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EC 농업 협상의 뼈아픈 패착
  • 金敎觀 기자 ()
  • 승인 1995.1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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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EC 회담서 '신축적 자유화' 덜컥 합의…문구 '오판'·회담 주도 '과욕'까지
일본의 오사카에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18개 회원국 정상회담이 열리기 이틀 전인 11월17일 김영삼 대통령이 폴 키팅 호주 총리와 가진 단독 회담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회담 하루 전에 열린 각료 회담에서 한국이 미국과 호주 등 농산물 수출국들의 요구를 수용해 농업 분야의 자유화 원칙에 합의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날 김대통령과는 달리 농민들은 쌀시장 개방이 합의된 우루과이 라운드(UR) 때만큼 시름에 젖어야 했다.

사실 농민들은 정부가 에이펙 정상회담에서 농산물 수출국들의 농업 분야 자유화 압력을 충분히 막아낼 것으로 기대했었다. 물론 노태우씨 비자금 사건으로 온 나라가 정신이 없었기에 한 가닥 불안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부가 오사카 회의에 앞서 다른 분야는 몰라도 농업 분야의 자유화만큼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밝혔기에 농민들은 정부가 우루과이 라운드 때와 같이 자신들을 배신하리라 생각지 않았다.

일본측 긴급 수정안에 ‘부화뇌동’

작년 인도네시아 보고르 회의에서 선진국은 2010년까지, 개도국은 2020년까지 모든 분야의 자유화를 실현한다는 보고르 선언이 채택되었다. 이에 한국도 동의했으나 농업 분야는 예외로 할 것을 주장해 왔다. 우루과이 라운드 합의에 따라 쌀 시장을 2000년대 초까지 개방하기 앞서 그에 대비하는 것조차 힘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본·중국·대만도 같은 처지여서 오사카 회의에서 농업은 자유화 대상 분야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11월19일로 예정된 에이펙 18개국 정상 회담에 제출될 행동 지침을 마련하기 위한 16일 각료 회담에서 일본이 갑자기 기존 입장을 번복했다. 농업 분야도 예외 없이 자유화하되 일정은 신축적으로 하자는 수정안을 제출했던 것이다. 이 안의 골자는 ‘각국의 발전 수준과 상황의 다양성을 고려해 자유화와 원활화를 신축성 있게 추진한다’는 것이다. 이 안은 한국·중국·대만을 포함한 모든 회원국의 지지를 받으면서 행동 지침으로 채택되었다.

농업 분야만큼은 절대 보고르 선언에 명시된 기한 내에 자유화를 할 수 없다고 버티던 일본이 입장을 번복한 1차적인 까닭은 주최국으로서 이번 회의를 성공적으로 운영하자는 데 있다.

