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단체 ‘3차 봉기’ 깃발 올리다
  • 김은남 (ken@sisapress.com)
  • 승인 2003.09.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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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자 1천인 ‘정치 주체화’ 선언… 신당 창당까지 나아갈지 논란 ‘분분’
한국 시민운동사는 2003년 9월8일을 제3차 봉기의 날로 기록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최 열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이학영 YMCA전국연맹 사무총장·황인성 통일재단 사무총장·이오경숙 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 등 각계 인사 1천13명은 이 날 서울 프레스센터에 모여 ‘정치 개혁과 새로운 정치 주체 형성을 촉구하는 시민사회 1천인 선언’을 발표했다. 이들의 선언은 한마디로 이렇게 요약된다. “더 이상 기성 정치권의 들러리를 서지는 않겠다. 이제, 우리가 주체가 된다.”

한국 시민 사회가 일으킨 1차 봉기는 1987년 6월항쟁이었다.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거치며 성숙한 시민 사회의 에너지가 6월항쟁으로 폭발했지만 결과는 미완의 혁명으로 끝났다. 2차 봉기는 2000년 낙천·낙선 운동으로 재점화했다. 당시 시민운동권은 낙선 대상자로 점찍은 86명 중 59명을 낙선시키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 또한 성공한 혁명이 되지는 못했다. 전체 지역구 후보의 4분의 1이 물갈이되었는데도 한국 정치는 거의 바뀌지 않았다.

시민운동 진영이 근본적인 고민에 빠진 것은 이 때부터이다. 이어 등장한 노무현 정부는 이들의 고민을 더 심하게 만들었다. ‘보수적인 정치 체제에서 탄생할 수 있는 최상의 개혁 정권’이 출범했는데도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지지부진한 정치 개혁만 문제가 아니었다. “현정부 출범 이후 시민 사회는 사실상 연거푸 ‘배신’을 당해 왔다”라고 서형원씨(녹색정치준비모임 간사)는 주장한다. 새 정부가 이라크 파병, 새만금 간척 사업 강행, 핵폐기장 부지 지정 따위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시민 사회가 지향했던 평화·환경·분권 및 자치라는 가치를 심하게 훼손했다는 것이다. “신당을 주장하는 정치인들이 또다시 개혁을 부르짖고 있지만 이런 식의 몰가치적 개혁이 되풀이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라는 것이 서씨의 말이다.

시민 사회 내부도 변화 요구에 직면해 있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대로 2000년 낙천·낙선 운동은 시민운동의 힘을 최대치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후 노사모·개혁당 같은 세력이 등장하면서 시민단체는 새로운 시련에 봉착했다. 한 활동가는 “이미 정당을 만들고 대통령을 배출하는 고도의 정치 행위를 경험한 ‘개미’들이 시민단체라는 우회로를 더 이상 선택하려 하겠느냐”라고 반문했다. 사회 전반의 보수화 또한 시민단체에게는 위협이 되었다. 학생운동이 쇠퇴하면서 시민단체로 유입되는 인적 자원이 줄어들고, 이대로 가면 한국도 ‘노령화하고 각자 갇힌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일본 시민운동의 전철을 밟게 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팽배했다.

지역 활동가·여성단체 절박한 문제 의식 반영

시민단체가 정치에 뛰어들겠다고 나선 데에는 이런 이유들이 복합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단 이들이 처음부터 ‘독자적인 정치 세력화’를 주장한 것은 아니다. 지난 6월 말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연수원에서 ‘제17대 총선 대응 방향’을 위한 워크숍이 처음 열렸을 때만 해도, 시민단체들은 내년에는 낙천·낙선 운동 식의 부정형 운동 대신 노사모 식의 긍정형 운동이 필요할 것이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래서 제안된 것이 특정 후보 지지 및 당선 운동, 시민 후보 출마 운동이었다.

그런데 7∼8월에 토론 모임을 네 차례 거듭하면서 분위기가 급반전했다. “무엇보다 지역 활동가들의 절박한 문제 의식이 우리를 각성시켰다”라고 김상희 한국여성민우회 공동대표는 말한다. 특히 한나라당·민주당 일색인 지역 정당에서 탈피하는 데 사활을 걸고 있던 영·호남 지역 활동가들은 ‘시민단체가 소극적 역할에 머물러서는 지역 구도가 결코 깨지지 않는다’고 일침을 가했다.

