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들,돈 주고 몸 버리고 ''벌벌''
  • 장영희 mtview@sisapress.com ()
  • 승인 2003.1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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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들, 정치 자금 수사에 전전긍긍…외국인 투자자·노조의 ‘응징’도 걱정
‘드디어 올 것이 왔다.’ 검찰의 정치 자금 수사가 SK 외 기업으로 확대되자 재계는 극도로 긴장하고 있다. 재계는 서초동 검찰 청사 쪽으로 안테나를 높이 세운 채 사태가 어떻게 흘러갈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삼성 LG 현대자동차 롯데 두산 풍산 등 정치권에 의해 이름이 ‘까발려진’ 기업들은 합법적인 지원임을 강조하면서도 내심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11월2일 노무현 대통령의 ‘사면론’에 대해서도 기대 반 걱정 반의 엇갈린 정서를 내비치고 있다. 재계는 정치 자금 관련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자는 노대통령의 주장을 지지하고 있다. 또 일반 정치 자금이나 보험성 정치 자금을 준 기업이라면 사면을 제의하겠다는 것에도 솔깃해 한다. 그러면서도, 재계는 극도로 날이 서 있다.

‘돈 뺏긴 것도 억울한데 뺨까지 맞는 기가 찰 형국’이라는 정치 자금 제공 기업들의 항변이 사실이라면, 명백히 피해자인데도 가해자 못지 않게 불안에 떠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선 기업들이 정당에 낸 합법적인 후원금은 문제될 것이 없다. 한나라당은 지난해 삼성 LG 현대자동차 SK 롯데 등 5대 그룹으로부터 모두 81억원을 지원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LG가 30억원으로 가장 많았으며, 삼성과 롯데는 각각 20억원, SK 8억원, 현대자동차가 3억원을 낸 것으로 전해졌다. 한나라당은 대선을 앞두고 후원회를 두 차례 열어, 2백억원 가까운 돈을 모았다고 한다.

노무현 후보 선거대책본부가 지난해 5대 그룹으로부터 받은 후원금은 72억원인 것으로 전해졌다. SK가 25억원으로 가장 많았으며, LG 20억원, 삼성·현대자동차 각각 10억원, 롯데 7억원이다. 또 다섯 기업 외에 다른 기업으로부터 38억원을 제공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불법 정치 자금이다. ‘SK가 현금 1억원을 쇼핑백에 담아 지하 주차장에서 극비리에 전달한’ 돈 같은 비정상적인 돈의 흐름을 얼마나 파헤치느냐가 이번 수사의 관건이다. 사실 재벌 기업들이 대선을 앞두고 과연 공식 후원회에만 돈을 제공했겠느냐는 주장은 재계나 정치권에서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다.

SK가 한나라당에 100억원 ‘뜯긴’ 사연

한나라당 이재현 전 재정국장의 영장을 보면 검찰 역시 이런 의심을 하고 있는 듯하다. 영장에 따르면, 최돈웅 의원이 다른 대기업의 고위 책임자와도 대선 운동 기간에 수 차례 전화 통화한 점에 비추어 한나라당 관계자들이 SK 외 다른 대기업에서도 거액의 대선 자금을 지원받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또 재정위원장실에 있었던 현금을 추산해볼 때 SK 100억원과 당비 30억원 이외에 ‘다른 불법 자금을 함께 관리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고 적시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SK가 100억원이라는 막대한 돈을 한나라당에 ‘뜯긴’ 것도 사연이 있다고 한 재계 관계자는 귀띔한다. 그는 “SK가 김대중 정부 시절 민주당에 후원금을 무려 1백40억원이나 냈으면서도, 한나라당에는 지난해 고작 8억원을 후원한 것이 한나라당 지도부의 심기를 몹시 거슬렀다”라고 말했다. 한나라당 한 관계자의 말도 이 주장에 설득력을 보탠다. “(SK 후원금이) 당의 기대에 크게 못미쳐 거액 지원을 요구한 것으로 알고 있다.”

