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일 벗는 김정일의 ‘극동 구상’
  • 남문희 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2.09.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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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토크에 대륙 진출기지 건설 계획…다급한 미·일, 대북 행보 빨라져



러시아어로 ‘블라디’는 ‘정복하다’라는 뜻이다. ‘보스토크’는 ‘동쪽’. 그러니 블라디보스토크는 ‘동쪽을 정복하다’라는 말이 된다. 과거 러시아 제국이 부동항을 확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펼쳤던 동진 정책의 산물인 만큼 이름에서부터 결연함이 묻어난다.


그래서일까. 지난 8월23일 이곳 방문을 정점으로 한 김정일 위원장의 러시아 극동 방문(8월20∼24일)에서도 결연한 의지 같은 것이 풍겼다. 8월24일 평양방송 보도가 그 속내를 드러냈다. 평양방송은 김위원장의 방러 외교가 북한의 국제적 위상을 한껏 드높였다면서 “적들과의 대결은 군사적 힘의 대결인 동시에 정치사상적 힘의 대결로 군사적 타격력에는 한계가 있지만 사상의 힘에는 한계가 없으며 그 위력은 핵무기보다 더 크다”라고 ‘길게’ 말했다. 한마디로 김위원장이 이번 러시아 방문을 통해 ‘총성 없는 전쟁’을 치르고 돌아왔다는 얘기다.


지난 호 <시사저널>은 그의 러시아 극동 지역 방문이 북한 외교의 전환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것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즉 미국 중심 외교에서 러시아·중국·유럽 중심의 유라시아형 외교로의 전환이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바로 그런 전환을 시위하기에 안성맞춤인 도시였던 셈이다. 그리고 김위원장의 시위 효과는 강력하고 즉각적이다.


매우 주목할 만한 움직임이 최근 연달아 일어났다. 그 하나는 북·미 관계에서 발생했다. 지난 8월24일 미국 국무부의 파리엘 새이드 한국과 부과장 등 실무 대표단이 북한을 전격 방문했다. ‘폐연료봉 보관 문제 등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와 관련한 사안을 논의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미국 국무부와 북한 외교부가 어떤 진전을 이루고자 할 때 핵사찰 문제를 표면에 띄우는 일이 올해 초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난 1월 중순에 있었던 국제원자력기구(IAEA) 대표단의 평양 방문 이면에도 미국 국무부와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가 있었다. 국제원자력기구 대표단 방북을 양측의 성의를 가늠하는 시험대로 활용했던 것이다.


이 점은 바로 현재 부시 행정부가 안고 있는 내부 사정에서 연유한다. 지난해 10월 이후 북한이 외교 노선을 미국 중심에서 러시아·중국·유럽 축으로 이동하려는 낌새를 보이자 미국 행정부는 크게 두 가지 입장으로 갈려 내홍을 겪었다. 국무부를 중심으로 한 지역 중시 그룹은 북한의 이같은 변화가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입지를 약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들은 주로 대화를 통해 북한을 설득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고위 정책 라인에 포진한 이른바 대량파괴무기 중시파가 문제였다. 지난해 말 이후 바로 이들이 대북 강경책을 주도해 왔다.
따라서 국무부의 지역 중시 그룹이 부시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반대쪽 이슈를 일정 부분 포용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 즉 북한과 대화해 핵 문제도 풀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해야 했다. 이는 한편으로는 북측의 양해가 없이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미국 국무부와 북한 간에 핵사찰이 이슈로 떠올랐다는 얘기는 그 이면에서 많은 대화가 진행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이번의 경우 서해 교전 이후 중단된 북·미 대화 재개와 제임스 켈리 특사 파견 문제가 당연히 포함될 수밖에 없다.


북·미 관계에서 나타난 흐름이 이처럼 해석을 필요로 하고 있는 데 비해 최근 북·일 관계에서는 해석할 여지가 없는 전격적인 움직임이 나타났다. 미국 국무부 대표단이 북한을 방문한 날인 지난 8월24일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가 정부간 채널을 통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북·일 관계에 대한 메시지를 직접 전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8월25일부터 평양에서 열리는 북·일 수교회담의 일본측 대표 다나카 히토시(田中均)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을 통해 북한 권력 서열 4위로 알려진 홍성남 내각총리에게 전해진 이 메시지에서 고이즈미 총리는 ‘양국 사이에 놓여 있는 현안은 물론 관계 정상화와 관련된 다양한 문제들을 다룰 준비가 되어 있다. 북한 당국도 진지한 자세로 회담에 임해 주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10년이 넘은 북·일 교섭 과정에서 이런 형식은 처음이다. 남북 정상회담 직후 일본의 모리 총리가 재미 언론인인 문명자씨를 통해 김정일 위원장에게 친서를 보낸 사실이 알려져 일본 정가에서 파문이 일었던 적이 있다. 지금은 그 때보다도 관계가 냉각된 상태에서 정부간 직접 채널이 동원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파격적이다.


해양 세력 응전 시작되었다?


해양 세력을 대표하는 미·일의 이같은 전격적인 움직임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대미 추종 외교를 선언하고 실천해온 고이즈미 총리가 미국과 협의하지 않고 그 정도의 파격을 행할 수 있었을까. 오히려 그보다는 국무부 중심의 지역 중시파와 연계해서 일본이 먼저 움직이고 미국이 특사를 파견해 보조를 맞추어 가는 형태로 진행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블라디보스토크”(동진)를 외치며 유라시아의 동쪽 끝으로 달려간 김정일 위원장에게 해양 세력이 응전해 오기 시작한 것이다.


응전의 강도는 앞으로 드러날 김정일-푸틴 회담 내용과 직결될 것이다. 두 사람은 8월23일 오후 5시부터 4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런데 지금까지 알려진 것은 양국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철도 연결로 대표되는 경제 협력에 노력하기로 합의했다는 것이 고작이다. 관객의 궁금증을 자아내 손님을 끈 다음 상황을 보아가며 보따리를 풀겠다는 고도의 심리전이 엿보인다.


보따리의 내용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포함되어 있다면 어떻게 될까. 북한이 앞으로 중국의 베이징에 버금가는 대외 창구를 극동 지역에 개설한다는 것이다. 즉 블라디보스토크를 북한의 ‘극동 게이트’로 삼아 유라시아에 진출하는 전진 기지로 삼겠다는 것이 바로 아직 밝혀지지 않은 김위원장의 극동 구상에서 핵심 내용이라는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처음 출발하는 곳이다. 앞으로 동해북부선까지 연결되면 유라시아 지역 최대의 물류 거점으로 성장하게 된다. 북한에게는 대륙 진출의 거점으로 이보다 좋은 곳이 없다. 앞으로 양국은 직항로 개설을 포함해 평양-블라디보스토크를 육·해·공으로 연결할 계획이다. 블라디보스토크를 정점으로, 러시아 산업 과학의 중심지인 노보시빌스크와 북한 기업의 극동 진출 창구인 하바로프스크를 삼각축으로 연결하는 진출 전략도 구체화할 것으로 알려졌다. 김위원장의 극동 구상과 김정일-푸틴 회담의 결과에 따라 동북아 국제 정치가 춤을 추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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