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으로 샌 개혁 이미지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2.1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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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찬 서울대 총장, ‘우조교 사건’ 관련 발언으로 파문


문제의 발언은 우연히, 그것도 면담 시간 마지막에 터졌다. 10월23일 정운찬 서울대 총장과 한명숙 여성부장관은 프레스센터 19층에서 단독 면담을 가졌다. 한장관이 서울대에 여교수 채용을 늘려달라며 요청한 자리였다. 보좌진 없이 기자 2명이 참석한 가운데 두 사람은 대화를 이어갔다. 참석한 기자가 전하는 우조교 관련 발언은 이렇다.


“마지막으로 성희롱 문제를 말할까 합니다.”(한장관) “서울대는 그 점에서는 가장 앞서갑니다. (신입생)오리엔테이션에서 교육도 하고 있구요.”(정총장) “아무래도 우조교 사건 같은 게 영향을 미쳤을 테죠.”(한장관) “우조교 사건 말인데요, (중략) (신교수가) 잘한 것은 아니지만 사회적으로 매장된 것은 문제에요. 사회적으로 판결이 나버리고 나니 그만이에요. 사실은 여성운동도 신중해야 해요.”(정총장)


이때부터 두 사람은 우조교 사건을 놓고 10여 분간 설전을 벌였다. 정총장은 사건 당시 신교수와 같은 아파트에서 살았고 고소장도 보았다며, 우조교의 고소장 내용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정총장은 우조교 사건을 ‘우조수 사건’이라며 성격 규정을 달리했다. 사제지간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고, 1년 계약직 조수가 계약이 해지되자 앙심을 품고 한 일이라며 정총장은 신교수를 두둔했다(여성계에서는 오히려 ‘신교수 성희롱 사건’이라고 부른다).
여성계 “여성운동 명예훼손한 망언”


우조교 사건은 9년 전인 1993년 8월24일, 서울대에 대자보가 나붙으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자연과학대학 신 아무개 교수가 1년 동안 수치스럽고 혐오스러운 근무 환경을 조성했고, 신교수의 성적(性的) 요구에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고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서울대와 여성계가 발칵 뒤집혔다. 9월16일 신교수가 우조교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하고, 10월18일 우조교가 신교수와 서울대 총장을 상대로 5천만원 상당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내면서 이 사건은 법정 다툼으로 이어졌다. 우조교 사건은 <법조 50년 야사>에 기록될 만큼 최초의 성희롱 재판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당시 재판정에는 법학과 학생들이 현장 학습을 나올 만큼 치열한 법리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994년 3월22일 1심 재판부는 신교수가 우조교에게 3천만원을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하지만 1994년7월25일 2심 재판부는 신교수의 손을 들어주었다. 1승1패를 주고받은 뒤 대법원은 우조교의 손을 들어주었다. 1999년 파기환송심에서 재판부는 신교수가 우조교에게 5백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6년 간의 법정 싸움 끝에 우조교가 승리한 것이다. 지난해 5월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우조교를 성폭력추방운동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하지만 신교수는 실명으로 <나는 성희롱 교수인가>라는 책을 내는 등 억울함을 주장하고 있다. 신교수는 현재 서울대에 재직하고 있다.


대법원 판결까지 난 사건을 정총장이 뒤집자, 여성단체는 망언이라며 반발했다. 여성단체는 여성운동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며 공개 사과를 촉구했다. 발언 하루 만에 정총장은 여성단체를 방문해 사과했다. 급한 불은 끈 셈인데, 불씨는 남아 있다. 정총장은 해명 기자회견 뒤에도 소신을 굽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교수 성폭력 뿌리뽑기 연대회의’ 허고은씨(22·동국대 총여학생회장)는 “개혁 총장도 별수 없나 보다. 제왕적 교수의 제왕적 발언답다”라고 말했다. 허씨는 정총장 발언의 본질을 학내 권력 관계에서 찾았다. 가해자가 교수인 경우 성추행은 덮이거나, 밝혀지더라도 기나긴 법정 다툼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동국대(1999년)와 서강대(2000년)에서 발생한 제2의 우조교 사건도 해를 넘겨 법정 다툼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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