삼성이 노후보측에 낸 10억원도 구설에 오르고 있다. 검찰은 10억원 가운데 전·현직 계열사 사장 3명의 명의로 제공된 3억원은 편법일 소지가 크다고 본다. 삼성측 해명에 따르면, 법인 한도가 다 차 3억원을 개인 명의로 제공했으며, 이들이 자발적으로 ‘한국 정치 발전을 위해’ 후원했다는 것이다. 이 3억원이 명의자의 돈인지, 회사 돈(비자금)인지를
규명하는 것이 관건이다. 회사 돈이라면 명의만 빌린 것이기 때문에 정치자금법 위반이다.
삼성이 지난해 12월 초 후원금을 줄 당시 법인 한도가 7억원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도 흥미롭다. 한 재계 관계자는 “삼성은 공식적으로 정치 자금을 줄 수 있는 법인이 적어도 20개는 넘으므로 50억원 가량을 합법적으로 지원할 수 있다”라며, 알려진 후원금 액수보다 더 많은 돈을 한나라당에 주었으리라는 의혹을 제기한다.
열린우리당의 한 의원도 이런 의혹을 뒷받침한다. 재벌 기업들이 민주당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시점은 후보 단일화(11월25일) 이후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그동안 수 차례 지원 요구를 귓등으로도 안 듣던 기업들이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2월이 넘어서다.

통상 대선이 있는 해에는 전경련 차원에서 ‘기업 규모에 따라 얼마’ 하는 식의 제공 규모가 논의된다고 한다. 삼성과 LG가 얼마, 민영화한 공기업이 얼마 하는 식의 풍설이 사실이라면 한나라당에는 천억원대, 민주당에는 2백억원대의 실탄이 제공되었다는 얘기가 된다.

검찰의 정치 자금 수사에 대한 기업들의 반응은 복잡 미묘하다. 돈을 준 것으로 드러난 기업들은 영수증을 받고 한도 내에서 합법적으로 지원한 돈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에 바쁘다. 정상으로 정치 자금을 낸 것과 분식 회계를 통해 비자금을 마련하고 법정 한도를 초과해 편법으로 정치 자금을 제공한 SK와는 엄격히 구별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지난 10월30일 비공개로 진행된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서는 정치권의 배신에 대해 분노하는 재벌 회장들의 고성이 밖으로 새어 나오기도 했다. ‘돈을 달라고 간청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비수를 겨누느냐’는 것이다. 다음날 전경련은 제도 개혁이 전제되지 않으면 정치 자금 요구에 일절 응하지 않겠다고 맞대응했다. 전경련의 한 관계자는 “이번에도 기업들만 희생양으로 만들 경우 내년 총선부터 한푼도 내지 않겠다는 것이 재벌 회장들의 입장이다”라고 전했다.

기업들은 정치 자금 제도가 이번에 획기적으로 개혁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정치 자금을 제공한 기업이 까발려지는 것은 극도로 꺼리고 있다. 불법이라면 말할 것도 없지만 합법적인 정치 자금 제공도 알려지면 불리하다는 것이다. 설령 김영삼 대통령 시절처럼 재벌 총수가 줄줄이 검찰 청사에 불려가 포토 라인에 서지 않는다고 해도 얼마를 주었다는 것이 기업에 하등 득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한 재벌 기업의 고위 관계자는 “기업에는 투자자, 특히 외국인 투자자와 소액 주주, 그리고 채권자, 노동조합이라는 이해 관계자들이 있다. 이들이 정치 자금을 사면해줄지 의문이며,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될지도 미지수다”라고 걱정했다. 기업 이미지가 나빠지는 것이 불보듯하며 소송이 꼬리를 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관계자는, 검찰이 회계 장부를 압수하고 계좌 추적을 하는 과정에서 기업으로서는 정말 드러내기 곤란한 것이 튀어나올 수도 있다며 걱정하기도 한다.

정치 자금에 관한 한 기업은 피해자이지만, 가해자인 정치권 못지 않게 전전긍긍하는 것이 현실이다. 정치 자금을 둘러싼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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