다. 만일 물가를 잡지 못하면 89년과 같은 전국적인 폭동이 재연될 수도 있다. 전통적으로 당의 권력 기반인 노동자와 농민은 당 간부들과 이들의 자제, 신흥 기업가들이 자신들의 희생을 담보로 하여 부유해지는 데 엄청난 분노를 느끼고 있다.

젊은이들은 서구 문화에 급속히 빨려들고 있고, 이들의 범죄는 중요한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이미 주택·직장·식량배급은 물론 가구 등록제까지 폐지한 상황에서 당이 주민을 통제할 수단은 별로 없다. 이런 가운데 중국의 새 지도자들이 앞으로 발생할 사회·경제 문제에 성공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여러 사정을 감안해 볼 때 중국의 장래는 다음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경제 개혁이 계속되고 정치 권력이 중앙과 지방 정부 간에 재조정되는 경우다. 당은 기존 이념을 재검토해 젊은이들을 끌어들여야 한다. 역동적인 사회·정치 현상에 부응해 지도 체제도 이에 맞춰 변화해야 하나 과거처럼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가 나와서 1인 독재를 하기는 힘들 것이다. 경제는 완전한 시장 경제를 향해 치달을 것이며 자연히 경제성장률도 높아질 것이다. 당은 물가를 계속 통제할 것이고, 개방 정책은 유지할 것이다.

둘째, 보수파가 득세해 경제 개혁을 후퇴시키는 경우다. 당의 이념가들과 군부 실력자들이 정권을 잡게 되면 개혁은 중단되며 계획 경제가 되살아날 것이다. 외국인 투자가들이 철수하고 경제성장률도 떨어질 것이다. 그나마 중국인이 누리던 사회적 자유는 모택동주의와 민족주의를 강요하는 당과 군부의 통제 때문에 제한 받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붕 총리는 건재할 것이나 주용기 부총리는 위태로울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정치가 혼란에 빠지면서 경제도 통제력을 상실하는 경우다. 확고한 결단력을 갖춘 지도자가 등장하지 않을 경우 정치 위기는 더욱 가속화할 수 있다. 당의 통제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으며, 하급 관리들의 부패가 만연하는 것은 물론 개혁을 방해하려는 수구 세력이 준동할 것이다. 경제는 철저히 각 자치성 별로 이기주의에 빠져 경제 위기가 닥칠 것이다. 중앙 정부는 통제 불능에 빠지게 되고, 전국적으로 내란이 발생해 전례 없던 극좌 공산 정권이 들어설 가능성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강택민·이붕·주용기·교석 등 핵심 지도자가 모두 살아 남을 가능성이 없다.

등소평 이후 중국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세 가지 대안 가운데 어느 것이 되든,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등소평 이후 중국의 상황은 이웃 나라는 물론 전세계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단기적으로 등소평 이후 권력을 누가 잡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점이다. 더 중요한 것은 등소평 이후 불거져 나올지 모를 힘겨운 난제들을 국가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지도력이 있느냐 하는 점이다.
중국 최고 실력자 등소평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이에 따라 중국뿐 아니라 관계국들도 등소평 이후에 대비한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일본에서도 작년에 중국 투자 붐이 일어 13억 시장에 대한 기대가 부풀었던 것만큼 등소평 사후의 중국에 대한 관심이 대단하다. 만약 등소평의 서거로 인해 중국 내부에 큰 혼란이 일어난다면 투자 자본을 상실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앞서기 때문이다. 한편 정치·외교 관계에서도 중국의 내부가 불안정해진다는 것은 일본 정부로서도 골치 아픈 일이다.

일본의 많은 중국 전문가가 등소평 사후 중국이 엄청난 혼란에 직면하리라고 분석하고 있다. 미국 중앙정보국이 작성한 보고서 때문에 그런 관측은 지금도 지지 폭을 넓혀가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중국의 혼란은 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첫째, 강택민 주석 주변에 모든 권력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등소평은 천안문 사건 이후 그런 예측 불허 사태가 또다시 돌발하지 않도록 강택민에게 당과 군, 그리고 국가의 최고 요직 3개를 동시에 부여했다. 그러나 카리스마적인 지도력이 없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강택민 주석을 비롯해 이붕·주용기·교석·호금도 등을 중심으로 한 집단지도체제가 확립되어 있다고 본다.

빈부·도농 격차는 경제 활성화에 도움

한편 교석이 당 중앙을 비판하고 양상곤·팽진 등 당 원로가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등소평 사후 권력 투쟁을 일으킬 가능성은 없다. 문제는 강택민이 등소평에 비해 최고 지도자로서의 스케일이 작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는 일시적 혼란이 있을 수 있다.

