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가 한반도 주도권 빼앗기랴
  • 이창주 (국제한민족재단 상임의장) ()
  • 승인 2002.10.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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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 개발 폭로는 ‘한반도 신질서’ 구축 노림수…북한, ‘진실 게임’ 통해 실리 추구
반세기 민족 분단 이래 가장 ‘따뜻한’ 순간을 맞고 있는 남북 관계가 제임스 켈리 미국 대통령 특사의 2박3일 평양 방문 뒤 또다시 차가워지고 있다. 미국이 발표한 대로라면 북한이 핵 개발을 시인한 것은 1994년 제네바 합의 위반을 스스로 인정한 꼴이 된다. 그래서 국제 사회는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미국이 의도한 대로 북한을 압박하라는 목소리가 커져가고 있다.





문제는 미국이 왜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북한의 핵 개발 동향을 이 시점에서 터뜨렸으며, 북한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미국의 보수 세력과 정보기관 및 대외정책 팀들은 최근의 한반도 정세를 내심 불편해 했다. 그 이유를 크게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러시아와 중국이 북한과 확고한 동맹 벨트를 구축하게 되면서 미국의 대북 영향력에 한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한 남북 관계에서도 미국이 개입할 여지가 점점 줄어들고, 일본의 대북 입장 역시 미국과 일치하지 않았다. 여기에 유럽연합(EU)이 적극적으로 북한에 접근하고 있고, 북한의 개혁·개방 정책 역시 미국의 협력을 과거처럼 중시하지 않는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미국이 일방적으로 북한에 강경 자세를 유지하고 한반도를 긴장 상태로 몰아가기는 어렵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미국은 한반도 정세에 개입하기 위한 새로운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계기와 시기는 북한이 우라늄 농축 장비를 구입했다는 정보를 파키스탄으로부터 제공받은 지난 7∼8월께로, 리처드 아미티지 미국 국무부 부장관이 일본을 방문하기 직전이었다. 미국은 당시 이를 계기로 북한을 불량 국가로 재규정하는 명분을 확보하고 한반도에서 미국의 입지를 강화할 전략을 수립했다.


북·일 정상회담 준비 과정에서 미국은 그같은 전략을 실행했다. 일본을 방문한 아미티지 부장관은 일본이 북한에 성급하게 접근하는 것을 견제하려고 북한이 우라늄 농축 방식의 핵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편적으로 알려 주었다. 그러나 비밀 유지를 당부하면서 그리 심각한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고이즈미 총리는 이 문제에 대한 특별한 우려 없이 평양 방문길에 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북·일 정상회담이 일본인 납치 문제 때문에 진전되지 못할 것으로 내다보았는데 오히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솔직한 시인과 사과로 정반대 현상이 벌어졌고, 고이즈미 총리가 공동성명에 서명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미국이 핵 정보를 흘렸는데도 불구하고 남북 관계 역시 속도가 떨어지지 않았다. 미국은 예상치 않은 상황 전개를 지켜보다가 서둘러 특사 파견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제임스 켈리 미국 대통령 특사 일행은 평양 방문을 마치고 서울과 일본에 들러 당국자들과 기자들에게 방북 결과를 설명했다. 그러나 형식만 갖추었지 아무런 알맹이도 내놓지 않은 채 워싱턴으로 서둘러 돌아갔다. 그리고 워싱턴은 관련 당사국에 함구령을 내린 채 10월17일 발표 때까지 12일 동안 침묵을 지켰다.


