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일 정상회담 보이지 않는 손이 성사시켰다
  • 남문희 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2.09.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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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아미티지 부장관이 사실상 주도
고이즈미 총리의 평양 방문은 일본의 독자적 결단인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 것인가. 고이즈미 총리 방북의 기폭제는 지난 8월24일 있었던 다나카 히토시(田中均)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과 홍성남 북한 총리 간의 이례적 면담이다. 이 자리에서 다나카 국장이 고이즈미 총리의 메시지를 전한 것이 출발점이다. 그 날 또 다른 인물들이 평양에 나타났다. 바로 파리엘 새이드 미국 국무부 한국과 부과장을 포함한 국무부 실무 대표단 5명이다.




이들의 방북 목적을 보는 NHK와 일부 국내 언론 보도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먼저 보도한 NHK측이 ‘미국 특사 방북을 앞둔 일정 협의’를 강조한 데 비해 후속 보도한 국내 언론은 ‘폐연료봉 봉인과 관련한 기술적 문제 협의’에만 초점을 맞춘 ‘소식통’의 코멘트를 달아 대조적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언론 보도에 나와 있는 일정에 따르면, 국무부 대표단이 도착 다음 날인 8월25일부터 ‘폐연료봉 봉인과 관련한 기술적 협의’를 위해 회담을 벌인 북한측 창구는 마철수 북한 외무성 국장이다. 그런데 마국장은 같은 날인 25일부터 시작되는 북·일 국장급 수교회담의 북한측 대표이기도 하다. 국내 언론 보도가 사실이라면 똑같은 인물이 하루에 두 나라를 상대로 힘겨운 외교 협상을 벌인 이상한 일이 벌어진 셈이다.


두 번째 의문이 있다. 고이즈미 총리의 메시지에 대한 답변을 강석주 북한 외교부 부상이 들고 나왔다는 점이다. 즉 강석주 부상은 26일 ‘용기를 주는 메시지이며 감사하고 싶다. 적극 환영이다’라는 김정일 위원장의 반응을 전했는데, 그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자타가 공인하는 대미 협상 창구이다. 외교 관례로 보자면 북한은 일본 정부가 아닌 미국 정부에 환영의 뜻을 전한 것이 된다.


도쿄의 정보 소식통들로부터 기자가 입수한 내용들은 그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보여준다. 우선 언론 보도에서 사라진 국무부 실무자들의 그 뒤 행방이다. 그 중 1명이 평양측과 ‘이상한 회담’을 하고 난 뒤 도쿄에 나타나 국무부의 거물 인사와 합류했다. 바로 아미티지 부장관이다.





아미티지와 아베 신죠 ‘비밀 협상’


아미티지는 8월27~28일로 예정되었던 미·일 차관급 전략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도쿄에 갔다. 그런데 아미티지의 도쿄 일정 또한 매우 이상하다. 그는 28일에는 외무성 공관에서 다케우치 유키오(竹內行夫) 외무성 사무차관과 예정된 차관급 전략 협의를 가졌다. 그리고 기자회견에서 ‘적절한 시기에 켈리 특사의 방북이 보증될 것’이라고 언론 서비스도 했다.


그런데 27~28일 그는 도쿄 지오다쿠에 있는 후쿠다테 레스토랑에서 또 하나의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바로 일본 정부 내 막후 실력자와의 비밀 협상이었다. 여기서 등장한 인물이 바로 아베 신죠((安倍晉三) 관방 부장관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아베 신죠라는 인물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내각 시스템에서 관방 부장관은 관방장관이나 외무장관을 능가하는 결정 권한을 가지고 있다. 실무를 총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의 중요한 대외 정책 역시 그의 손에서 결정되기 일쑤다. ‘그림자 총리’ 또는 ‘부총리급’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아베는 친미파이자 대북 강경파로 알려졌다. 북·일간 현안인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해 외무성은 대충 넘어가고 싶어하지만 아베가 놓아주지 않아 진행이 안되고 있다고 할 정도다. 친미파이자 대북 강경파인 그를 잘 설명해 주는 일화가 지난해 말 있었던 총련계 금융기관 수색 사건과 괴선박 격침 사건이다. 이 두 사건은 지난해 10월 상하이 에이펙 회담에서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의 요청을 받아들여 아베가 진두 지휘했다는 얘기가 외교가에 퍼져 있다.