올해는 태평양전쟁 종전 50주년이 되는 해다. 11월에는 오사카에서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회의 총회가 열린다. 대만 이등휘 총통이 이 총회에 참석할 의향을 비치고 있어 2개의 중국을 인정치 않겠다는 북경 정부와 마찰이 일어날 소지가 크다.

등소평이 만약 가을까지 연명한다면 중국측이 이 문제에 유연한 자세를 취할 수 없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중국과 대만의 틈바구니에서 또 한 번 큰 진통을 겪게 될 것이다.

중국은 연간 10%를 넘는 경제 성장을 달성하고 있어 일본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일본인들은 눈부시게 성장하는 오늘의 중국을 60년대 일본의 고도 성장 시대와 비유하곤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인플레다. 작년만 해도 20%를 넘는 인플레를 기록했다. 중국 정부가 직면한 최대 문제는 인플레 퇴치다.

또한 소득 격차, 도시와 농촌의 빈부 격차, 그리고 업종간 격차 등 수많은 격차가 가지지 못한 자의 불만을 부채질할 가능성도 있다. 바로 이런 불안정 요소가 등소평 사망을 계기로 일거에 폭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국 혼란설’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그런 격차의 존재가 오히려 중국 경제를 활성화하리라고 본다. 예를 들어 농촌에서 도시로 인구가 유입하는 현상은 공업화에 필요한 노동력을 공급해 준다는 점에서 중국 경제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는 구실을 한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60년대 일본도 이런 격차가 존재했기 때문에 고도 성장이 가능했다.

등소평 사후에도 일본 정부는 중국의 민주화·자유화·근대화를 지원한다는 방침에는 변함이 없다. 물론 일본 정부 내에는 해군력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군비 확장 움직임에 비판적 시각을 가진 사람도 많다. 때문에 지난번 한신 대지진에 한국·중국은 물론 북한에서까지 원조 및 위로 전문이 온 것을 계기로 필자는 중국 및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이룰 수 있으리라고 본다.
등소평 이후의 중국과 대만 관계를 거시적인 각도에서 보면, 크게 두 방면으로부터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는 북경에서 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만에서 오는 것이다.

우선 북경 방면을 살펴보면, 아래의 몇 가지 요인의 영향이 비교적 중요할 것이다. 첫째, 정권의 평화적 이양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이다. 만약 정권이 순리적·평화적으로 강택민을 중심으로 하는 영도 집단으로 넘어가게 된다면, 중국과 대만 관계는 당연히 안정 속에 발전을 하게 될 것이다.

집단 영도 체제 채택 가능성 많아

둘째, 등소평 사후 북경 정권이 어떤 식의 영도 체제를 택할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개인의 카리스마적인 영도 체제를 택할 것이냐, 아니면 집단 영도 체제를 택할 것이냐 하는 점이다. 이 문제에 대해 필자는, 강택민은 개인의 권력을 안정시키기 위해 집단 영도 체제를 채택하여 북경 정권의 흐름을 유지하려 할 것으로 본다.

즉, 북경 정권은 등소평이 남긴 ‘일국양제, 평화통일(一國兩制, 平和統一)’ 방침에 의거하여 중국·대만 관계를 처리할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대만 관계라는 커다란 문제에서는 등소평의 방침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것이 갈등을 피하고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가장 적기 때문이다.

셋째, 등소평 이후 중앙과 지방 관계의 문제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등소평 사망 이후 강택민을 중심으로 하는 영도 집단은 틀림없이 평화적이고 안정적으로 모든 정부 권력을 장악할 것이고, 단기적으로는 중앙과 지방의 관계에 큰 변화가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대만 처지에서 볼 때 두 가지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우선은 대만 당국이 명시한 바와 같이, 등소평 이후의 중국과 대만은 경제와 무역 합작을 주축으로 하여 진일보한 발전을 모색할 것이다. 이 방침은 중국과 대만의 긴장을 완화하는 데 크게 도움을 줄 것이다. 등소평 사망 이후 대만 당국은 국방 안전을 이유로 단기간에는 교류 증진을 멈추지 않을 것이며, 적절한 수준 내에서 교류를 더욱 강화할 것이다.

예를 들어 해외해상운송센터를 설립해, 중국과 대만 간의 실질적인 통항 교류 촉진을 명분으로 대륙의 노동자들이 대만에서 일할 수 있도록 적당히 개방하고, 중국과 대만의 정치적 접촉을 증가시키는 일들은 모두 대만측이 주체적으로 취하는 정책이다. 그밖에도 대만 당국의 외교 정책은 장기적으로 신중한 보수 성향을 띠어 북경 정권을 자극하는 행동을 피하려 할 것이다.

