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중심으로 간 ‘소시민’ 유시민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3.05.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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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식 선거운동으로 열세 딛고 ‘덕양 갑 승리’ 쟁취…정계 개편 선봉 나설 듯
‘포악한 권력에 대한 동경은 가져본 적이 없는 천성적인 소시민’. 고양시 덕양 갑 재선거에 출마한 유시민 후보(43)가 몇년 전 펴낸 책에서 자신을 소개한 구절이다. 그랬던 그가 돌연 권력을 거머쥐었다. 지난 4월24일 유후보는 강력한 경쟁 후보였던 한나라당 이국헌 후보를 4.2% 포인트 차로 물리치고 국회에 입성하는 데 성공했다. 소시민을 자처하던 이가 생뚱맞게도 권력을 꿰어찼다면 그 이유는 둘 중 하나일 터. 권력을 동경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척 내숭을 떨었거나, 그렇지 않으면 작금의 권력이 그가 표현한 포악한 권력이 아니어서일 것이다.

그가 살아온 이력으로 보아 이유는 아무래도 후자 쪽인 것으로 보인다. ‘불온한 자유주의자’. 유시민씨의 전매 특허처럼 되어 버린 이 호칭대로 유씨는 자유주의자이자 아웃사이더로 지난 세월을 살아 왔다. 서울대 78학번. 대학에 두 번 입학해 두 번 제적된 경력을 갖고 있는 골수 운동권 출신. 그렇지만 그에게 총학생회장이니 무슨무슨 투쟁위원장 따위 폼 나는 직함은 없다. 집시법·국가보안법 위반 경력 같은 ‘훈장’도 없다. 대신 그는 1984년 이른바 서울대 학원 프락치 사건에 연루되는 바람에 생긴 폭력 전과를 하나 갖고 있다.

이 사건으로 감방에 있으면서 쓴, 저 유명한 ‘항소 이유서’ 때문에 전업 글쟁이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는 그는, 사회에 나온 뒤 프리랜서 논객·소설가·방송 작가·시사 토론 프로그램 사회자 등으로 전천후 활약을 하며 한국 사회의 주류 이데올로기를 좌충우돌 치받아 왔다. 지금의 10∼20대에게 그는 세상 보는 눈을 뜨게 해준 ‘정신적 사부’이기도 하다. 유씨 스스로는 ‘무식해서 용감하게 쓴’ 책이라고 고백하지만, 그가 1988년 펴낸 <거꾸로 읽는 세계사>(푸른나무)는 지난 15년간 50만권 가까이 팔려 나가며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스테디 셀러로 자리 잡았다. 푸른나무 대표 유동헌씨는 “386세대의 의식화 바이블이 리영희 교수(한양대)의 <전환 시대의 논리>였다면 이른바 전교조 이후 세대의 바이블은 <거꾸로 읽는 세계사>였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씨는 그를 일찍이 ‘햄릿형 소신’을 지닌 인물이라고 평한 바 있다 (<남자 대 남자>). 햄릿처럼 우유부단하다는 뜻에서가 아니다. ‘일사불란주의’나 ‘국론통일주의’를 혐오하는 것, 특정 ‘소신’이나 ‘주의’를 강요하는 일체의 정치적 억압에 반대하며 ‘나의 정치적 반대자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내던질 수 있는 것, 이것이 정씨가 말하는 자유주의자 유시민의 햄릿형 소신이었다.

단 간과해서 안될 것은 그가 자유주의자이되 ‘불온한’ 자유주의자라는 사실이다. 그는 늘 ‘다른 세상’을 꿈꾸어 왔고, 급기야는 이를 위해 자신의 인생 행로를 180° 바꾸었다. 지난해 8월, 민주당 내부의 후보 교체 주장에 분노한 그가 절필을 선언하면서 노무현 지키기에 나섰을 때 이미 ‘남에게 신세지지 않고 아무 것도 남기지 않은 채 자취 없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꿈꾸었던 그의 사적 소망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노무현 시대, 개혁 완성을 위해서는 의회를 갈아엎는 것이 필수라고 간파한 그는 개혁당이라는 새롭고 혁신적인 정치 실험체를 통해 기성 선거에 도전했고, 그 결과 43.3%라는 유권자의 신세를 지며 차세대 정치인으로 우뚝 서는 데 성공했다. 사실 이번 재·보선에서 그가 거둔 승리는 ‘기적 같은 승리’라 할 만하다. 그를 연합 공천한 민주당이나, 여론조사 전문 기관 모두 25.6%라는 열악한 투표율에서 그가 승리를 거두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36쪽 상자 기사 참조). 이번 선거에서 승부를 가를 것으로 꼽힌 세 가지 변수, 곧 투표율·조직력·호남 표심 모두에서 그는 총체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도 유시민 후보는 이를 극복했다. 리서치앤리서치 노규형 대표는, ‘노무현 바람’으로 점화한 한국 사회의 변화 욕구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이번 덕양 갑 재선거가 의미를 갖는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유씨는 본인이 노무현 개혁의 전도사임을 공공연히 천명하는 동시에 지난해 노대통령이 선보인 선거운동 방식을 계승·발전시켰다. 우선은 3김식 정치 행태 극복이 그가 내세운 첫 번째 원칙이었다. “돈으로 움직이는 기성 피라미드형 조직은 꾸릴 능력도, 생각도 없다”라고 그는 공언했다. 대신 그가 선택한 것은 이른바 자발적인 네트워크형 조직이었다. 그는 전국의 개혁당원과 지지자들을 온라인·오프라인 자원 봉사자로 조직화하는 한편 각자 덕양 갑에 사는 연고자를 찾아 후보를 알리고 지지를 호소한다는 기발한 방식의 선거운동을 선보였다.

