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정책에 미국 그림자 짙어진다
  • 이창주(코네티컷 대학 교수·국제정치) ()
  • 승인 2001.03.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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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안보팀, 한·미 정상회담 관련 3단계 전략 수립…
'한국 대북정책 통제력 강화' 관철


사진설명 귀국 보고회 : 김대중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 이후 귀국 보고서에서 한·미 동맹관계를 재확인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번 한·미 정상회담은 우리의 대북 정책 추진에 많은 숙제를 안겨주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연합뉴스

3월7일은 워싱턴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과 한국 정부에는 '검은 수요일(Black Wednesday)'이었다. 한·미 공조와 동맹을 튼튼히 했다는 추상적 수식어로 합리화했지만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북한의 대미 협상 창구인 유엔대표부 이 근 차석대사는 "우리는 한국이 미국의 영향과 구상을 '오버'하여 독자적으로 대북 정책을 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우리 공화국은 몰라도 한국은 미국의 동의나 허락 없이 평화협정이나 평화선언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한국은 미국에 대해 우리만큼도 모르는 것 같다. 그 사람들 알아 먹기가 아주 바쁘다"라고 필자에게 털어놓은 바 있다.

부시 행정부의 외교 안보팀은 김대중 대통령의 방미를 전후하여 3 단계 전략을 치밀하게 준비했다. 첫 단계는 북·미 관계에 변화가 없는 상태에서 앞서가는 DJ의 대북 정책과 대중·대러 외교에 대한 제동이다.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은 힘에 의한 대북 정책을 결정하고 검토하면서 새로운 판짜기를 준비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클린턴 행정부와의 밀월을 기조로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 및 2차 남북 정상회담에서 평화협정 또는 평화선언을 추진하겠다고 하자 부시 외교 안보팀은 이를 방치해서는 안되는 심각한 사태라고 인식했다. 미국 의회조사국의 한 선임연구원은 "남북간 평화체제는 한·미 관계 및 미국의 북한 전략 및 동북아 전략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중대 핵심 사항이다. 한국의 지도자가 정치적 욕심 때문에 성급하게 접근해 양국 간에 갈등과 마찰을 초래했다"라고 지적했다.

여기에 북·중·러 중심으로 추진되는 항미연대(抗美連帶)의 대표 격인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서울을 방문했을 때 한국이 탄도탄요격미사일(ABM) 억제협정 준수를 합의해 주고 또한 그 이전부터 중국 중시 정책을 진행한 것도 미국을 자극했다.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의 우려와 항의 및 유감 표시가 전달되자 김대통령은 외교통상부장관과 국정원장을 미국에 급파해 불협화음을 차단하려고 노력했지만 차가운 대접 속에 미국측의 확고한 입장만 전달받고 돌아왔다. 국빈 방문을 희망했던 한국의 요구가 실무 방문으로 결정된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백악관의 한 고위 관리는 "미국은 DJ로부터 직접 확고한 다짐을 받겠다는 입장이었다"라고 전했다.

두 번째 단계는, 김대통령 초청과 동시에 '더블 플레이'를 진행한다는 것이다. 첫 단계 과정을 거치면서 무겁고 착잡한 마음으로 워싱턴으로 향한 한국의 노(老) 대통령에게 미국은 의례적인 모양새를 갖추어 배려하는 형태를 취했다. 그러나 같은 날 <월 스트리트 저널>은 사설에서 유화적인 대북 정책의 코스를 바꾸라고 요구하면서, 한국의 통일 열기도 중요하지만 미군 3만7천명을 주둔시키고 한반도의 안보에 관여하고 있는 미국의 이해 관계를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더 나아가 한·러 정상회담에서의 ABM협정 준수 합의 공동성명을 지적하면서, 경수로 합의 재검토 및 한국의 대북 전력 지원 계획 재검토까지 들먹였다.


부시 행정부, 김정일 답방도 못마땅


사진설명 반갑게 악수했지만 : 3월7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은 대북 인식에서 커다란 시각차를 보였다. ⓒ연합뉴스

<뉴욕 타임스>도 한국에 미군 3만7천명을 주둔시키고 있는 미국은 한반도의 긴장 완화에 강력한 이해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북한 미사일 생산 및 수출을 검증 차단하기 위해 대응해야 하며, 따라서 한·미 정상회담이 의례적 수준 이상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말은 한·미 정상회담이 단순히 한국의 손을 들어 주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의미라고, 부르킹스 연구소에서 동아시아 문제를 다루고 있는 한 연구원은 풀이했다.

