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장님이 또 사고 쳤어?”
  • 신호철 (eco@sisipress.com)
  • 승인 2002.04.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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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준 서울대 총장, 법과 학교 지침 무시해 말썽…LG와 ‘깊은 인연’ 구설


"또총장이 문제인가.” 3월18일 서울대 한 교수는 수업 도중 이렇게 푸념했다. “총장이 석 달에 한 번은 사고를 치는 것 같다.” 3월21일 아침 서울대 총학생회는 대학본부 앞에서 이기준 총장 사퇴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총학생회는 이총장의 독단적인 학사 운영과 함께 특히 대기업 사외이사 겸직 문제를 비판하고 나섰다.


학생들이 문제 삼은 것은 이기준 총장이 법을 어기고 1998년부터 LGCI(옛 LG화학) 사외이사로 일했다는 최근의 언론 보도 내용이다. 그러나 이총장은 나아가 사외이사 자리를 하나 더 맡으려 했다는 의혹까지 받고 있다.
사실 이총장이 LGCI 사외이사를 겸직한다는 이야기는 새로운 뉴스가 아니었다. 1998년 LG화학 사외이사가 되었을 때, 일간지에 이미 보도되었다. 그렇다면 왜 4년이 지난 지금 갑작스레 총장의 사외이사 재임이 문제가 된 것일까. 그 발단을 제공한 것은 LGCI가 아니라 LG전자였다.


지난 2월27일 LG전자는 이기준 총장을 사외이사로 추천한다고 공시했다. LG전자는 이 사실을 금융감독원 등 유관 기관에 보고하고, 주주들에게 우편으로 알렸다. LG전자 주주 가운데에는 서울대 교수도 있었다. “나도 사외이사 제의를 받았지만 복잡한 규정 때문에 포기했다. 그런데 정작 총장이 사외이사를 하려고 해서 놀랐다.” “서울대 총장은 학교에서 가장 바빠야 할 사람이다. 사기업 경영에 신경 쓸 틈이 어디 있는가.” 이때부터 서울대 출입 기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14일 주주총회 날짜에 맞추어 이 사실을 보도할 예정이었다.


3월12일 LG전자는 돌연 이총장 사외이사 추천을 철회한다고 공시했다. 기자들은 맥이 빠졌지만 LGCI 사외이사 직은 아직 남아 있었다. 3월18일 언론은 이 사실을 크게 보도했다. 18일 오후 이총장은 LGCI 사외이사를 그만두겠다고 발표했다. 여기까지가 지난 보름 동안 벌어졌던 일들이다.


이기준 총장은 “LG전자가 나를 추천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지 못했다. 뒤늦게 보고를 받고 고사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금융감독원을 비롯한 공시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당사자가 사전에 몰랐다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비유하자면, 총리 임명동의안을 본인 몰래 국회에 제출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설명이다. 이에 대해 사외이사 추천을 담당한 LG전자 주영철 차장은 “회사가 답변할 문제가 아니다. 절차에 법적인 문제는 없었다”라고 답했다.


LG그룹은 서울대 총장단과 관련이 깊다. 1998년은 구본무 회장이 LG화학과 LG전자의 대표이사 회장으로 취임한 해이고, 이기준 총장과 송병락 교수(당시 서울대 부총장)가 각각 LG화학과 LG전자 사외이사로 일하게 된 해다. LG전자의 최대 주주가 LGCI다.


이총장 개인도 LG전자와는 남다른 인연이 있다. 장남이 2000년부터 LG전자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1998년 이기준 교수가 총장으로 취임할 때 두 아들이 모두 병역 면제자라는 사실이 도마에 올랐다. 장남은 미국에서 태어난 이중 국적자였고, 차남은 과다 체중으로 면제를 받았다. 여론이 악화하자 큰아들은 미국에서 귀국해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했다. 그는 현재 LG전자 경영관리부 과장으로 일하고 있다.





