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삼재의 입,정치권 태풍 불러올까
  • 소종섭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3.09.30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선거 때 유용한 ‘안기부 자금’ 1천1백97억원의 주인과 전달자를 밝힐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9월25일 11시,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729호 한나라당 강삼재 의원 방. 전날 지역구인 경남 마산에서 의원직 사퇴와 정계 은퇴를 선언한 강의원이 그 방에 30분간 머무르다가 의원직사퇴서에 사인을 하고 떠났다. 이후 강의원의 행적은 알려진 것이 없다. 측근들에 따르면, 며칠 쉬겠다며 자동차를 몰고 어디론가 떠났다고 한다.

강의원의 정계 은퇴는, 김영삼 정권 시절 안기부(국정원 전신) 운영차장을 지낸 김기섭씨가 안기부 자금 1천1백97억원을 유용해 1995년 지방 선거와 1996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이 사용토록 했다는 이른바 ‘안기부 자금 유용 의혹 사건’ 1심 재판이 끝난 데 따른 것이다. 안기부 자금 유용 의혹은 2000년 5월, 경부고속철도 로비 자금을 수사하던 검찰이 황명수 전 의원의 계좌를 추적하다가 안기부 계좌에서 신한국당으로 뭉칫돈이 이동한 것을 발견한 사실이 2000년 10월 언론에 보도되면서 불거졌다.

서울지방법원 형사 24부(재판장 이대경)는 9월23일 “강삼재 의원 등은 안기부 예산을 특수활동비 명목으로 인출해 차명 계좌에 넣어 세탁한 뒤 1996년 신한국당 총선 때 선거 자금으로 사용한 점이 인정된다”라고 판결했다. 강의원에게는 징역 4년에 추징금 7백31억원, 김씨에게는 징역 5년에 자격정지 2년 그리고 추징금 1백25억원을 내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2001년 1월 기소되었으니 2년8개월 만에 1심 판결이 내려진 셈이다. 강의원은 9월 초, 1심 판결이 나오면 의원 직을 사퇴하는 것이 좋겠다는 측근의 건의를 받고 “그것 가지고 되겠나…”라며 진작부터 정계를 은퇴할 각오를 다진 것으로 알려졌다.
강의원은 여의도를 떠났지만 ‘안기부 자금’의 성격과 전달자를 놓고 물밑에서는 여전히 논란이 한창이다. 이 돈이 국가 예산인가, 아니면 김영삼 전 대통령의 대선 잔금인가가 논란의 핵심이다. 과연 누가 이 돈을 강의원에게 건넸는가 하는 점도 주목되는 부분이다.

먼저 돈의 성격부터 살펴보자. 정가의 대체적인 분위기는 김영삼 전 대통령(YS)의 대선 잔금이라는 쪽에 무게를 둔다. 집권 초 기업으로부터 정치 자금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금융실명제를 실시한 YS가 국가 예산을 빼내 선거에 썼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는 “당 밖에 있는 인사 5∼6명이 진실을 알고 있다. 이들이 밝혀야 한다”라고 말했고, 김기섭씨와 고교 선후배 관계로 김씨의 변호를 맡았던 홍준표 의원은 한 발짝 더 나아가 “YS의 고백이 필요하다”라고 상도동을 압박했다. 김대중 정부의 초대 국정원장을 지낸 이종찬씨도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30쪽 인터뷰 기사 참조).

YS 본인의 언급도 주목된다. <월간 조선> 2001년 2월호에 보도된 인터뷰에서 YS는 이렇게 말했다. “1992년 대선 때 상당히 많은 돈이 들어왔다. 그때 남은 것 가지고도 충분한데 무엇 때문에 안기부 돈을 받느냐.” YS는 2001년 1월28일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와 상도동 자택에서 만났을 때도 “그 돈이 안기부 돈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검찰은 다르다. 안기부 돈이라고 본다. 안기부가 관리하던 계좌에서 돈이 빠져나갔고, 돈의 뿌리가 한국은행이 발행한 예산 전용 국고 수표라는 점, 당사자인 김기섭씨가 안기부 돈을 유용했다고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씨는 “원활한 국정 수행을 위해서는 원내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는 것이 필수라는 생각에서 독자적으로 판단해 안기부 예산을 선거 자금으로 지원했다”라고 진술했다.

