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무능·무대책 '행정'/예지학원 화재
  • 권은중 기자 (jungk@e-sisa.co.kr)
  • 승인 2001.05.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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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방·초기 진압·사후 조처 모두 '엉망'


지난 5월16일 경기도 광주시 송정동 예지학원 화재로 숨진 학생들의 분향소가 마련된 경기도 광주시청에 50대 두 남자가 찾아왔다. 고교생 55명이 숨진 1999년 10월 인천 인현동 화재사건 유족회 이재원 회장(50)과 이금우 국장(54)이었다. 이들은 이 날 오전 인천지방법원에서 열린 인천화재유가족대책위원회 한장석 위원장(42)의 재판을 지켜보고 곧바로 광주 분향소로 달려왔다. 한위원장은 장례식 후 인천 화재 참사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인천시청 등에 찾아가 항의하다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기소되어 이 날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예지학원 희생자 유족들을 만난 두 사람은 위로의 뜻을 전했지만 격앙된 분위기 탓에 유족들과 차분하게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5월18일 오후 3시로 예정된 유족들과 광주시대책위원회와의 첫 만남을 앞두고 사망한 학생들이 적절한 응급 조처만 받았다면 살 수 있었다는 생존 학생들의 증언이 나오면서 분향소가 술렁거렸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자기들의 경험이 떠오른 듯 내내 굳은 표정이었다. 이재원씨는 "장례식 전 사태를 수습하려고 뭐든지 다 들어줄 것같이 고분고분하던 공무원들의 태도가 시간이 지나면 점점 달라진다. 유족들은 감정을 내세우기보다는 진상 규명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라고 조언했다.


유족들, 공무원의 '막말'에 분노


이 날 3시에 열린 유족과 시 관계자의 첫 만남은 격렬한 몸싸움으로 끝났다. 박종진 광주시장(67)이 대책위원장 자리를 고사하자 유족들이 시장이 책임을 회피한다며 강력하게 항의했다. 이를 말리던 공무원이 유족들에게 "뭘 잘했다고…"라고 말했고, 이에 유족들이 격분하며 몸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외아들 인혁진군(20)을 잃은 인치운씨(50)는 "박시장이 17일 장례식장에서부터 이번 화재의 책임이 광주시가 아니라 하남소방서에 있다고 말한 데다, 시청 마당에 비바람도 막기 힘든 천막을 쳐 분향소를 마련해 주겠다고 했다. 위로는 못할망정 이럴 수 있느냐"라고 분개했다.


5월20일 혼수 상태이던 학생 2명이 사망해, 모두 10명이 죽고 23명이 다친 예지학원 참사는 다른 대형 참사와 마찬가지로 철저한 인재(人災)였다. 1991년 건물을 신축한 건축주는 다음해 블록으로 4층 옥상에 창고를 지어 교육청으로부터 시설변경 승인도 받지 않은 채 교실로 사용해 왔다. 또 최초 발화 지점으로 추정되는 휴게실은 건축물 대장에 올라 있지 않은 무단 가건물이었다. 교실에서 가건물로 통하는 문이 교실의 유일한 출입문이자 비상구였고, 창문은 모두 쇠창살로 막혀 있었다. 이 가건물에서 난 불이 폐쇄된 교실로 번져 학생들이 탈출하지 못해 사상자가 많았던 것이다.


소방·교육 당국의 사전 점검은 허술했다. 하남소방서는 지난해 9월 예지학원 소방 점검에서 적합 판정을 내렸다. 광주교육청 관계자는 "학원이 신고하지 않아서 불법 개조를 몰랐다. 담당 직원 2명으로 시내 3백34군데 학원을 일일이 관리할 수는 없다"라고 변명했다. 광주시청 관계자도 "1999년 3월 건축법규제가 완화되어 창고를 교실로 용도 변경 하더라도 신고할 의무가 없어 불법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유족들은 관리·감독해야 할 행정기관이 이렇게 서로 책임을 떠넘겼기 때문에 참사가 벌어졌다며 오열했다.


경찰은 5월18일 학원장 김 아무개씨(60)와 건물주 최 아무개씨(53)에 대해 업무상과실치사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시청·교육청·소방 공무원들을 상대로 직무유기 등 위법 여부를 수사하고 있다.


앞으로 유족과 당국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할 불씨는 화인(火因)이다. 이미 수사 당국은 담배 꽁초로 인한 실화라고 흘리고 있다. 흡연실 근처 소파에서 불길이 올라왔다는 것이다. 유족들은 조사 당국의 이런 언론 이용하기에 분개하고 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5월20일 현재까지 공식적인 조사 결과를 밝히지 않고 있다(아래 상자 기사 참조).


생존한 학생들은 담배로 인한 실화라는 주장에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사고 때 맨 앞줄에 앉아 있다가 2도 화상을 입고 겨우 목숨을 건진 강미영양(20)은 "자율 학습이 시작된 지 30여 분이 지난 10시30분쯤에 불이 났다. 그 사이 아무도 나가서 담배를 피운 사람이 없다. 30분이 지난 뒤 담배 때문에 불이 난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라고 지적했다.


"전기 누전이었을 가능성 있다"


화재가 처음 난 휴게실과 흡연실은 블록으로 만든 교실과 달리 스티로폼에 철판을 덧댄 샌드위치 패널로 만들었다. 1999년 6월 23명이 사망한 씨랜드 화재도 샌드위치 패널로 만든 가건물에서 일어났다. 일반적으로 스티로폼을 단열재로 사용하는 샌드위치 패널은 화재 발생 때 유독가스를 내뿜는 데다 스티로폼이 열에 녹아 액화 상태로 변해 물방울처럼 튀어 치명적인 화상을 입게 한다.


학생들에 따르면, 샌드위치 패널로 막아 만든 휴게실에 있는 형광등의 전선이 패널 안에 설치되어 있었다. 또 학생들이 불이 순식간에 번졌고 벽과 천정을 타고 불이 번졌다고 증언해 전기 누전을 의심할 수 있는 상황이다.


이런 논쟁 자체에 기가 막힌 듯 유족들은 "미국 학생이 함께 죽었다면 당국이 이렇게 엉성하게 대처할까"라며 답답해 했다. 유족들은 사건 발생 후 5일이 지난 5월20일에야 광주시가 장례비를 전액 부담할 것과 추모비를 건립할 것에 광주시대책위원회와 합의했다. 유족들은 화재 원인과 화재 발생시 최초 진압이 엉성했던 이유를 당국이 무어라고 발표할지 숨죽여 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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