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상원 북한 인권법안 통과 ‘막전막후’
  • LA·김현정 (통일맞이나성포럼 회장) ()
  • 승인 2004.10.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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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한인 단체, 북한인권법 상원 통과 저지 운동 실패 ‘막전막후’
미국 상원 외교관계위원회에 계류 중이던 북한인권법안(H.R. 4011)이 지난 9월28일 상원 본회의를 전격 통과했다. 이 법안이 앞으로 북·미 관계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해 반대 활동을 벌여온 미주 한인들에게는 실망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7월 말 하원에서 통과된 법안을 약간 수정해 통과된 이번 상원 통과 법안에는 원본의 독소 조항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번 수정안 역시 대량 탈북 유도를 통한 북한 체제 붕괴나, 인권 문제를 이용한 대북 압박 등 원안의 의도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 법안 제101조의 내용은 앞으로 모든 대북 협상에서 북한의 인권 문제를 주요 안건으로 거론하도록 되어 있다. 6자 회담을 비롯한 대북 협상에 커다란 장애물이 생겨난 것이다. 또한 한국이나 미국의 탈북자 지원 단체에 연간 2천만 달러(2005~2008년 회계 연도)를 제공해 남북한과 중국 등 3국 사이에 외교 마찰을 부추기고, 대북 선무 방송 시간 확대를 통한 북한 내부의 교란을 유도하는 등 독소 조항으로 지적되었던 조항들이 그대로 들어 있다.

이라크 침공과 비슷한 시나리오 연출중?

이미 북한이 이에 대해 강력히 반발하고 나섬으로써 그나마 어려움을 겪던 6자 회담 제4차 회의가 물 건너가는 등 악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한 일부에서는 1998년 ‘이라크 해방법’이 통과된 이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이루어졌던 것과 비슷한 시나리오가 연출되는 것 아니냐고 우려하고 있다.

그동안 미주 지역 한인 운동 단체들은 지난 7월 말 북한 인권법안이 하원을 통과한 이후 상원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 모든 역량을 기울여왔다. 특히 워싱턴의 ‘미주동포전국협의회(NAKA)’ ‘자주민주통일연합’과 LA 지역에서는 ‘통일맞이나성포럼’ 등이 주축이 되어 ‘북한인권법안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를 결성해, 민주당 바이든 상원의원 등 상원의원들에 대한 활발한 로비, 법안 내용 분석과 자료 제공 등의 홍보 활동을 통한 반대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미국 연방 상원의 입법 절차상 어떤 법안을 통과시키려면 먼저 관련 소위원회의 심의를 거치게 되어 있다. 이같은 절차를 밟을 경우, 처음에는 북한인권법안이 올해 안에 상원을 통과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되었다. 원래 상원 회기는 12월 말까지이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에는 의원들이 자기 지역구로내려가 선거운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9월 말까지 실질적으로 회기가 끝나게 되어 있다. 그래서 한두 달이라는 짧은 기간 내에 법안을 심의하고 상정해 투표까지 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처럼 정식 절차를 거치지 않을 경우, 즉 소위원회 심의를 거치지 않고 바로 본회의 표결에 부치려면 ‘핫라인(hot line)’이라는 특별 절차를 거쳐야 한다. ‘핫라인’ 상정은 해당 소위원회(인권법안의 경우 외교관계위원회) 소속 의원 중 단 한 사람이라도 반대할 경우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LA 지역 공동대책위원회는 민주당 캘리포니아 주 연방 상원 바바라 박서 의원과 다이앤 파인스타인 의원의 정책 보좌관들과 만나 이 법안이 동북아 정세에 미칠 악영향에 대해 설명했다. 특히 외교관계위원회 소속인 박서 의원에게 핫라인 상정에 반대해줄 것을 호소했다.

박서 의원 및 파인스타인 의원의 보좌관들은, 이미 지난 9월 초 법안 상정자인 공화당 브라운백 상원의원이 핫라인을 시도했으나 민주당 바이든 상원의원의 저지로 무산된 바 있다고 밝혔다. 또한 관례상 핫라인 시도가 한번 무산되면 다시 시도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고 했다. 또한 지금처럼 대통령 선거가 임박한 시점에서 이렇듯 논란이 되고 있는 외교 현안을 서둘러 통과시킬 이유가 없기 때문에 이번 회기 내 본회의 상정은 사실상 불가능(next to zero)하다고 말했다.

LA 지역 인권법안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는 바바라 박서 의원을 직접 접촉해 로비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박서 의원은 북·미 관계에 깊숙이 관여했던 의원은 아니지만 인권 문제에 관심이 매우 많은 의원이다. 다른 민주당 의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라고 알려져 있는 박서 의원은 외교관계위원회에 소속되어 있다. 그래서 그녀에게 이 법안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위험성을 알리는 것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공동대책위에서는 상원 재도전을 염두에 두고 있는 그녀를 위해 지난 9월18일 모금 만찬회를 마련하기도 했다. 박서 의원은 이 자리에서 남북으로 갈라져 수십 년간 생사 확인조차 못하고 있는 이산가족들의 아픔에 깊은 공감을 표시했다. 또한 ‘인간성의 실패’라고 불리는 휴전선의 비인도성을 신속하게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서 의원은 다음 날 LA 근교 패사디나에서 열린 민주당 정책 설명회에 참석했다. 이때 북한인권법안에 대한 견해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존중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기본 윈칙에는 동의하지만, 북한인권법이 몰고 올 파장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아직 분명한 입장을 밝힐 상황은 아니지만 공화당이 설명하는 것처럼, 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상적인 해법인지는 의문이다”라며 조심스런 비판론을 제기했다. 이 법안의 통과를 저지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행동이 필요한 상황이 된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2004년 9월20일자. 미주판 중앙일보).

그러나 그녀가 워싱턴으로 돌아간 뒤 1주일 만에 이 법안이 전격적으로 본회의를 통과해버린 것이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두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하나는 통과가 확실시되는 공화당측 주요예산법안(Appropriation Bill)에 이 법안을 덧붙여 은근슬쩍 통과시키는 방법, 또 하나는 공화당이 민주당에 타협안을 제시해 통과시키는 방법이다.

이번 인권법안 통과는 두 번째 경우에 해당한다. 사실 인권법안이 통과되기 약 1~2주 전부터 공화당 브라운백 의원과 민주당 사이에 이 법안을 수정해 통과시키려는 논의가 있었다고 한다. 클린턴 행정부 시절 외교관계위원회에서 활동해 대북 포용정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바이든 의원조차도 표면적으로나마 ‘인권 개선’을 주장하는 법안에 반대 의사를 고수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바이든 의원과 박서 의원이 뒤늦게 인권법안의 해악성에 대해 뜻을 같이 했다 하더라도, 법안을 일부 수정하면서까지 관철 의사를 밝히는 공화당에 끝까지 맞서기에는 정치적 한계가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인권 문제라면 민감하게 반응하는 미국인의 속성을 감안할 때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미국 정치인들의 한계를 새삼 드러낸 일이기도 하다.

미국 행정부가 앞으로 북한인권법을 어떻게 이용할지는 다음 대통령에 누가 당선되는가도 큰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번 인권법안으로 불이 붙은 대북 정책 논쟁이 동북아 평화와 안정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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