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라 상자 열렸다” 재계 벌벌
  • 이문환 기자 (lazyfair@e-sisa.co.kr)
  • 승인 2002.01.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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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소액주주, 손배 소송 승소…전경련 등 ‘집단소송제 저지’ 안간힘
참여연대가 삼성에 일격을 가했다. 지난 12월27일 수원지법 민사7부는 참여연대 박원순 사무처장을 비롯한 삼성전자 소액주주 22명이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삼성전자 전·현직 임원 10명에게 제기한 주주대표 손해배상 청구 소송 공판에서, 이건희 회장 등에게 삼성전자에 9백77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주주대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란 이사가 위법 행위를 저질러 회사에 손해를 끼쳤을 경우 지분 0.01% 이상을 확보한 주주들이 회사를 대신해 손해 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이다).





참여연대 주도로 제기된 이번 소송에서 재판부가 삼성전자 이사들의 책임을 인정한 부분은 두 가지다. 우선 1997년 이천전기 인수 결정이다. 이천전기는 인수 당시 2년간 누적 적자가 3백78억원에 달했던 부실 기업이었지만 삼성전자 이사회가 이 회사를 인수하기로 결정하는 데에는 단 한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듬해 삼성그룹이 구조 조정을 하는 과정에서 이천전기가 퇴출되는 바람에 삼성전자는 1천9백4억원의 손실을 입었다. 또한 1994년 삼성전자는 주당 1만원에 사들인 삼성종합화학 주식 2천만 주를 그룹 계열사에 주당 2천6백원이라는 헐값에 넘겨 1천4백80억원 손해를 보았다.


삼성·참여연대 대결, 대법원까지 갈듯


재판부는 이사회에서 삼성전자가 부실 기업을 인수하고 주식을 저가에 매각하는 데 찬성 표를 던졌던 이사들에게 모두 9백77억원을 배상하라고 선고했다. 위 두 가지 결정을 내릴 때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이사회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배상 책임을 면했다. 그러나 이회장도 1990년~1992년 삼성전자에서 비자금을 조성해 당시 대통령인 노태우씨에게 뇌물로 건넨 75억원에 대해서는 책임을 면하지 못했다.


삼성측과 참여연대의 이번 대결은 대법원까지 가는 장기전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측은 항소를 통해 돌파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진보적’ 성향을 가진 재판부가 기업 현실을 너무 무시한 판결을 내렸다는 것이다. 참여연대도 재판부가 이건희 회장과 그의 오른팔 격인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의 책임을 명확히 가리지 않았다며 항소 공판에서는 이회장에게 공격의 초점을 맞추려 하고 있다.

그러나 사법부의 최종 판단이 어떻게 나오든 이번 판결을 계기로 대기업 이사회 풍토는 여러 모로 바뀔 전망이다. 이전까지 대다수 대기업 이사들은 그룹 총수의 뜻에 따라 거수기 역할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법원이 이사 개인에게 경영 판단에 대한 책임을 묻는 시대가 된 만큼 ‘윗선’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실무급 이사들의 고민은 더욱 커질 것이다. 4대 그룹의 한 임원은 “업무를 실제로 집행하는 입장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이번 판결에 대해서 12월28일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등 재계 5단체는 공동 성명서를 내는 등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 이들 단체는 성명서를 통해 법원이 ‘실패한 경영 판단’에 대해서 심판하는 것은 기업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계가 반발하는 진짜 이유는 오는 4월에 도입될 집단소송제를 막기 위해서라는 지적도 나온다. 주주대표 소송은 소송을 건 소액주주가 승소한다고 해도 직접 혜택 받는 것은 없지만 집단소송제는 이와 다르다. 집단소송은 회사측의 주가 조작·분식 회계 등으로 피해를 입은 주주가 회사를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하는 제도. 만약 회사가 패소한다면 회사가 주주에게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 재판이 열릴 경우 ‘피고’가 될 재계가 집단소송제를 결사 반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미 이번 소송 건을 계기로 전경련은 집단소송제 도입 반대 운동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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