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뒤 안맞는 소동 어처구니가 없다"/송두율 교수 기고
  • 송두율 (독일 뮌스터 대학 교수) ()
  • 승인 2001.04.2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부 언론의 '이념적 난시' 씁쓸




흡사 한 차례 광풍이 지나간 것 같은 느낌이다. 〈한겨레〉가 필자의 칼럼을 연재하는 것을 계기로 보여준 이성 잃은 정치와 비틀거리는 언론의 모습을 먼 이국 땅에서 바라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필자의 칼럼을 싣고 있는 〈시사저널〉의 독자에게도 무엇인가를 말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한나라당 박원홍 의원의 대정부 질문으로부터 시작된 이번 소동-필자가 처음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이 왜 일어났는가 하는 질문에 답하기는 정말 간단하다.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가 1998년 여름 필자를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라고 기술한 〈북한의 허위와 진실〉이라는 책을 출간한 이후, 곧 필자는 황씨를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서울지방법원 민사부에 제소했다. 그로부터 2년 반이 지났지만 아무런 결론이 나오지 않은 상태이다. 벌써 두 달 전부터 피고 황씨는 시야에서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한 국정원과 지루한 공방을 계속하고 있을 뿐이다.


황장엽씨 제소해 판결 기다리는 중


이러한 공방에 갑자기 현정부의 햇볕정책을 공격해온 한나라당이 가세했고, 언론 개혁이라는 사회적 압력 속에서 심사가 꼬인 보수 언론들도 신난다는 듯이 합세했다.


손배 소송이 법정에 계류 중인 지난 2년 반 동안 필자는 〈한겨레〉뿐만 아니라 그 밖의 일간지 - 〈동아일보〉는 물론 지난해 가을 주간지에서 일간지로 탈바꿈한 〈내일신문〉 - 와 여러 전문 학술지나 잡지에 이래저래 많은 글을 기고했다. 또 같은 기간에 단행본 두 권(〈21세기와의 대화〉 〈민족은 사라지지 않는다〉)도 출간되었다.


더군다나 필자가 중재해 1999년 10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제5차 남·북·해외 학자 통일회의에는 〈동아일보〉가 협찬까지 했었다. 이러한 여러 상황을 고려할 때 이번 소동은 정말로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산적한 민생 문제 해결과 함께 남북 간의 화해를 어렵게 만드는 국내외적 장애 요소를 극복하는 데에 온갖 지혜를 모아도 힘든 판국에 이미 2년 반 이상이나 법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문제를 국회에까지 끌어들여 무슨 대단한 발견을 한 듯 소란을 피우는 데는 아연 실소할 수밖에 없다.


스스로 개혁할 의지도 능력도 없기 때문에 국회 입법 과정을 통해 단행될 수밖에 없는 언론 개혁 문제를 언론 탄압이라고 강변하는 보수 언론의 주장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번 소동과 관련한 〈조선일보〉의 사설은 심지어 국정원의 판단이 법의 심판과는 별개 문제이기 때문에 국정원이 필자의 칼럼 게재를 금지시켜야만 했었다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언론 개혁 입법을 반대하는 이유로 언론 자유 침해를 들고 있는 〈조선일보〉의 '이념적 난시'를 단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대목이다.


정치 없는 정쟁, 여론 없는 언론만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인간의 희망을 키울 수 있겠는가. 필자는 사실 이번에 〈시사저널〉로부터 오래 전에 부탁을 받고 지령 600호를 기념하는 내용에 맞추어 '교육 이민'에 한 칼럼을 쓸 예정이었다. 희망을 죽이는 정치, 이와 공생하는 언론 아닌 언론이 활개치는 한 '교육 이민'의 행렬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34년 동안 유럽에서 살면서 그래도 두고온 조국에서 희망의 불씨를 찾아보려는 필자에게 '교육 이민' 나온 사람이 뉴욕에서 던진 말이 문득 생각난다.


"정말로 진저리가 나 미련 없이 떠난 땅을 향해 선생님도 이제 짝사랑과 같은 애정을 거두십시오. 그렇다고 해서 어느 누구도 선생님을 나무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필자는 아직도 그렇게 모질지 못하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