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란의 칼부림은 예고되었다
  • 나권일 기자 (nafree@sisapress.com)
  • 승인 2002.09.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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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원 어린이 11명 참변 사건/경찰, 5월에 범인 황씨 두 번 조사 후 훈방
"정신질환자에 대한 관리가 이렇게 허술할 수 있느냐.” 지난 9월4일 서울 군자동에서 한 정신이상자의 난동으로 온몸이 흉기에 찔리는 날벼락을 당한 어린이 부모들의 항변이다.


대낮에 교회 선교원 식당에 무단 침입해 주방 식칼을 빼들고 어린이 11명을 마구잡이로 해친 황법래씨(53)는 5년 전부터 정신질환을 앓아왔다. 지난 7월 황씨를 상담한 서울 사당동 ㅂ신경정신과의원 담당의는 “심한 환청에 시달리는 중증이었다. 입원해서 약물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얘기했지만 황씨가 말을 듣지 않았다”라고 주장했다.





황씨 정도의 중증 정신질환자는 동사무소에 장애인으로 등록해 행정기관의 관리를 받아야 한다. 황씨에게 가족이 있었다면 사진과 신분증, 병원의 진단의뢰서를 첨부해 동사무소에 제출하면 장애인으로 등록할 수 있다. 동사무소는 장애인 카드를 만들어 진단·치료 기간 등을 점검해 가족에게 통보하고 사회복지 담당자가 정기 점검한다. 장애인으로 등록하면 장애인복지관의 진료센터나 자원봉사자들로부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황씨는 10년 전 이혼한 뒤 의지할 아내나 자녀도 없이 단칸 전셋방에서 혼자 살았다. 황씨는 정기적인 치료는커녕 먹고 살기도 힘들었다. 공사장에서 날품을 팔거나 도심 빌딩의 허드렛일을 하며 정상인처럼 활동했다. 몸이 많이 아프면 병원을 찾아갔지만 돈이 없어서 약을 사먹지도 못했다. 황씨는 생계 때문에 치료받을 기회를 놓쳤고, 주위의 도움이 없어 장애인 혜택도 받지 못했다.


정신질환자 범죄 재발률 높아


경찰의 허술한 대응도 사고를 예방하지 못한 한 원인으로 꼽힌다. 황씨는 이번 사고를 저지르기 전에도 두 차례나 경찰 조사를 받았다. 지난 5월 말에는 지하철에서 괴성을 지르다 이를 제지하는 역무원과 다투었고, 5월 중순에는 자기가 살던 동네의 이웃과 싸워 상해를 입혔다. 황씨의 정신질환은 깊어갔지만 경찰은 정신 감정을 의뢰해볼 생각도 않고 단순 폭행 사건으로 처리해 훈방하고 말았다. 지난해 범죄를 저지른 정신장애인 2천5백여 명 가운데 67%가 재범자였다. 경찰의 안이한 대처가 사태를 키웠다고도 볼 수 있다.


경찰도 답답하기는 하다. 중증 장애인이 아니면 치료감호 등의 보호 처분 대상이 되기 어렵다. 법무부 공주치료감호소의 시설과 인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증상이 가벼운 경우 훈방 조처하면 가족이 나 몰라라 하기 일쑤이다. 정신질환자의 범죄가 재발하는 주된 원인이다.


정부가 나서 정신질환자들을 관리하기도 쉽지 않다. ‘잠재적 위험성’만을 근거로 강제 치료를 받게 하거나 격리 수용하면 당장 가족들이 인권을 침해한다고 반발한다. 황씨처럼 취업을 위해 병력을 속이고 장애인 등록을 미루는 정신질환자들을 행정기관이 일일이 찾아내기도 어렵다. ‘정신과 개원의 협의회’ 김재훈 총무는 “정신질환자들이 언제나 방문할 수 있는 치료 시설을 늘리고, 세상의 왜곡된 시선을 피해 마음 놓고 병원을 드나들 수 있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시급하다”라고 주장했다.


해를 입은 어린이들은 상당한 심리적 충격을 받았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후유증 때문에 앞으로 공공 장소에 가거나 사람을 만나는 것을 기피할 가능성이 크다. 전문가들은 칼에 찔린 어린이나 사고를 목격한 어린이 모두 꾸준히 심리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아이들은 평생 짐이 될지도 모를 큰 상처를 입었고, 이런 일은 또 언제라도 되풀이될 수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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