강의원 변호를 맡고 있는 한나라당 이주영 의원은 계좌를 추적하면 돈의 성격이 금방 드러날 것이라고 말한다. 안기부 계좌에서 돈이 빠져나왔다고 해서 모두 국가 예산이 아니고, YS의 대선 잔금이 안기부 계좌를 통해 세탁된 뒤 신한국당으로 흘러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보기관의 자금에 대해 계좌 추적을 한 전례는 없다.

이와 관련해 국정원은 2001년 10월11일 재판부에 <안기부 예산 횡령 사건 관련 의견 제출>이라는 제목의 공문을 보낸 것으로 밝혀졌다. <시사저널>이 입수한 이 비공개 문건에서 국정원은 ‘국가 정보기관의 예산 운용 내역은 전세계 모든 국가에서 국가 기밀로 취급되고 있으며, 그 내용이 공개될 경우 정보기관의 조직과 활동이 드러나게 되어 정보기관의 역량이 저하되고 국가 안보에 위험이 초래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주영 의원은 “엄밀하게 보면 재판의 이해 당사자로 볼 수 없는 국정원이 이런 공문을 재판부에 보낸 것은 계좌 추적을 하지 말라는 일종의 협박으로 볼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한나라당이 이 돈의 성격을 밝히라고 YS를압박하는 이유는 크게 보아 두 가지이다. 홍준표 의원은 “(총선을 앞두고) 우리 당 국회의원들이 국가 예산을 횡령했다는 누명은 벗어야 하지 않느냐”라고 말한다. 정말로 예산을 횡령했다면 연수원이나 당사를 팔아서라도 갚아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책임 있는 사람들이 진실을 밝힐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현실적인 고민도 있다. 2001년 1월22일 법무부는 한나라당과 강삼재 의원·김기섭씨를 상대로 ‘불법 전용된 안기부 예산을 국가에 돌려 달라’는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서울지방법원에 냈다. 한나라당이 신한국당의 재산을 승계했으니 한나라당도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형사 소송에서 유죄가 인정되면 민사 소송에서도 유죄를 인정하는 것이 보통이어서, 지금 대로라면 이 재판에서 한나라당이 패소할 가능성이 있다.

강의원이나 김씨는 현재 돈의 전달 경로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있지만, ‘제3의 인물’이 관련되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김씨는 “거액을 인출하면 불안해서 그 날, 혹은 그 다음날 반드시 전달했다”라고 진술했다.

그러나 검찰 수사에 따르면, 대부분의 돈은 안기부 계좌에서 인출된 뒤 수개월, 길게는 1년2개월이 지나서야 신한국당에 입금되었다. ‘제3자’가 김씨로부터 돈을 건네받아 가지고 있다가 강의원에게 전달했다는 정황인 것이다. 강의원이 “돈을 받은 시점에서 김씨를 만난 적이 없으며, 그 돈은 안기부 자금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것도 제3의 인물이 존재함을 시사한다.

정치권에서는 YS가 돈의 성격이나 지원 경로를 알고는 있었겠지만, 그가 직접 강의원에게 돈을 전달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집권 이후 유난히 돈에 초연한 자세를 보였던 그가 이런 일에 직접 나섰을 것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눈길을 끄는 것이 김현철씨이다. 김기섭씨가 진작부터 현철씨의 측근으로 통했고, 신라호텔 상무로 있던 경리 전문가 김씨가 안기부로 갈 수 있었던 배경에 현철씨가 있었다는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이다. 한보 사건 때 현철씨가 관리하던 70억원이 안기부 계좌를 통해 세탁된 사실이 드러난 적도 있다. 현철씨의 한 측근은 이런 관측에 대해 “현철씨는 김기섭씨와 강삼재 의원을 연결하거나, 안기부의 자금 집행 내역을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제3자가 누구인지 우리도 빨리 밝혀지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주목되는 것은 강의원의 ‘입’이다. 강의원의 한 측근은 그가 정계 은퇴를 선언한 것은 상도동에 일정한 메시지를 던진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 나돌던 ‘강삼재-상도동 갈등설’을 떠올리게 하는 언급이다. 이 측근은, 강의원이 가진 것이 없으니 무서울 것이 없다며, 누구로부터 어떤 상황에서 얼마를 받았는지 재판 과정에서 밝힐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만약 ‘자연인 강삼재’의 입이 내년 총선 전에 열린다면 정치권은 또 다른 소용돌이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