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협의 밤'에 터져나온 386의 고민
  • 김은남 (ken@sisapress.com)
  • 승인 2003.08.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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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협의 밤’ 현장 중계/신랄한 자아 비판 속 “10년내 주류·세대 교체” 자신
“여러분이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부담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여러분께 한마디를 거들고 싶습니다. ‘책임져!’라고.” 김근태 의원(민주당)의 축사가 비디오로 상영되는 동안 장내에는 침묵이 흘렀다. 대통령을 개구리에 빗댄 한 야당 당직자의 농담이 일파만파를 부르기도 했지만, 최근 대통령과 더불어 동네북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대표적 집단이 386이다. 새 정권 출범 이후 이들 386은 아마추어리즘·배타성·사상적 편향 따위를 이유로 여론의 뭇매를 맞아 왔다. 이들을 때리는 데는 여야, 보수·진보의 구분이 따로 없었다.

특정 세대를 겨냥한 이 유례 없는 ‘집단 따돌림’의 와중에 이들이 다시 뭉쳤다. 8월23∼24일 대전 유성유스호스텔에는 과거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1987∼1992년)에 몸 담았던 간부·회원 1백20여 명이 모여들었다. 전대협동우회가 주관하는 ‘제12차 전대협의 밤’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이 날 모임에는 오영식 민주당 의원과 임수경씨를 비롯해 이인영·정명수·우상호 씨 등 과거 전대협을 이끌었던 낯익은 얼굴들이 눈에 띄었다.
출범한 지 17년째. 그간 전대협 출신들은 매년 한 차례씩 전대협의 밤 행사를 열어 친목을 다져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의미가 남달랐다. 무엇보다 올해는 386으로 대표되는 전대협 세대가 한국 사회의 주류로 진입한 원년이라 할 수 있다. 386 참모들의 청와대 대거 입성은 이를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들은 현재 17대 총선이라는 절체절명의 승부처를 눈앞에 두고 있다. 현역 의원 2명(임종석·오영식), 이인영·우상호 등 원외 지구당위원장 6∼8명을 비롯해 내년 총선에 도전할 전대협 출신만도 30명 선에 이른다.

그러나 이들이 처한 상황은 좋지 않다. 김근태 의원이 지적한 대로 당사자들로서야 억울한 측면이 있겠지만 386을 바라보는 일반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하다(22쪽 상자 기사 참조). 이유가 무엇인가. 이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 전대협동우회가 이번 행사 도중 사상 최초로 회원간 난상 토론회(‘전대협, 그 살아 있는 역사를 위하여’)를 마련한 배경에는 이같은 고민이 깔려 있었다.

난상 토론에서는 신랄한 자아 비판이 쏟아졌다. 무엇보다 전대협 출신들의 왜곡된 정치 지향성이 도마에 올랐다. 경북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안영민씨(<민족21> 기자)는 전대협이 과거의 이름을 팔고 있는 것은 아니냐며, 역대 간부들이 전대협을 정계 진출의 발판으로 이용해온 듯한 행태를 비판했다. 박홍근 한국청년연합회 대표는 전대협 출신들이 개혁당이나 민주노동당보다 기성 정당 쪽으로 주로 몰려간 것을 지적했다. 민주당에 몸 담은 전대협 출신들이 신당 추진 과정에서 기득권에 집착하는 구 정치인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것도 일부 회원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수배자 신분으로 토론회에 참석한 한총련 ‘후배’들도 전대협을 매섭게 몰아붙였다. 한총련 문제의 뿌리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을 전대협이 문제 해결에 앞장서기는커녕 보수 집단의 한총련 죽이기에 보조를 맞추고 있다는 것이었다. 올해로 10년째 수배 중이라는 강 아무개씨는, 최근 발생한 미군부대 진입 사건을 놓고 전대협 출신 정치인들이 한총련을 일제히 비난한 데 대해 “이해는 하지만 불만이 많다. 선배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조선일보>의 사설이 되는 현실이 곤혹스럽다”라고 꼬집었다.

이같은 비판에 대해 오영식 의원은 ‘참여 속의 개혁’이라는 전대협 세대 특유의 정체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항변했다. 전대협 세대가 1987년 6월항쟁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둔 것은 대중과 호흡했기 때문이었다. 과격한 이상에 치우친 선배 세대와 달리 이들은 대중과 눈높이를 맞추며 대중이 원하는 바를 대변했다. 하지만 여차하면 기회주의 내지는 대중추수주의로 전락할 함정도 안고 있었다. 그럼에도 1987년 이래 오늘날까지 여전히 유효한 대의, 곧 민주대연합 구축이라는 대의를 위해서는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늘 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 과정에서 386이 일시적으로는 비난을 받았겠지만 앞으로 10년 안에는 한국 사회의 주류 교체·세대 교체가 완결될 것이라고 이인영씨(민주당 구로 갑 지구당위원장)는 자신했다. 그런 의미에서 내년 총선은 56년간 의회 권력을 장악해 온 수구 기득권 세력과 개혁 세력이 겨루는 최후의 결전이 되리라는 것이다. ‘우리가 나서면 세상이 바뀐다’며 떼로 나서겠다고 선언한 이 ‘전대협의 아이들’ 때문에 기성 정치권은 이래저래 애 좀 먹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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