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탈한 민심 휘젓는 '발 없는 말'
  • 崔 進 기자 ()
  • 승인 1995.1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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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금 충격 속 민심 휘젓는 풍설 난무…불투명한 ‘YS 해법’이 토양 제공해
중종의 총애를 받은 조광조의 구시대 청산 작업이 훈신들의 반발로 벽에 부딪히자 민심은 흉흉해지고 세간에는 온갖 풍설이 난무했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노대신들의 저항이 고개를 들었고 무신 역모설까지 흘러나왔다. 시국이 어지러워지면 ‘얼굴 없는’ 도청도설(道聽塗說)이 기승을 부리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노태우 비자금 사건으로 정국이 온통 뒤숭숭한 요즘 시중에는 갖가지 시나리오와 풍설이 끊임없이 생산·유통되고 있다. YS의 파격적인 정국 돌파 스타일과 정치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 비자금 사건이 지니는 고도의 폭발성 등은 시나리오와 설을 잉태하는 토양이 되고 있다. 과연 어떤 시나리오와 설들이 나돌고 있으며 그 근거는 어느 만큼 있는가.


군사 쿠데타설 현 정권을 전면 부정한다는 5공식 군사반란설과 YS정권에 힘을 실어준다는 친위 쿠데타설이 일부 군 관계자들 사이에서 흘러나온다. 군이 쿠데타를 일으킨 뒤 YS를 지지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약간 차이가 있을 뿐, 두 가지 설은 모두 군부가 우익 정권을 세우고자 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쿠데타설의 개요는, 현 정권이 군을 마치 범죄 집단처럼 터부시하고 정부 요직에 진보적 인사들을 중용한 데 불만을 품은 하나회 출신의 한 강경파 장군이 지난해 6월 쿠데타 음모를 꾸미다 발각돼 금년에 강제 예편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으며 반란 세력의 힘이 만만치 않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정치권은 한마디로 난센스라고 일축한다. 5·18과 천문학적인 부정 축재로 군 출신 전직 대통령을 향한 국민의 비난 여론이 극에 달한 데다 군부가 더 이상 발언권을 가질 수 없는 사회 분위기로 볼 때, 군이 정치에 개입하기란 백%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다만 군 내부에 불만이 고조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텔레비전 드라마 <제4공화국>과 <코리아게이트>가 군을 자극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대통령의 탈당과 거국내각 구성설 민자당 총재인 김대통령이 당적을 떠나고 야당의 일부 인사를 각료로 임명한다. 이로써 김대통령은 비자금 정국의 흙탕물 싸움에서 벗어나면서 동시에 여야를 포용하는 대국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최근 민자당의 한 외곽 단체가 이를 대통령에게 건의했다는 그럴 듯한 소문이다. 그러나 총선을 불과 5개월 남짓 앞두고 위험 천만인 당적 이탈을 감행할지는 지극히 회의적이다. 임기를 2년 반이나 남겨둔 시점에서 당적 이탈과 거국내각 구성은 곧 후반기 국정 운영에 어려움만 자초할 것이기 때문이다.

신임투표설 탈당설·거국내각설과 함께 YS의 극약 처방 가운데 하나로 거론된다. 국민투표를 통해 신임을 묻는 일종의 중간 평가인 셈이다. 대선 자금을 둘러싼 현 정권의 적법성 시비와 정권 퇴진 운동의 여지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국민회의측은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국민회의는 11월20일 부대변인 논평을 통해 민자당이 신임 투표 작전을 극비 구상하고 있으며 그 실현 여부는 반반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얻을 수 있는 효과에 비해 기회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것이 이 시나리오가 갖는 난점이다.

정치인 대거 사정설, 여권 재편설 노태우 비자금에 연루된 당내 정치인들을 과감히 사법 처리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여권 내부, 나아가 정계 재편성을 유도한다는 시나리오이다. 실제로 6공 비자금의 ‘원조’인 이원조씨를 추궁하면 여야 정치인 여러 명이 굴비처럼 줄줄이 엮여 나온다는 얘기는 정설로 굳어 있다. 일부 여권 인사들은 이 시나리오의 희생양으로 6공 실세이자 정치 자금에 연루됐던 김윤환 대표까지 포함될 수 있음을 은근히 흘린다. 최근 국회 주변에는 김대표와, 최형우·김덕룡 의원 등 민주계 실세를 포함하는 여야 의원 31명의 명단이 실린 비자금 관련 괴문서(아래 사진)가 나돌아 정치권 사정설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일각에서는 민주계 중진들까지 희생양이 될지 모른다는 추측을 내놓는다. 이에 대해 국민회의측은 YS가 찰과상 또는 경상을 입고서라도 DJ에게 치명상을 가하겠다는 ‘너 죽고 나 살기 작전’이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과연 YS가 당내 다수파인 TK 인맥을 떼내고 총선에 임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남는다. 이미 악화할 대로 악화한 대구·경북 민심을 고려하면, 너무 위험한 도박이 아닐 수 없다.