이총장 오른팔, 사외이사 2개 겸직


이총장이 만약 사외이사 직을 2개씩이나 맡으려 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서울대 내부 지침마저 무시한 것이다. 1998년 서울대는 교수 1인당 1개 회사에 한해 사외이사 겸임을 허용하는 지침을 만든 적이 있었다. 많은 교수가 사외이사로 일하는 현실을 감안한 가이드라인이었다.
사외이사를 맡고 있는 한 교수는 “여러 차례 사외이사 제의를 받았지만 내부 지침 때문에 모두 고사해 왔다”라고 말했다. 다른 정교수는 “지침을 어긴 교수가 있다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현재 서울대에서 사외이사 직을 2개 맡은 교수는 박오수 기획실장이다. 그는 이기준 총장의 ‘오른팔’로 알려져 있는데, 3월20일 이총장을 대리해 전체 교수에게 사과 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이기준 총장은 “사외이사 직을 2개 가진 교수가 있었는지는 몰랐다”라고 밝혔다.


현재 대학 교원은 국가공무원법 64조와 사립학교법 55조에 의해 사외이사 직을 1개도 맡지 못하게 되어 있다. 2000년 11월 교육부는 공문을 보내 사외이사 겸직이 불법임을 환기했다. 당시 송 자 연세대 총장의 사외이사 겸직 문제가 쟁점으로 떠오를 때였다. 이총장은 “교육부 공문은 전결 처리되어 못 봤다”라고 말했다.


이총장은 “영리 목적이 아니라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사외이사 직을 맡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기준 총장이 재벌 오너의 전횡을 견제한다는 사외이사제 본래 취지에 충실했는지는 의문이다. 1999년 6월 LG화학은 구본준 등 총수 일가 34명에게 보유 주식(LG석유화학)을 매각했다. 2000년 4월에는 구자경·구본무 등 오너 일가 비상장 주식(LG칼텍스·LG유통) 2천6백억원어치를 매입했다. 참여연대는 ‘팔 때는 헐값, 살 때는 비싼 값을 매겨 소액주주만 손해를 보았다’고 비난했다. 이런 오너 재산 불리기 작업이 사외이사가 참석한 이사회 의결을 거쳐 진행되었음은 물론이다.


보수 문제에서도 모호한 부분이 있다. LGCI는 지난해 사외이사 3명에게 한 사람당 평균 2천6백만원을 보수로 주었다고 공시했다. 서울대 지침은 사외이사를 맡은 교수는 기업으로부터 보수를 전혀 받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총장은 “LGCI로부터 보수를 받은 일은 없고 연구활동비 명목으로 받았다”라고 말했다. 연구 과제는 ‘바이오 촉매 개발 타당성’ 등이었으며, 지도 학생과 같이 연구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서울대는 외부로부터 위촉을 받아서 하는 연구는 모두 중앙에서 관리한다. 대학본부는 연구비의 10∼15%를 ‘오버헤드’라는 이름으로 세금처럼 거둔다. 그러나 총장은 이런 연구비 내역을 신고하지 않았다. 일반 프로젝트 계약 연구와 성격이 달라 신고할 만한 내용이 아니었다는 설명이다.


1998년 총장 취임 당시 5억원이었던 이기준 총장 부부의 예금 재산은 해마다 1억3천만∼1억6천만 원 가량 늘어가고 있다. 이기준 총장은 올해 공직자 재산 등록 대상자 5백94명 가운데 자녀 재산 고지를 거부한 35명 중 1명이다. 현행법은 피부양자가 아니면 고지를 거부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의 아내는 여성부 정책기획실장이다.


이기준 총장을 둘러싸고 잡음이 터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9월에는 공직자 골프 금지령을 무시하고 평일에 국방부 장군들과 골프를 치다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서울대 교수들이 총장 개인을 향한 반대·항의 성명을 발표하는 풍경도 이총장 취임 이후부터 벌어진 신풍속도다. 총학생회가 성명서를 발표한 21일 이기준 총장은 1층을 점거한 학생들 때문에 대학본부에 갇혀 있다가 뒷문으로 겨우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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