유권자들의 감성을 공략하는 것도 노사모로부터 계승한 방식이었다. 선거 기간에 유시민 후보 선대본부 사무실 벽에는 ‘감동을 끌어내는 것이 살 길이다’라는 구호가 걸려 있었다. 실제로 그는 자기가 당선되면 다리를 새로 놓겠다는 식의 거창한 건설 공약 대신 ‘고양시를 유모차를 끌고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곳으로 만들겠다’는 식의 생활 공약을 내놓았고, 이것이 젊은 유권자층에 상당 부분 먹혀들었다.

무엇보다 그가 철저하게 고집한 원칙은 지역주의와의 단절이었다. 그러나 이를 실천하는 것은 별개 문제였다. 이번 선거를 마친 뒤 그는 “정치인들이 무엇 때문에 지역 구도에 묶이게 되는지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라고 토로했다. 실제로 PK 출신이면서 민주당 대선 후보로 나와 호남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노대통령과 달리 TK 출신이면서 민주당·개혁당 연합 공천 후보였던 그의 입지는 가파르기 짝이 없었다.

덕양 갑 유권자의 출신 지역별 분포는 호남 28%, 충청 18%, 영남 10%. 그러나 선거 기간에 불거진 호남소외론으로 호남 민심이 예전 같지 않았다. “자체 조사 결과를 분석해 보면 이번 선거 기간 내내 호남 표 결집력이 현저하게 약해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라고 유기홍 개혁당 정책위원장은 말했다.

더욱이 개혁당이 선거 이전에 툭하면 민주당을 ‘사라져야 할 정당’이라고 공격한 탓에 이 지역 호남민들 사이에는 ‘유시민이 당선되면 민주당이 사라진다’는 말도 나돌았다. 여기에다 민주당이 후보를 내지 않은 데 대한 반발까지 겹치면서 이 지역 민주당 공조직은 ‘동작 그만’ 상태나 다름없었다. 정동영 신기남 천정배 임종석 김희선 같은 민주당 신주류 의원들이 연일 이 지역을 찾아 대대적인 ‘고공 지원’을 벌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밑바닥 지원은 극히 미미했다.

그런데도 그는 이 모든 악조건을 딛고 승리를 이루어냈다. 물론 이것만으로 개혁당의 정치 실험이 성공했는지 여부를 속단하기는 이르다. 지역 토박이인 문기수씨(8.0%)가 선전하며 경쟁 후보인 이국헌씨의 표를 갉아먹은 덕에 어부지리를 얻는 등 그의 당선에는 운도 상당 부분 따랐다. 더욱이 개혁당은 덕양 갑에서 승리한 대신 단일 후보를 낸 의정부 지역에서 민노당(4.6%)에도 못미치는 저조한 득표율(3.2%)을 기록함으로써 당의 독자적인 생존 능력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대해 유당선자는 민주당이 후보를 냈으면 자기 또한 패했을 것이라고 개혁당의 현실적인 한계를 분명하게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그와 김원웅 개혁당 대표는 선거 다음날 범개혁 세력 단일 정당을 제안하는 기자회견을 자청함으로써 정계 개편의 화톳불을 지폈다. 민주당은 물론 한나라당과 정치권 외부의 개혁적 인사들까지 모두 참여하는 정책 정당을 만들자는 것이 이들의 제안이었다. 아직까지는 ‘물정 모르는 소리’라는 것이 기성 정치권의 대체적인 반응이지만, 그들도 본능적으로 안다. 행정 권력에 이어 의회 권력을 접수하려는 개혁 게릴라들의 대대적인 공세가 바야흐로 시작되었음을. 그 선봉에 유시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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