중·대 선거구제 등 제도개혁설 비자금 정국의 한복판인 지난 10월 말 민자당 서정화 총무가 “야 3당 가운데 두 야당만 제의해 오면 적극 검토하겠다”면서 불을 붙인 선거구제 개편 문제는 여전히 살아 있는 카드다. 정치권 개혁과 전면 개편을 바라는 국민 여론을 지렛대로 활용해 여당에 유리한 선거 지형을 만들어 낸다는 시나리오다. 청와대가 오래 전부터 대선거구제를 깊이 검토해온 데다 최근 민주당이 적극 지지하고 나섰기 때문에 여권으로서는 가장 실현 가능한 대안이다. 확실한 지역 기반을 가진 DJ를 무력화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또한 위험 부담이 크다. 민자당의 한 고위 인사는 “게임 규칙을 바꾸는 문제를 제1야당의 협조 없이 관철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엄청난 출혈을 감수하며 총력전을 펴도 될까말까한 문제다”라고 말한다. 한편 돈세탁방지법 제정, 정치자금법 개정 등 ‘정경유착’을 원천 봉쇄하는 제도적 장치를 도입할 가능성은 매우 높은 것으로 관측된다.

대규모 당정 개편설 비자금 사건으로 침체될 대로 침체된 정국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 청와대와 당·정 전반에 걸쳐 대규모 인사를 단행하리라는, 충분히 예상할 만한 카드다. 더구나 지난 7월로 예상됐던 청와대와 내각 개편이 연말로 미뤄져 있는 상태다. YS가 허주를 대표로 하는 현재의 민정계 중심 구도를 그대로 유지할지, 아니면 민주계를 다시 전면에 내세우는 직할체제로 짤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다. 예산 국회가 끝나는 12월 초순경 개각과 당 개편이 단행될 가능성이 높다.

5·18 정면 돌파설 그동안 광주 문제의 족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던 김대통령이 특별법 제정 등 야권이 주장하는 5·18 해법을 수용함으로써 광주 문제를 정면 돌파한다는 희망 섞인 관측이다. 그래서 오는 12월로 예정된 헌법재판소의 5·18 불기소에 대한 최종 결정은 연말 정국의 또 다른 뇌관으로 지목되고 있다. 5·18 뇌관이 터질 경우 전두환씨가 무사할 리 없다. 최근 김무성 지구당위원장(부산 수영구)을 비롯한 일부 민주계 인사들이 “전두환씨의 정치 자금도 조사해야 한다”고 포문을 열고 나온 점도 예사롭지 않다. 그러나 현 정권이 노씨에 이어 전씨의 목에까지 칼을 들이밀려면 당내 보수 세력의 집단 이탈이라는 출혈도 감수해야 할 것이다.
김대통령은 위기 국면에 몰릴 때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는 카드를 던짐으로써 상황을 역전시키는 능력이 탁월하다. DJ와 대결할 때는 더욱 그랬다. 그래서 ‘얼굴 없는 시나리오’는 상황 변화에 따라 언제든지 ‘현실적 카드’로 떠오를 잠재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6공에서 권력을 잡은 YS는 비자금 정국의 한 당사자다. 강력한 통치력을 바탕으로 자신이 연루되지 않은 문제를 과감히 다루었던 시기, 즉 공직자 재산 공개 때나 금융실명제 도입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정치권 전반을 뒤흔들 만한 핵폭탄 카드를 사용하기에는 스스로 한계가 있다는 얘기다.

조광조의 개혁이 끝내 좌절된 것은, 개혁의 마지막 보루였던 중종 자신이 개혁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김대통령이 요즘 역사와 대화하고 있다는 얘기를 측근들은 자주한다. 김대통령이 중종 또는 조광조와 대화를 나눈다면 어떤 해법을 얻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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