세 번째 단계가 한국의 대북 정책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통제력 강화이다. 미국은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두 가지 확실한 장치와 다짐을 한국으로부터 받아냈다. 하나는 북·미 관계가 개선되지 않은 채 남북 관계만 진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표명이다. 이것은 김대통령이 워싱턴 매디슨 호텔에서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 25명과 가진 만찬 간담회에서 정상회담 내용 및 결과를 발표하면서 밝힌 내용이기도 하다. 이 말은 앞으로 남북 관계 진전은 북·미 관계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라는 의미이다. 한국의 대북 정책 속도를 미국의 요구에 따라 조절하겠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김대통령이 부시 대통령에게 대북 정책 추진 과정에서 단계마다 협의하겠다고 약속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회담에 참여한 백악관의 고위 관리가 기자들과 일문일답하면서 밝힌 내용이다. 남북 간의 정치 군사 협상은 말할 것도 없고 정부 차원의 대북 지원까지 이에 포함된다는 것이 이 관리의 설명이다. 당장 북한에 약속한 전력 지원부터 문제가 된다. 미국은 전력 지원을 전략 물자 지원으로 간주해 반대해 왔다. 정부 개입이 필요한 금강산 관광사업이나 김정일 위원장 답방 역시 미국은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한반도 평화선언 좌절될 위기


이 두 가지 약속을 통해 미국은 한국의 대북 정책을 분명하게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부시 행정부는 한국의 희망과는 정반대의 대북 정책 기본 틀을 통보했다. 북한에 대한 의구심, 철저한 검증, 미사일 회담 지연, 대북 정책 재검토 필요성 등을 제시했다. 특히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에 대해 긍정적으로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시 대통령은 그에 대한 회의감(scepticism)을 공동 기자회견에서 공개적으로 피력해 김대통령과 현격한 인식 차이를 나타냈다. 이를 뒷받침하듯 파월 국무장관은 하원 국제관계 청문회에서 미국은 '힘의 우위'로 북한의 대량 살상 무기와 휴전선 배치 군사력에 대응할 방침이라고 천명했다.

결론적으로 어렵게 개막된 화해와 협력의 신 남북 시대는 강대국 미국의 이해 관계와 충돌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한국 정부와 집권당이 정상회담 성과로 제시한 '한·미 동맹 관계 재확인' '한국 대북 포용 정책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이해와 지지'는 이번 정상회담 결과를 볼 때 성과라고 말할 수 없다. 이 수식어는 한·미 관계에서 역대 정권마다 입에 달고 살았던 유행가 같은 단골 메뉴이다. 부시 행정부가 던진 '한국의 주도적 역할'이라는 선물 아닌 선물에도 다분히 속 보이는 미국의 양면성이 내재해 있다. 사사건건 협의하고 오버하지 말라면서 어떻게 무엇을 주도하라는 말인가. 설상가상으로 북한의 투명성과 변화를 확인할 가시적 조처를 얻어내고 합의 사항 이행 여부를 검증하는 작업까지 '주도적 역할'을 명분으로 한국 정부에 떠맡긴 꼴이 되었다.

김대중 정부가 제일 공을 들이고 있는 김정일 위원장 답방 문제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DJ는 김위원장의 답방과 남북 2차 정상회담을 계기로 준비하고 있는 한반도 평화선언에 정치적 운명을 걸다시피 하고 있다. 이렇게만 된다면 남은 임기 동안 불안정한 국내 정치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고 통일의 기반을 다진 역사적 대통령으로, 그리고 민족 지도자로 기록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이 꿈은 미국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될 위기에 직면했다.

이름을 밝히지 말라고 요구한 백악관의 한 고위 당국자는 한·미 정상회담에서 평화선언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만큼 미국의 입장이 강경했다는 뜻이다.

패전국 독일은 통합과 통일을 위해 승전국들의 동의와 합의가 필요했다. 그러나 한반도 분단의 벽을 허무는 일에는 적어도 이해 당사국들의 동의나 합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부시 행정부는 우리의 평화와 통일 문제를 우리 스스로 결정할까 봐 눈을 부라리고 있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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