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지금 ‘PK 공화국’
  • 문정우 기자 (mjw21@sisapress.com)
  • 승인 1996.07.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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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내 사람 심기’에 PK가 요직 싹쓸이…문제 인물 중용에 고향 선후배 대물림까지
김영삼 대통령은 ‘인사는 만사’라는 말을 즐겨 입에 담는다. 그러나 김대통령의 인사 방식을 제대로 표현하려면 거기에 한마디쯤 덧붙여야 할 것 같다. ‘인사는 분명 만사다. 그러나 만사는 내 사람에게 맡겨야만 안심할 수 있다.’ 특히 집권 후반기에 접어들면서부터는 김대통령의 ‘내 사람 보살피기’가 인사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형편이다.

김대통령의 또 다른 특기였던 ‘깜짝 인사’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이다. 뜻밖의 인물을 발탁해 주변을 놀라게 하는 일은 더 이상 벌어지지 않는다. 물론 그것이 김대통령의 인사가 안정되어 가고 있다는 반증은 아니다. 누가 요직에 발탁될지 이제 누구도 궁금해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최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인물은 대부분 김대통령의 고향 후배거나, 어떤 형태로든 김대통령에게 충성심을 입증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김대통령의 후배 사랑과 주변 인물 편애는 어떤 악조건에서도 식을 줄을 모른다. 4·11 총선 부정 시비 끝에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해 국회가 문을 못 열고 있는 최근에도 김대통령은 신한국당 낙선자들과 공천 탈락자들에게 공기업 수뇌부 자리를 나눠주었다. 특히 충청권에서 JP 바람이 거셀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김대통령과의 의리를 지켜 신한국당 후보로 지난 총선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인사들은 거의 예외없이 큼직한 자리들을 차지했거나 약속 받았다.

 
PK 내부에서도 출신 학교 위상 엎치락뒤치락


공화계이면서도 김대통령과 경남고 3회 동기라는 인연 때문에 자민련에 가지 않은 최재구 신한국당 고문은 산업은행장 자리에 올랐다. 자민련의 집요한 영입 유혹을 뿌리쳤다가 대전에서 낙선한 남재두 전 의원은 <대전일보>를 운영하고 있음에도 한국관광공사 이사장 자리를 받았다. 각각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 포철 고문, 한전 고문, 주택공사 이사장 내정설이 도는 홍재형·황명수·송천영·박희부 씨도 비슷한 경우이다. 이밖에 공사와 정부 투자기관의 중요 요직에 배치된 사람들은 대부분 업무 능력과는 상관없이 김대통령과의 특수한 관계 속에서만 발탁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정부 요직을 PK가 독식하는 현상도 점점 심해지고 있다. 최근 수뢰 혐의로 구속된 백원구 증권감독원장 후임으로 내정된 박청부씨는 김대통령의 경남고 후배이다. 그는 94년 한국가스공사 이사장으로 있다가 아현동 가스 폭발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난 인물이다. 또한 임기가 끝난 부산 동래고 출신 이상무 해병대 사령관 후임으로 발탁된 전도봉 신임 사령관도 김대통령의 고향인 경남 거제 출신이다.

물론 정부 요직을 PK가 독식하는 현상이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다. 김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국가를 움직이는 5대 요직, 이른바 빅5라 불리는 안기부장·검찰총장·경찰청장·국세청장·육군참모총장 자리에 자신의 고향 후배나 측근을 전면 배치했다. 이는 지난 30년간 군사 정권과 밀착되어 있던 TK 인사들을 그 자리에 두고서는 김대통령이 자신의 뜻대로 국정을 움직이기 힘들었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정권 후반기에 이르기까지 이들 요직을 김대통령의 측근이나 고향 선후배들이 계속 대물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나치게 출신 성분을 중시하다 보니 흠집이 있는 인사들이 중용되기도 한다. 청와대에서 누가 대통령의 신임을 받는가에 따라 PK 내부에서 출신 학교의 위상이 달라지기도 한다. 가령 동래고 출신인 박관용 의원이 대통령 비서실장에 있을 때는 동래고 출신이 대거 발탁되고, 그가 한직으로 밀려나자 다른 고등학교 출신들이 밀고 들어오는 식이다.

