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중공업, 창원공장 매각 둘러싸고 '진통'
  • 경남 창원·成耆英 기자 ()
  • 승인 1998.03.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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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 보장·위로금 액수 놓고 노사 협상 막판 진통
공장 전체에 도색을 하라는 작업 지시가 떨어졌다. 공장 전체에 새로 페인트 칠을 하려면 페인트 값만 4천만원이 든다. 서울에서 VIP라도 내려오는 것일까. 평소 회사 사정에 밝은 이 회사 근로자 노 아무개씨에게 순간적으로 회사가 어디론가 팔려 나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예감이 스쳤다. 외국 자본이 창원공장을 인수하리라는 소문이 밑도 끝도 없이 떠돌았기 때문이다.

그 예감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맞아떨어졌다. 임직원들도 모르는 사이 스웨덴의 볼보(VOLVO) 사는 이미 매수 의향서를 체결하기 위한 대체적인 공장 실사를 마친 것이다.

“위로금 70개월분 지급하라”

외국인의 합병·매수(M&A)가 허용되면서 처음으로 계약이 성사된 삼성중공업 중장비 부문의 볼보 매각은 이렇게 해서 뚜껑이 열렸다. 굴삭기·페이로다·콘크리트 펌프카 등을 생산하는 중장비 부문을 인수하기로 한 볼보 사는 최종 계약 금액을 결정하기 위해 지난주부터 마지막 현장 실사를 벌이고 있다. 매각 대금은 7억달러 안팎에서 결정될 전망이다. 1조원이 넘는 돈이다.

지난 2월19일 창원 2공장이 볼보에 넘어간다는 소식이 언론에 보도되자 졸지에 삼성 마크가 찍힌 작업복을 벗게 될 2천여 근로자들은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고용 승계 보장을 내세운 전면 파업에 들어갔다. 이 파업은 9일 동안 계속되었다. 파국을 막기 위해 노사 양측은 일단 △본인이 희망하면 퇴직금 중간 정산을 허용하고 △99년 말까지 해고된 사람은 삼성의 다른 계열사에 재취업하는 것을 보장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근로자측은 위로금으로 70개월분 임금을 요구했고 회사측은 2∼3개월치 지급안을 고수했다.

삼성은 노조가 없다. 따라서 노사 협상이고 냉각 기간이고를 떠나서 이번 파업은 불법 파업이다. 그러나 회사측을 비롯한 어느 누구도 불법 파업에 공권력 투입 등 강경책을 쓰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민배 창원시장을 비롯한 기관장들이 나서 파업 근로자들을 진정시키느라고 진땀을 빼야 했다. 청와대도 비상한 관심을 표명했다. 만약 이번 협상이 깨지면 새 정부가 내세운 외자 유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외국 자본에 의한 합병·매수가 성사되었을 때 위로금 지급 수준에 대해 청와대가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는 말도 나돌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어렵게 성사시킨 합병·매수에 근로자들이 반발해 반대하고 나선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계약이 깨질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삼성중공업의 한 관계자는 “파업 기간에 경영진 모두가 피를 말리는 조바심을 누르며 노심초사했다”라고 말했다.

지난 3월11일 삼성중공업 창원2공장 비상대책위원회 사무실. 고용 승계 조건과 위로금 지급액 등을 둘러싼 막판 협상으로 인해 노사 모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정회 도중 잠시 만난 김 우 비상대책위 위원장은 뭔가 잘 풀리지 않는다는 듯 연신 담배를 피워댔다.

“우리가 볼보로 가는 것을 반대하는 건 아닙니다. 지난해 말 사장이 바뀐 이후 ‘회사를 살리겠다’며 의욕을 보이자 근로자들도 복리·후생비를 반납하는 등 자기 희생 노력을 보여줬는데 ‘이제 와서 이게 뭐냐’는 배신감과 허탈감이 더 큰 거지요.”

삼성중공업 건설기계 부문 안복현 대표이사는 지난해 말 취임하면서 시중에 떠돌던 매각설을 부인하고 중장비를 수출 주력 종목으로 육성하겠다고 공언했다. 2005년까지 25억달러 매출을 올려 세계 10위권의 중장비 업체로 뛰어오르겠다는 야심찬 계획도 덧붙였다.