이처럼 분명한 성향을 가진 아베 부장관을 아미티지가 직접 만난 이유는 무엇인가. 일본 정부의 정책 방향과 관련한 중대한 의제가 있었다는 얘기다. 도쿄의 정보 소식통들에게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과 관련한 메시지를 직접 전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일본 매스컴은 일본측이 아미티지에게 그 내용을 전하고 양해를 구했다고 보도했으나 내막은 다르다는 것이다.





그 내막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의 정보 담당자들이 정통하다. 기자와 통화한 도쿄의 한 인사는 그 ‘일본 정부의 정보 담당자’로부터 직접 들었다는 다음과 같은 얘기를 털어놓았다. “고이즈미 방북 아이디어는 바로 아미티지로부터 나온 것이다. 아미티지가 아베 신죠 부장관에게 이 메시지를 전했고 그 내용이 후쿠다 관방장관-고이즈미 총리에게 전달됐다.” 즉 정반대 경로인 셈이다. 그는 이 정보기관 관계자로부터 일본 정부의 공식 발표에 앞서 고이즈미 총리 방북 사실도 미리 들었다고 밝혔다.


이제 앞에서 들었던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의 실마리가 비로소 풀리기 시작한다. 왜 미국 국무부 실무 대표단이 국장급 북·일 수교 회담이 열리는 그 날 동일한 북한측 대표와 회담했으며, 왜 대미 담당 강석주 부상이 등장했는지, 국무부 실무자가 왜 도쿄로 날아가 아미티지 부장관과 합류했으며, 그가 외무성 사무차관 외에 굳이 일본 정부 막후 실력자와 비밀리에 접촉한 이유가 무엇인지 등이다.


일본측 설명대로 그가 듣는 입장이었다면 이런 복잡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입장이었다는 얘기다. 결국 표면상의 북·일 국장급 회담과 별도로 미국 국무부 라인을 가동해 북측의 의중을 살폈고, 그 결과를 도쿄에서 취합해 결론을 내려 일본측에 통보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고이즈미, DJ 조언 따라 북한에 접근


아미티지의 비중이나 미·일 관계의 역사로 볼 때도 미국의 이해와 직결되는 일본 총리의 방북에 대해 미국이 단순히 듣는 위치에 머물렀다고 보기 어렵다. 과거 미국과 협의 없이 중국과 수교 협상을 했던 다나카 전 총리나 1990년 북한을 방문했던 가네마루 신이 말년에 얼마나 비참해졌는지 일본 정치인들이 모를 리 없다.


아미티지는 과거 공화당 정권 때부터 한국과 일본 등에 광범위한 인맥을 쌓아온 국무부 실력자이다. 최근 그와 정반대 메시지를 들고 서울에 나타나 목청을 높이고 돌아간 볼턴 차관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중량감을 가지고 있다. 특히 일본 정가에 그가 미치는 영향력은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일본 외교가 걸어온 길을 들여다보면 상황은 더욱 분명해진다. 고이즈미 총리나 후쿠다 관방장관은 총리 방북 결정이 지난 1년 간의 북·일 막후 접촉 과정에서 무르익어 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냉정하게 볼 때 일본 외교는 지난해 말까지도 미국 내 강온파간 갈등에 휘둘려 왔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앞에서 언급한 총련계 금융기관에 대한 압수 수색과 괴선박 사건이다. 당시 콘돌리자 라이스 보좌관으로 대표되는 미국 강경파가 일본에 이같은 주문을 하게 된 배경에는 북·미 관계가 놓여 있었다. 즉 지난해 10월께 북·미간 물밑 교섭 과정에서 미국이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더 이상 미국과의 대화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북한이 최후 통첩을 한 것이 그 출발점이다.





