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세론 붕괴’가 대세인가
  • 이숙이 (sookyi@sisapress.com)
  • 승인 2002.03.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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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제, 제주·울산에서 날개 꺾여…노무현의 ‘대안론 태풍’에 추락할 수도
"거참 재미있네….” 3월10일 울산에서 치러진 민주당 경선을 텔레비전으로 지켜 보던 한 시청자의 반응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민주당 경선이 흥행몰이에 성공할 조짐이다. 3월9일과 10일 민주당 홈페이지는 제주와 울산 지역의 경선 생방송을 보려는 네티즌들이 폭주해 다운되고 말았다. 월요일 아침 출근한 회사원들의 화제 역시 민주당 경선이었다. 광고대행사에 근무하는 조호성씨(37)는 “벌써 이번 주말 광주와 대전 경선이 기대된다”라고 말했다.




흥행몰이의 수훈 갑은 단연 ‘이변’이었다. 당초 이인제·노무현 후보가 각축하리라던 제주에서 예상을 뒤집고 한화갑 후보가 1위를 차지했는가 하면, 울산에서는 중위권에 머무를 것으로 점쳐지던 김중권 후보가 27.8% 지지를 얻어 2위로 도약했다.


두 차례 이변을 거치면서 정가에는 자연스레 ‘날개 꺾인 이인제 대세론’이 형성되었다. 당초 전국에서 고른 지지를 얻으리라던 이후보는 제주에서 2위로 불안하게 출발하더니, 울산에서는 아예 3위로 내려앉았다. 이후보는 울산 선거 직후 “초반 고전이 승리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빠른 시간 안에 대반전을 이루겠다”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참모들은 당혹스런 표정이다. 제주와 울산이 비록 경남과 함께 이후보 진영이 꼽아온 ‘3대 취약지’이기는 하지만, 둘 중 어느 한 곳에서도 금메달을 따지 못해 더 이상 대세론을 내세우기가 어려워진 탓이다. 대세론은 이후보의 핵심 선거 전략 가운데 하나였다.


이인제 대세론에 급제동이 걸린 요인은 크게 세 가지로 분석된다. 우선 이후보에 대한 여타 후보들의 융단 폭격이다. 공식 선거전이 시작된 이래 민주당 경선 주자들은 대부분 ‘이인제 때리기’에 전념했다. 주로 이후보의 정체성이 공격 대상이 되었다.

제주 경선 전날 벌어진 MBC <100분 토론>은 이인제 때리기의 결정판이었다. 심지어 한화갑 후보와 1 대 1 토론에 나선 노무현 후보는 “아까 (이후보의) 정체성을 지적하다 시간이 모자라 중단했는데, 이 기회에 마저 하시죠”라며 멍석을 깔아주기까지 했다. 오죽했으면 토론을 지켜 보던 민주당 이낙연 대변인이 “이후보가 폭발할 것 같다”라며 걱정했을까. 하지만 이후보는 ‘무대응’으로 일관했고, 그 사이 이후보의 정체성은 알게 모르게 상처를 입었다. 울산 경선에 참여한 한 국민 선거인단 인사는 “민주당 주자들 사이에 한나라당 주자가 끼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이인제 대세론의 발목을 잡은 두 번째 요인은 김근태 후보의 양심 선언이다. 김후보는 지난 3월3일 “8·30 최고위원 경선에서 6억 가까운 돈을 썼다. 그 가운데는 권노갑 전 고문으로부터 받은 2천만원도 들어 있다”라고 고백했다. 이 고백 이후 김후보 지지도는 하락세를 탔다. 선거인단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당원들 사이에서 ‘취지는 이해하지만 경솔했다’는 평가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김근태 후보의 양심 선언은 자기 표말고 이인제 후보의 발목을 잡는 쪽으로도 작용했다. 당 안팎에 권노갑 전 고문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형성되면서 권씨의 지원을 받는 것으로 알려진 이후보에 대해서도 경계 심리가 생긴 것이다. 이후보의 한 핵심 측근은 김후보의 고백 이후 ‘이인제 후보는 훨씬 더 받았을 것이다’ ‘권고문과 가까운 이후보가 본선 경쟁력이 있겠느냐’는 식의 부정적인 여론이 급증했다고 말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김근태 후보가 이인제 대세론을 막는 희생양 노릇을 한 셈이다.


급부상한 ‘노무현 대안론’도 이인제 대세론을 막는 데 거들었다. 아무리 대세론이 흔들려도 대안이 없다면 파장은 그리 크지 않은 법. 그러나 노후보는 제주·울산 투표 합산 결과 1위를 차지하며 기선을 제압했다. 물론 노후보에게 1위를 안겨준 울산이 영남인 데다 노후보의 최대 전략지였다는 점에서 노무현 대안론이 전국적으로 먹혀들지는 좀더 지켜볼 일이다. 하지만 노무현 대안론이 떠오른 것은 개혁 세력 내부에 다시 한번 연대 바람을 불러일으키면서 갈수록 이인제 대세론을 위협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연대 대상으로 거론된 김근태·정동영·한화갑 세 후보가 모두 사퇴하고 노무현 후보를 미는 방식의 연대는 이제 물 건너갔다는 분석이다. 이유는 두 가지. 첫째, 노후보와 다른 세 후보 간에 인간적 신뢰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한 소장파 의원은 경선 기탁금 인하에 대한 공동 대응 실패를 한 예로 들었다. “김근태·정동영·한화갑 후보는 기탁금을 낮추는 데 같이 행동하기로 합의하고 김후보를 통해 노후보쪽 의사를 타진했다. 그러나 노후보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무산되었다”라는 것이다. 그는 김·정·한 세 후보는 노후보가 쇄신 파동 당시 미지근한 태도를 보인 이후 노후보에 대한 신뢰감을 잃었고, 이것이 서로 마음을 열고 대화하는 기회를 봉쇄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현재 세 후보끼리는 자주 전화 연락을 하지만, 노후보와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둘째, 제주·울산 경선 결과 굳이 단일화를 이루지 않아도 자연스레 연대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개혁 세력 연대를 주장해온 한 의원은 “김근태 후보는 워낙 지지세가 약해 연대를 해도 큰 의미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반면 한화갑 후보와 노무현 후보는 제주와 울산에서 번갈아 1등을 함으로써 자연스레 이인제 대세론을 막는 쪽으로 연대하고 있다”라고 분석했다. 당초 한후보가 당권으로 선회하기를 바랐던 노후보측도 “우리와 한화갑 후보 쪽은 지원 조직이 중복되지 않아 상호 보완적이다”라면서 오히려 한후보가 끝까지 가는 것이 낫다는 반응이다.


‘노후보로 자연스런 단일화’ 가능성


개혁 세력이 기대하는 ‘자연스런 연대’에는 선호 투표도 포함된다. 지금 같은 추세라면 과반수 득표자가 나오기 어렵고, 그럴 경우 최후의 승자는 최하위 득표자의 2위 투표를 배분하는 선호투표제에 의해 가려질 가능성이 크다. 예컨대 김근태·정동영·한화갑 지지자들이 모두 2순위로 노무현을 찍을 경우 자연스레 노후보로 단일화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얘기다. 울산 경선에서 이인제 후보의 한 선거운동원이 지지자들에게 “1번은 이인제, 2번은 유종근을 찍으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민주당 경선은 인구가 적은 지역부터 순차적으로 진행된다. 경선이 치러질 때마다 그 지역 투표 결과가 전체 순위를 뒤바꿀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서울 선거가 치러지는 4월27일까지 당분간 주말 뉴스 상위권은 민주당 경선이 차지하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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