다음으로 대만이 96년 처음으로 총통 선거를 하기로 결정했다는 점이다. 총통 선거는 누가 대만의 미래 정권을 주도하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으며, 또한 누가 96년 이후 대만을 장악하게 되느냐 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대만 당국은 총통 선거 전에 중국과 대만의 정치관계에 대해 어떠한 조처도 취하지 않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대만의 처지에서 등소평 이후 대만 당국은 경제적인 방면에서는 비교적 주도적이고 적극적으로 움직일 것이다. 외교 방면에서는 중국을 자극하는 일을 피하고 돌발 사태를 막기 위해 잠정적으로 보수적인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다. 정치 면에서도 총통 선거가 목전에 있으므로 단기간에는 어떠한 돌발적 행위도 취하지 않을 것이다.
등소평 사후의 중국 앞날에는 몇 가지 약화된 측면들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우선은 뚜렷한 색깔이나 힘이 없는 지배 체제가 유지될 것이다.

둘째, 자치 권한 확대에 따라 북경 중앙 정부의 절대 권력이 점차 제한될 것이다. 자치화는 여러 측면에서 점차적으로 파급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먼저 기업 운영 체제를 꼽을 수 있다. 84년 이후 기업들은 더 이상 국영 체제 아래에 놓인 하부 기관으로 간주되지 않고 인사·생산·분배 및 가격 결정에서 자율권이 주어졌다.

또 다른 측면은 각 지역 별 자아의식의 성장이다. 특히 등소평의 개혁 노선에 편승하여 부유해진 남동부 해안 지방 주민들 사이에 싹튼 새로운 생활에 대한 자아의식은 그동안 크게 성장했고, 지방어 사용도 번지고 있다. 심지어 일부 지방에서는 중앙 정부가 거두어들이는 세금도 일정한 한도 내에서만 납부하려 하는 추세이다.

새로운 도시 중산층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도 주의 깊게 봐야 한다. 각 개인과 지역으로 하여금 사유 재산 축적을 최초로 허용한 등소평의 개혁 정책은 이들에게 자아의식이 급성장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이들의 의식 변화는 장기 집권한 국민당으로부터 민주화를 쟁취한 대만 신중산층의 움직임을 연상케 한다.

셋째, 90년대부터 시작된 중국의 초고속 경제성장 정책도 중국의 약화를 가져올 수 있다. 94년 국민총생산이 12% 성장하는 등 중국 경제는 성공을 거두고 있으나, 여기에는 24%(94년)에 달하는 인플레이션, 극한 상황에까지 이른 개인 및 지역간 소득 격차 그리고 급증하는 부정부패 등 심각한 사회 문제가 뒤따르고 있다. 특히 사회 전반에 만연한 부정부패를 퇴치하려면 의회로 하여금 효율적인 통제와 압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만 하는데, 등소평 사후에 불안해진 당 지도부는 통치권 독점 체제 유지라는 이해관계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중국에는 전반적으로 과거의 전통이 되살아나고 있는 반면, 모택동주의는 심리적으로 한없이 먼 과거처럼 멀어져 가는 듯이 보인다. 모택동의 계급 투쟁 강조는 중국인들의 융화사상과 모순을 낳았고, 그의 (자아)비판 실천은 유교적 시각에서 볼 때 인권을 모독하는 요구였으며, 평등사상은 그들의 몸에 밴 위계 질서와 정면 배치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중국인은 이러한 잘못된 모택동 사상을 등소평이 깨버렸다고 평가하고 있다.

대외적으로도 중국은 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기가 한풀 꺾였고, 러시아·한국·인도 등 모든 적대국과 화해함으로써 옛 우방들과 다시 연결고리를 찾기 시작했다. 중국은 더 이상 주변국에 대한 ‘외적 팽창’보다는 옛 우방들의 머리를 빌려 ‘내적 충실’에 심혈을 기울이려 한다. 내부 문제로 지친 허약한 지도부가 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다.

중국·유럽 유대 관계 강화될 듯

30여 년 간의 모택동주의와 10여 년 간의 개혁 바람 이후, 현재 중국은 조용한 침묵의 시대를 맞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 ‘혁명적 실험’을 계속하기보다는 부자가 되기를 바란다. 이 길로 중국을 인도한 것이 등소평의 업적이다.

유럽의 시각으로 보면 이미 등소평 시절부터 시작된 유럽과 중국의 유대 관계는 등소평 사후에는 더욱 강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교역 증대를 통한 상호 의존이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럽연합에서는 부정적인 측면을 우려하고 있다. 점증하는 사회 문제 외에 군사비 지출 증가를 통해 군사력이 강화되고, 무역 장애물이 등장할 것으로 점치고 있다. 특히 덤핑이나 저작권 및 특허권 침해 등 무역협정이 아직 체결되지 않은 분야에서 문제점이 본격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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