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날 때도 말 많은 '실세' 경찰청장
  • 권은중 기자 (jungk@e-sisa.co.kr)
  • 승인 2001.11.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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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영 청장 전격 교체…
"인사 개혁 신호탄" "대선 앞둔 포석" 설 분분
1년도 채우기 어렵다는 경찰청장 자리에 2년이나 앉아 있던 이무영 경찰청장이 지난 11월8일 갑작스럽게 교체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청장 후임으로 충남 보령 출신 이팔호 서울경찰청장을, 서울경찰청장에는 전남 완도 출신 이대길 경찰대학장을 임명했다.




1999년 11월 취임한 이무영 청장의 퇴진은 예정된 순서이다. 그런데도 전격 교체라는 말이 나온 것은 실세 청장이라고 불리던 그 자신은 물론 경찰 내부에서 청장이 바뀌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까닭이다. 11월8일 오전 청장과의 간담회에서 "아직 결정된 것 없다"라는 답변을 들었던 기자들은 이날 오후 느닷없는 교체의 배경을 캐느라 동분서주했다.


경찰 관계자들은 선거 참패 후 여권이 임기가 끝나는 경찰청장 인사를 전격 단행해 국정 쇄신 분위기를 띄우려고 한 것으로 본다. 또 11월로 예상되는 농민 집회나 노동계 겨울 투쟁에 적극 대처할 수 있도록 경찰 조직에 활력을 주려는 목적도 있다.


하지만 여권의 실세와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이무영씨가 자신의 거취를 몰랐던 점이나 청장 후보로 유력했던 이대길 치안정감이 청장에 오르지 못한 이유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이 많다. 전북도지사 출마를 준비하는 이 전 청장은 취임 2주년 기념식을 치른 후 도지사에 도전할 계획이었다. 이대길 치안정감은 지난 10월 청와대로부터 이미 차기 청장으로 낙점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뒤집힌 것이다.


11월9일 김대중 대통령은 이팔호 청장에게 임명장을 주면서 "경찰은 공정한 인사로 신뢰받아야 한다. 청장 인사에서 내가 모범을 보였으니 이청장도 공정한 인사의 모범을 보여 달라"고 주문했다. 취임사에서 누구나 공감하는 인사를 하겠다고 말한 이청장은 국장급 간부들과 가진 첫 회의에서 "한 명이 웃는 인사가 아니라 열 명이 기뻐하는 인사를 하겠다"라고 밝혔다. 현재 경찰은 경무관과 치안감 인사 작업에 돌입했다.


이무영 전 청장은 경찰 개혁을 꾸준히 진두지휘해 왔고 최루탄 없는 시대를 여는 성과를 이끌어냈지만 정치 중립 면에서는 낮은 점수를 받았다. 호남 편중 인사 탓이다. 한나라당은 지난 10월 경찰 요직 18개의 전·현직 69명 가운데 31명(45%)이 호남 출신이고, 경찰청 정보국장·특수수사국장·청와대를 경비하는 101단장 등 요직은 100% 호남 출신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 전 청장은 경찰 개혁을 위한 분위기 쇄신의 한 방편으로 발탁 인사를 단행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서울 종암서장을 역임하며 윤락과의 전쟁을 펼쳐 단번에 유명해진 서울경찰청 김강자 방범과장이다. 이청장은 이런 식으로 공보·인사·감찰 등 핵심 요직에 연공 서열을 파괴하는 파격 인사를 단행하면서 자기 사람을 심었다. 특히 그는 경찰대·간부후보생 출신과 호남 출신은 중용하고, 고시 출신과 영남 출신을 홀대한다는 말을 들었다.


민주당 "비호남 출신 임명 잘한 일"




게다가 이 전 청장은 지난해 11월 경찰청장 바로 밑인 서울청장·경찰청 차장·경찰대학장 등 치안정감 3명의 옷을 벗기고 자신은 유임되는 전대 미문의 인사 조처를 주도했다는 의혹을 샀다. 치안정감 세 사람이 이무영 청장에게 도전했지만 힘에서 밀려 모두 옷을 벗었다는 것이다. 특히 광주일고 출신인 한 치안정감은 '배경'이 결코 이 전 청장에게 밀리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실세 청장'이라는 별명에 걸맞는 힘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는 또 지난 5월 부평 대우차 파업 노동자를 폭력 진압해 온 나라가 떠들썩했을 때도 아무 일 없이 넘어갔다. 여권 실세의 전폭적인 지지가 없었다면 그가 여론의 질타와 내부 견제를 피해갈 수 있었을까. 경찰은 물론 정치권에서도 그는 정권 실세들과 매우 가깝다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그가 전격 교체된 것은 경찰 내부에서 '낙마'로까지 비치고 있다.


이무영 청장의 전격 퇴진은 민주당 소장파가 주도하는 쇄신 분위기와 맞물려 있다. 민주당 관계자들은 민주당 소장파가 주장한 대로 박지원 수석이 퇴진하고 동교동계가 주춤거릴 때 청와대 보좌진이 이무영 청장 교체를 단행하고 비호남 청장을 추천한 것으로 본다. 민주당의 한 간부는 "호남 사람마저도 지역 편중 인사에 환멸을 느끼는 마당에 비호남 출신 경찰청장이 임명되어 정말 잘되었다"라고 평가했다. 정치권 주변에서는 이번 경찰 인사를 보며 올 연말 개각의 방향을 점치는 성급한 사람도 있다.


민주당의 한 선거 전략가는 "사정기관의 인사 개혁은 홍보 효과가 크다. 호남 편중 인사로 비판받아온 검찰이나 국정원에서도 인사 쇄신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라고 말했다. 즉 비호남 청장을 임명한 이번 경찰 인사가 사정기관 인사 개혁의 신호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섣부른 기대라는 지적도 나온다. 경찰 내부에서는 대선을 앞둔 내년 하반기에 호남 출신인 이대길 서울청장을 경찰청장으로 발탁하기 위해 지역 시비가 적은 이팔호 청장을 먼저 세웠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또 여권이 과연 대선 정국에서 옥쇄를 각오한 개혁적 인사를 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론도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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