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 시스템 ‘완벽’ ‘사람 손’이 변수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3.0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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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재검표 ‘사전 검증’…결과 뒤집기 어려울 듯
1월27일 대통령 선거 사상 처음으로 80개 개표구에 대한 재검표가 이루어진다. 대법원(주심 변재승 대법관)은 1월15일 한나라당이 제기한 당선무효소송과 관련해 재검표 신청을 받아들였다. 재검표 결정에 대한 대법원의 설명은 간단하다. 재검표 요구를 기각할 마땅한 사유가 없다는 것이다. 소송의 쟁점인 ‘전자 개표기’의 정확성을 검증할 방법은 수검표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의 개표 과정은 크게 6단계로 나뉘었다. 개함부-개표기 운용부-심사집계부-보고석-위원석-위원장. 개함부는 투표함을 개봉하는 단계다(사진 1). 개표기가 도입되기 전에는 개함부에서 후보자 별로 투표용지를 분류했다. 그러나 개표기 덕분에 개함부에서 개봉된 투표용지는 곧장 개표기 운용부로 넘겨진다.



개표기 운용부에서는 개표기에 투표용지를 무작위로 투입한다(사진 2-1). 투입된 투표용지는 분당 2백20∼2백50장씩 후보 별로 분류된다(사진 2-2). 개표기는 자동 집계 프로그램이 설치된 컴퓨터와 자동 인식기로 이루어져 있다. 투표용지가 개표기에 내장된 스캐너를 지나면서 기표 위치에 따라 서로 다른 포켓으로 분류된다. 스캐닝된 데이터는 컴퓨터 화면에 나타나고 자동으로 집계된다. 그렇다고 모든 표가 분류되는 것은 아니다. 미분류 포켓이 따로 있다. 동시에 두 후보에게 투표하거나, 인주가 엷은 경우, 정가운데에 투표한 경우 등은 모두 미분류 포켓에 담긴다.



“엄격하게 따지면 전자 개표는 없었다”



본래는 이런 미분류 표를 제외하고 자동 집계된 데이터를 개표기에 연결된 컴퓨터를 통해 중앙선관위에 곧바로 전송하려 했다. 전자 개표기를 도입한 취지인 신속성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미분류된 표는 다음 단계에서 집계해 나중에 합산하는 방식이었다. 개표기를 처음 도입했던 지방자치단체 선거 때도 그렇게 했다. 이번에도 선관위는 개표기가 분류하고 집계한 뒤 전송하도록 프로그램을 짜 두었다. 그러나 선거 이틀 전 한나라당이 제동을 걸었다. 미분류 표까지 모두 합산한 뒤 중앙선관위에 전송하자는 한나라당 요구를 받아들여, 전송은 다른 컴퓨터가 하게 했다. 개표기는 분류해 집계만 했고, 선관위는 보고 단계를 부랴부랴 만들었다. 그래서 선관위는 엄격하게 따지면 전자 개표는 없었다고 말한다. 한나라당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전자 개표기가 투표용지 분류기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개표기 운용부에서 후보 별로 100장씩 분류된 표는 심사집계부로 건네진다.
심사집계부에서는 개표기가 표를 제대로 분류했는지 개표 요원이 눈으로 확인한다. 이상이 있으면 계수기로 다시 투표 수를 집계한다(사진 3). 미분류된 표도 이 단계에서 무효표와 후보자별 유효표로 나뉜다. 경기도 안성에서는 바로 이 단계에서 노무현 후보 표 100장 묶음에서 이회창 후보 표 12표가 발견되었다. 개표 요원은 곧바로 한나라당 참관인에게 알리고 시정했다. 이에 대해 선관위 관계자는 “개표기의 오류라기보다 개표 요원들의 실수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개표기 운용부에서 분류한 투표용지는 보통 바구니에 담아 심사집계부로 옮겨진다. 이때 후보자별 표가 섞였거나 미분류 표를 합산하면서 잘못 섞였을 가능성이 있다.



심사집계부를 거치면서 개표 상황표에 무효표를 포함한 모든 득표 수가 기록된다. 개표 상황표 사본은 보고석·기자·정당 참관인에게 배포되고, 정본은 위원석에 전달된다. 보고석에서는 이 상황표에 나와 있는 결과를 중앙선관위 서버에 연결된 컴퓨터에 손으로 쳐서 전송하고(사진 4), 팩스를 통해서도 전송한다. 팩스로 전송된 결과와 컴퓨터에 집계된 결과는 다시 한번 대조 작업을 거친다.



위원석을 거친 개표 상황표에 이상이 없으면 위원장이 개표 결과를 발표한다. 위원장 발표로 개표 절차는 공식으로 마무리된다.
선관위는 개표기가 분류한 것을 두번 세번 검증했고, 팩스나 컴퓨터로 따로 전송해 해킹될 가능성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개표기 수출 기대한 제조업체, 유탄 맞고 속앓이



쟁점이 된 개표기는 한틀시스템이 제작해 SK C&C에 납품했다. 수표나 전표 등 문서를 처리하는 자동인식기를 개량한 것이다. 지난 지방 선거 때 처음 도입했다. 첫 도입 때는 시행착오도 있었다. 투표용지가 2장이 말려들어가 개표기가 정지되거나 개표 요원들이 기계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문제점이 드러났다. 그래서 이번에는 선관위나 SK C&C가 개선책을 마련했다. 투표용지 2장이 한꺼번에 들어가지 않도록 지방 선거 때보다 약간 두텁고, 표면 마찰력을 줄인 용지를 사용했다. 인주는 번지지 않고 빨리 마르는 것으로 교체했다. 개표기도 용지 투입 부분과 스캐너 센서 부분을 손보았다. 선관위 관계자는 “개표기의 정확성은 한나라당 의원들이 더 잘 알 것이다”라고 말했다. 지난 지방 선거 때도 경기도 광주시를 비롯한 세 곳에서 개표기를 믿을 수 없다며 재검표했었다. 재검표 결과 오차는 제로였다. 중앙선관위 관계자는 미분류된 표를 사람이 분류하면서 해석이 달라질 가능성만 인정했다.



소송 당사자는 아니지만, 관련 업계는 울상이다. SK C&C는 대선 이후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이란 등 몇몇 국가와 수출 협상을 벌이고 있는 중에 재검표 결정이 내려져 속앓이를 하고 있다. 정보 기술(IT) 강국답게 SK C&C를 비롯한 국내 업계는 전자 투표 시스템을 완성해 둔 상태다. 세계적으로 전자 투표가 확산 추세여서 시장도 넓다. 지난해 브라질은 100% 전자 투표로 대통령 선거를 치렀고, 미국의 중간선거에서 플로리다 주와 조지아 주 등이 전자 투표를 도입했다. 그러나 수출 전선에 먹구름이 끼었다. “안방에서 불신당하는 제품을 누가 사겠느냐.” SK C&C 관계자는 한숨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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