워싱턴, ‘압박→봉쇄→신협정 체결’ 작전


12일 동안 워싱턴에서 실제로 논의된 내용은 무엇일까. 정통한 소식통에 따르면, 백악관의 관계자 대책회의에서는 어떤 경우든 미국이 북한에 군사력을 사용하거나 선제 공격을 할 수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북·중·러 동맹 체제가 미국의 대북 군사력 사용에 대해 강력한 방어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북한 군사력 역시 막강하다고 판단하고 △한국 국민의 저항이 과거와 달리 매우 강하며 △이라크 공격과 중동 문제로 인해 미국의 국제적 리더십이 국내외에서 비판을 받고 있고 △이로 인해 국내 경제 역시 위축되어 불안감이 조성되고 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미국은 ‘즉각적이고 가시적인 평화적 대화 해결 원칙’을 제시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방식은 크게 세 가지이다. 하나는 국제 사회에서 북한을 강도 높게 압박하는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반도의 불안정성을 빌미로 미국 영향권에 있는 한·일·유럽연합 등의 대북 교류 협력 속도를 조절하며, 마지막으로 경수로 건설과 중유 제공 중단을 선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네바 핵 합의를 파기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미국이 핵 문제를 ‘뜨거운 감자’로 이슈화하면서 제네바 합의를 파기하게 된 책임이 북한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했다는 것이다. 이 또한 백악관이 결정한 시나리오의 일부이다. 10월20일자 <뉴욕 타임스>는 콜린 파월 국무장관의 ABC 방송 인터뷰를 인용해 이러한 내용을 확인해 주었다. 이와는 별개로 한반도 핵 무장화를 반대하는 데 견해를 같이하는 중국과 러시아에 존 볼턴 국무부 군축 담당 차관을 급파해 공조 체제 구축을 시도하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는 10월18일자 사설에서 ‘북한은 무장을 해제하든지 아니면 국가 붕괴의 길을 택하든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주장했다. 같은 날 <뉴욕 타임스>는 사설에서 북한이 약속을 준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핵 관련 진실은 무조건적 강제로 규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전략은 일단 주효한 것으로 보인다. 유럽연합이 대북 지원을 전면 재검토할 가능성을 밝혔고, 일본이 국교 정상화 교섭 순항에 난색을 표명하고 나섰으며, 한국도 미국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필자가 구한 정보에 따르면, ‘워싱턴 한반도 작전회의’ 참석자들은 결론적으로 이번 사태를 계기로 클린턴 행정부가 체결한 1994년 제네바 핵 합의의 결함을 보완하고 북한 군축 문제를 포함한 ‘신협정’을 북·미 간에 체결한다는 원칙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제1 단계로 국제 사회와 연대한 대북 압박 정책으로 북한의 핵 개발 시설을 해체한다.

이 방식이 여의치 않을 경우 제2 단계로 대북 봉쇄 정책을 실행해 북한을 미국과 타협할 수밖에 없는 외길로 몰아넣는다. 그리하여 새로운 북·미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미국이 주도하는 한반도 신질서를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지금의 세계 질서 구조와 국제법상 미국이 북한에 핵 개발을 포기하고 사찰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는 것은 적법하다. 그리고 북한의 핵 개발은 한반도 비핵화를 선언한 남북 합의에도 위배된다. 이러한 파문을 예상할 수 있었는데도 북한이 또다시 핵 개발 카드를 꺼내든 이유는 무엇인가.


북한은 미국이 제네바 핵 합의를 이행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이 양국 관계가 교착 상태인 것을 빌미로 경수로 사업을 지연해 완공 전망이 불투명하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부시 행정부가 강경 자세를 누그러뜨리지 않고 북한을 위협해 자구책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북한측 설명이다.





평양의 진실과 제3의 결단


핵 개발 수준에 대해서는 우라늄 농축 시설은 갖추었지만 이를 가동해 핵무기를 제조하지는 않았으며, 이러한 사실은 미국도 잘 알고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제임스 켈리 특사도 이 부분에 대해 북한측과 비슷한 발언을 했으며, 미국 행정부나 정보 당국자 어느 누구도 북한이 우라늄 농축 시설을 가동했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북·미 간의 뉴욕 대화 채널에 관여하고 있는 한 북한 외교관은 제임스 켈리 특사가 평양을 방문하기 전 구체적인 회담 의제나 외교 협의 내용을 제시하지 않았으며, 양국 관계 진전을 위해서 방북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미국 방북단의 자세가 불분명해 평양에서도 의사 타진용 실무 회담과 성과를 전제로 한 고위급 회담 등 두 가지 회담을 모두 준비했다고 한다. 미국이 우라늄 농축 시설을 중요 사안으로 제기할 것은 이미 예상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의 자세가 강경해 실무회담 선에서 끝나고 말았다. 북측은 미국 특사가 처음부터 어떤 시나리오를 가지고 평양을 방문한 것 같다고 본다.


핵 개발 시인이 일본인 납치 시인에 이은 또 하나의 솔직한 고백인지 아니면 전략적인 고백인지는 현단계에서 불분명하지만 밝힐 것은 밝히고 받을 것은 받겠다는 자세였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북한측은 남북 정상회담을 제1 결단, 북·일 정상회담을 제2 결단, 핵 개발 시인을 제3 결단이라고 표현한다. 일종의 북한판 ‘진실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는 근거는, 미국이 북한 체제 안정 및 국제적 지위 보장과 경제 제재 해제 조처를 취하면 북한은 핵사찰 수용과 핵 개발 포기를 받아들이고 이와 함께 군축 문제를 협의하겠다는 의사를 뉴욕 채널을 통해 밝혔다는 데 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미국이 새판 짜기를 완성할 때까지 한반도 정세와 북한의 위치는 불안정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미국에 두 가지 빌미를 주었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미국 배제 정책을 추진하며 핵 개발을 준비한 것이다. 그러나 역으로 최근 사태는 북한에도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양국 모두 막다른 골목은 피하고 싶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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