안기부는 학자 출신 부장인 김 덕씨나 군 출신인 권영해씨보다는 김대통령의 직계 가신이나 경남고 후배들에 의해 장악되어 왔다. 안기부 내에서 정권 안보의 중추 역을 맡고 있는 국내 담당 1차장은 정형근·황창평·오정소 씨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4·11 총선 때 신한국당 공천을 받아 부산에서 당선한 정씨는 경남고 출신이며, 지난해 개각에서 보훈처장으로 발탁된 황씨는 마산 출신이고, 오씨는 YS 정부 들어와 새롭게 각광받고 있는 경복고 출신이다.

검찰과 법무부는 그야말로 PK 출신의 독무대이다. 김도언 전 총장은 부산 동래고, 김기수 현 총장은 경남고 출신이다. 총장 예비 군단으로 꼽히는 공안부장·중수부장·감찰부장도 모두 경남고 출신이 차지하고 있어, 차기 총장도 경남고 출신에게 돌아갈 공산이 크다. 게다가 안우만 법무부장관 역시 경남고 출신이다. 경찰도 예외가 아니다. 박일룡 청장이 경남고 출신이며, 차기 경찰청장으로 유력한 유성식 해경청장이 진해고 출신이다. 박청장은 92년 대선 당시 초원복집 회식 자리에 참석했다는 ‘전과’가 있으며, 유청장은 자녀의 입시 부정 사건으로 직위 해제됐었다는 흠집이 있으나 승승장구하고 있다.

군의 경우 부산고 출신인 윤용남 육군참모총장을 비롯해, 경남 함양 출신인 임재문 기무사령관, 신임 전도봉 해병대 사령관 등 요직을 PK 출신들이 점령하고 있다. 실무 요직도 대부분 PK가 장악하고 있어, 적어도 김대통령 임기 내에는 PK 천하가 계속될 전망이다.

차관급 이하 실무진도 노른자위마다 PK 포진

웬만한 재벌 하나쯤은 죽이고 살릴 수 있는 힘이 있으며, 정치 자금의 흐름을 손바닥처럼 파악할 수 있는 자리인 국세청장 자리도 어느덧 PK 출신의 전유물이 되어 버렸다. 경남고 출신 추경석 청장이 정권 상반기를 담당하고 건설교통부장관으로 영전했으며, 그 자리를 부산고 출신인 임채주 현 청장이 이어받았다.

그밖의 정부 각 부처에서도 PK들의 약진은 두드러진다. 장관급의 경우 경남고 출신이 2명밖에 없지만, 실제로 각 부처를 움직이는 차관급 이하 실무진은 알게 모르게 PK 출신들로 채워져 가고 있다. 지난해 12월23일 정부가 새로 임명한 차관급과 외청장 21명 중 8명이 부산·경남 출신이다. PK 출신 관료가 다른 지역 출신에 비해 결코 많은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어느 사이엔가 정부내 요직을 차지하고 승진을 위한 경력 관리를 하고 있기도 하다.

야권은 김대통령의 이런 인사를 격렬히 비난한다. 정권을 사유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대통령이 퇴임 후에 대해 점점 더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탓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일각에서는 김대통령이 정권 연장을 꾀하고 있지 않은가 의심하기도 한다. 반면 여권내 PK 인사들은 김대통령이 개혁을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자기 사람의 필요성을 절감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기득권 세력의 조직적 저항에 부딪혀 몇 차례 좌절한 뒤 김대통령은 철저하게 자기 뜻을 따를 인물을 발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5년 단임 동안에 무엇인가 이루려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그 배경이 어디에 있든 출신 지역과 충성도가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인사는 결코 정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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