그러나 현장에서 바라본 삼성중공업의 회생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였다. 총부채 1조7천억원에다 수천억원의 누적 적자. 볼보와의 협상에서 7억달러를 받아낸다 해도 빚 갚는 데도 모자라다는 말이 나올 판이다. 창원 2공장뿐만 아니라 인근 부두에도 삼성 마크가 찍힌 굴삭기 수십여 대가 팔려 나가지 못한 채 도열한 병사들처럼 늘어서 있다.
당연히 회사로서는 이런 마당에 70개월분 위로금을 지급하라는 근로자들의 요구가 말이나 되느냐고 펄쩍 뛰고 있다. 그러나 근로자들은 볼보와 고용 승계에 합의하기는 했지만 △영업 조직 과다 △공장내 간접 지원 인력 과잉 등의 문제로 인해 볼보가 몇년 안에 직원을 대폭 축소할 것이라는 의혹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근로자들이 느끼는 불안감은 언뜻 이해가 갈 만하다. 이번 파업도 따지고 보면 사무직과 중간층 사원들이 불을 붙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혹감과 불안감에서 출발한 것이었던 만큼 구체적인 요구안을 가지고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이런 사정은 임원들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삼성에 20년 넘게 몸 담아 온 임원들은 매각 이후 일반 근로자들보다 더 큰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이들은 한편으로는 매각 조건 협상에 나서야 하고 근로자들의 불만을 무마해야 하지만, 자신의 회사내 생명도 언제 끝날지 모르는 불안감에 휩싸이기는 마찬가지이다. 3중고를 겪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현장 근로자들이 협상 창구를 중공업 임원이 아닌 그룹의 책임 있는 고위 관계자로 교체해 달라고 요구하고 ‘상경 투쟁을 벌일 수도 있다’는 말까지 꺼내자 곤혹스러워하는 분위기이다.

삼성중공업에서만 18년째 근무했다는 한 부장급 사원은 “나도 누구보다 삼성을 믿어 왔다. 섭섭한 마음은 파업 근로자들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렇게 노사가 맞대결하다가는 유일한 탈출구로 생각했던 인수 협상 자체가 깨지고 말 것이다”라고 우려했다. 그래서일까. 노사 협상에 임하는 회사측 고위 관계자들은 취재진과의 접촉을 한사코 꺼렸다.

삼성중공업 창원 2공장의 파업은 끝났지만 아직도 공장에는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근로자들은 여전히 △매각에 따른 보상금으로 70개월분 임금 지급 △근로자측 대표가 참여하는 3자 협상을 요구하고 있다.

삼성중공업이 중장비 부문을 스웨덴의 볼보에, 지게차 부문을 미국의 클라크에 팔아넘긴, 이른바 분할 매각 방식은 한계 사업을 정리하는 유효한 수단으로 인식되어, 구조 조정을 해야 하는 기업들로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방식이다. ‘프론티어 M&A’ 성보경 대표이사는 이를 두고 인공 장기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는 “눈이 멀 지경이면 신장 등 다른 장기를 하나 떼어 주고 다른 눈을 끼워도 아무 지장이 없는데, 우리는 맹목적인 소유 개념에만 집착해 합병·매수가 퇴출의 중요한 수단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라고 지적한다.

이미 부도가 난 한라그룹에서 만도기계·한라중공업 등이 이러한 분할 매각 대상에 올라 있고, 한화에너지도 미국·프랑스 등 4∼5개국을 대상으로 매각 협상을 벌이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줄줄이 닥칠 분할 매각 협상을 앞둔 재벌들에게 볼보의 삼성중공업 인수는 남의 일이 아니다.

근로자도 매각이 살 길임을 알지만…

“볼보로 넘어가면 당연히 임금도 올라갈 것 아니겠습니까. 인수 협상에 실패하고 이대로 적자만 누적된다면 오히려 정리 해고로 갈지도 모르는데….” 파업을 주도했던 한 근로자가 내뱉은 현실론이다. 그러나 대부분 근로자들은 아직 이런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고 있다.

“삼성 근로자들은 노조가 없는 만큼 평생 직장과 평생 고용이라는 온실 속에서만 살아 왔습니다. 외국 자본에 인수당한다는 데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삼성이라는 데 대한 믿음이 지대했기 때문에 여기서 오는 배신감이 더 클 겁니다.” 비대위 김 우 위원장의 말이다.

정리 해고 태풍에 휩싸인 근로자들의 처지에서 보면 ‘배 부른 싸움’으로 비칠 법한 삼성중공업 창원공장 사태는 그래서 삼성의 무노조 경영과 온실 경영이 자초한 업보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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