그러나 본질적인 이유는, 어차피 미국·호주 같은 농업 수출국들의 압력을 피할 수 없을 바에는 차라리 농업 분야 자유화 원칙을 받아들이되 일정은 신축적으로 하자는 수정안을 내놓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한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면 한국 정부가 농업 분야 자유화 원칙에 동의한 까닭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두 가지를 들고 있다. 우선 일본 정부가 내놓은 수정안이 가지는 애매모호함에서 그 첫 번째 까닭을 찾을 수 있다. 그 수정안은 농업 분야 자유화 일정이 각국의 특수한 사정에 따라 신축적으로 조정될 수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때문에 한국 정부로서는 농산물 수출국들의 압력에 이런저런 사정을 내세워 자유화 일정을 마냥 늦출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는 것이다.
한국 정부가 그와 같은 기대를 가지고 농업 분야 자유화 원칙을 수용한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지금까지 모든 국제 협약 체결에서 ‘문구의 애매모호함’은 언제나 약자의 편이 아니라 강자의 편이었다는 것을 모르는 순진한 판단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에이펙에서 농업 분야 자유화를 어떻게 하면 실현시킬 것인가 하고 눈에 불을 켠 미국과 호주가 그같이 애매모호한 수정안에 찬성했을 리가 만무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 까닭으로 전문가들은 한국이 에이펙을 주도해야겠다는 야망에 눈이 어두웠다는 점을 꼽는다. 에이펙 회원국과의 무역량은 한국 대외 무역량의 70% 가량을 차지한다. 때문에 에이펙 내의 무역 자유화는 한국 경제에 필요하다는 것이 한국 정부의 판단이다. 따라서 에이펙의 자유경제 블록화를 가로막는 농업 분야의 자유화 문제를 일단은 자발적으로 푸는 것이 에이펙을 주도할 수 있는 길이라고 보았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한국 정부가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에서 농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진국들의 쌀시장 개방 요구를 수용했던 것도 그러한 요구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앞으로 세계무역기구(WTO)에서 주도권을 쥘 수 있다는 기대가 있었다. 물론 선진국과의 쌍무적인 개방 협상이 훨씬 더 어렵기 때문에 우루과이 라운드라는 다자간 협상에서 농산물 시장 개방 문제를 푸는 것이 유리하다. 하지만 정부의 그와 같은 기대는 최근 한·미 자동차 분쟁에서 보듯 현실성이 없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에이펙, 경제 블록화 가능성 낮아

그러면 한국 정부가 우루과이 라운드나 에이펙과 같은 국제 무역 협상에서 농산물 시장과 같은 대외 경쟁력이 없는 분야들의 자유화에 대해 최대한의 협상력을 발휘하여 막지 못하는 까닭은 무얼까. 그 책임은 국내의 일부 개방 지상주의자들에게 있다는 비판이 높다. 이들은 대외 경쟁력이 취약한 분야들이 자유화될 때에 대한 대비책은 내놓지 않고 무조건 세계적인 개방 추세에 발을 맞추어야 한다는 주장만 소리 높여 외쳐 왔다는 것이다.

어쨌든 행여 한국 정부가 에이펙을 주도하겠다는 야망에 따라 농업 분야 자유화 원칙을 받아들였다면, 한국의 에이펙 정책이 얼마나 현실성이 없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까닭은 두 가지이다. 우선 에이펙이 유럽연합(EU)이나 북미자유무역지대(NAFTA)와 같은 경제 블록이 되기에는 아직 넘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다는 데 첫 번째 까닭이 있다. 무엇보다 아직도 에이펙이 역외 국가들에 대해 차별성을 가지느냐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도 결정된 바 없다.

한 전문가는 에이펙이 차별적인 자유 경제 블록이 되기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로 다음과 같은 예를 들었다. 예컨대 회원국인 말레이시아가, 이웃 나라인 방글라데시가 단지 회원국이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적으로 대하고 지구 반대쪽에 있는 칠레는 회원국이라고 해서 호혜적으로 대하는 것은 결코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에이펙 회원국 여러 나라들이 이와 같은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그 다음은 설사 에이펙이 역외 국가들에 대해 차별적인 경제 블록이 된다 해도 과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만약 에이펙이 역외 국가들에 대해 차별적인 무역 자유화 계획을 추진한다면 유럽 국가들은 이 문제와 관련해 우루과이 라운드와 같은 전세계적인 협상을 벌이자고 주장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지적한다. 그러지 않더라도 에이펙 회원국들은 차별적인 무역 자유화를 한 만큼 역외 국가들에게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에이펙이 역외 국가들에 대해 차별적인 자유 경제 블록이 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럼에도 한국 정부는 뾰족한 대책 없이 농업 분야 자유화 원칙을 수용하는 잘못을 범했다. 이에 반해 농산물 수출국들은 농산물 수입국들의 성채를 힘 안들이고 허무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에이펙 정상회담이 역내 농업 분야의 자유화를 결정하던 19일 한국에는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다. 그래서 이 날 한국 농업은 다시는 봄이 오지 않는 겨울로 떼밀려 가는 듯 처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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