여성단체 또한 전례 없는 고민에 휩싸여 있었다. 내년 총선에서 여성의 정치 참여가 비약적으로 확대될 것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여야는 모두 국회의원 비례 대표의 50%를 여성에게 할당한다는 정치 개혁안을 공언하고 있다). 그렇지만 ‘기성 정치권에 한 개인으로 영입되어 금배지를 다는 것이 정치 개혁에 과연 도움이 될 것인가’라는 회의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고 김상희 대표는 말한다.

이는 민주당 신당파나 개혁신당 추진파로부터 ‘러브 콜’을 받고 있는 다른 시민단체 지도자들도 공유하는 고민이었다. 1987년 이후 김근태 이부영 이재오 등 재야 운동권 출신이 정계에 줄이어 입문했지만 결국 정치 개혁도 제대로 못하고 그 바닥의 주류가 되지도 못한 것을 이들은 목격해 왔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또다시 기성 정치권을 위한 ‘개혁의 데커레이션’ 노릇을 할 것인가. 이들은 반문했고 그럴 수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들이 정치 주체화를 선언한 지금, 이들의 ‘모험’이 성공할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다. 무엇보다 시민단체의 정치 참여를 일반 국민이 곱게 볼지가 관건이다. <시사저널>이 지난 3월 벌인 ‘시민단체 활동가 여론조사’에 따르면, 시민단체의 정당 창당을 지지한다는 활동가가 절반(53.5%)을 넘어섰다. 그러나 외부의 시각은 다르다. 안병욱 교수(가톨릭대)의 말마따나, 시민단체 정치 세력화의 가장 큰 적은 ‘네 놈들도 결국 정치 하려고 그랬느냐’는 시민 일반의 정치 냉소주의일지도 모른다.

시민 사회 내부에서도 찬반이 엇갈린다. “시민운동가가 정치에 직접 참여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시민운동이 아니라 정치다”라고 하승창 함께하는시민행동 사무처장은 말했다. 시민단체의 섣부른 정치 참여가 불러올 ‘제2의 서경석 쇼크’를 걱정하는 시각도 있다. 토론 과정에 계속 참여했던 박원순 변호사(전 참여연대 상임집행위원장)가 1천인 선언에 끝내 불참한 것은 시민 사회 내부의 이같은 미묘한 속사정을 보여준다.

정치 냉소주의·의견 불일치가 ‘최대의 적’

더욱이 정치 참여를 촉구한 1천인 내부에서조차 앞날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하다. 시민 사회가 진정한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시민 정당(가칭) 형태의 신당을 창당해야 하며, 기성 정치권과 연대할 경우 과거와 달리 쓸 만한 정치인을 시민 사회가 ‘역수혈’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지만, 이를 위해 앞장서는 사람이 없다. “오늘날 시민단체 활동가라면 사회적 존경과 명예를 보장받는다. 이런 길을 놔두고 진흙탕 한복판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것인지, 혼란스럽다”라고 한 시민단체 지도자는 말했다.

그렇지만 9월 중 지역별 토론회를 열고 국민 여론을 조사해 신당 창당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도출될 경우 조만간 ‘실존적 결단’을 내릴 사람들이 나올 것이라고 최 열 대표는 자신했다(“최 열 환경운동연합 대표“ 인터뷰 기사 참조). 여기에는 낙천·낙선 운동에 앞장섰던 시민단체 지도자 외에 법조계·학계·보건의료계·문화예술계에서 활동해 온 전문가 그룹도 포함된다고 한다.

시민 사회가 주도하는 신당이 탄생할 경우 내년 총선에서 승산이 충분하다는 것이, 1천인 선언에 간여한 한 활동가의 낙관이다. 그에 따르면, 일반 국민의 50% 이상이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고 대답하는 것은, 이미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회복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가 도입되고 한국인 특유의 정치적 역동성이 발휘되면 의석의 20% 이상을 시민 정당이 석권하는 ‘세계사적 사건’이 일어나지 말라는 보장도 없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과연 유럽 녹색당의 신화가 재현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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