북한의 최후 통첩 이후 미국 행정부는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어 극렬한 투쟁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라이스로 대표되는 강경파가 일본에 악역을 떠맡긴 것이 앞의 두 사건이었다. 그 뒤 이 사건은 일본 외교가 한반도에서 저지른 두 번째의 뼈아픈 실수로 회자되었다. 1997년 동아시아 위기 때 일본이 한국 증시에서 자금을 철수함으로써 한국을 외환 위기 상황으로 밀어넣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이래 두 번째라는 것이다.


특히 외무성과 내각조사실 등 관료들이 심각한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2002년에 예상되는 동북아의 외교전에서 자칫하면 일본만 소외될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급기야 지난해 12월 중국 다롄에서 북·일 간에 극비 회담이 열렸다. 당시 이 회담에 일본측은 외무성 과장, 북한은 대외무역촉진위원회(무촉위) 소속 인사가 나왔으나, 사실상 일본 내각조사실과 북한 군부 담당자가 직접 참석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양국 관계 개선에는 유보적인 결론에 머물렀으나 실무급 채널이 연결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움직임이었다.


일본 정부 소식에 정통한 일본의 한반도 전문가는 일본 정부의 대북 접근이 확실한 방향성을 갖기 시작한 계기로 올해 3월의 한·일 정상회담을 지적했다. “김대통령이 고이즈미 총리에게 김정일 위원장과 직접 접촉을 시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조언을 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는 일본측 핵심 창구인 다나카 국장이 그 과정에서 극비리에 평양을 방문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일본, 서해교전으로 기회 잡아


미국내 강온파 사이에서 방황하던 일본 외교가 지미(知美)파인 다나카 국장을 축으로 국무부 온건 라인인 아미티지-파월 쪽과 확고한 협조체제로 전환한 것도 이 때쯤부터일 것으로 판단된다. 앞의 일본 소식통 역시 이 점을 명확하게 밝혔다. 그는 “일본은 아미티지와 파월로 이어지는 국무성 온건파와 모든 문제를 협의했다. 럼스펠드·체니 등 강경파는 이 과정에서 잘 되나 보자는 태도로 한 걸음 물러서 있었다”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아미티지-파월로 이어지는 국무부 대화파와 일본 외무성의 공조 라인이 이미 몇 달 전부터 구축되어 움직여온 것이다.


서해교전은 일본 외교에 절호의 기회를 안겨주었다. 서해교전이 아니었다면 미국의 켈리 특사가 북한을 방문했을 것이고, 그러면 일본은 뒷북을 치는 꼴이 된다. 그러나 미국의 특사 파견이 연기되고 강온파의 갈등이 다시 내연하면서 미국측이 방향을 틀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과거 미국의 대북 접근 정책에서 ‘선미 후일’을 추구하다가 벽에 부딪히면 일본을 앞세우는 모습이 간헐적으로 등장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국면이다.


서해교전 직후 가와구치 요리코(山口順子) 일본 외상이 갑자기 서울에 날아왔다. 그녀는 서울에 오기 전 다나카 국장을 워싱턴에 파견해 마치 일본이 한·미 관계와 북·미 관계를 중재하는 듯한 매우 이례적인 행동을 보였다. 이미 이 때부터 미·일 간에 대북 접근 순서를 바꾸는 문제가 논의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북·일 회담의 수위 문제는 그 뒤에 이루어지는 북·미 회담에 중차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따라서 그 수위를 결정하는 현장에 미국 국무부 라인이 직접 참여했고 그 현장 사령관인 아미티지 부장관이 최종 결론을 내렸다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이 얘기는 그 후속으로 이어지는 미국 특사의 북한 방문이 어느 정도 중량감을 가지고 이루어질지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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