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민심 현지 르포/" DJ도 싫어. 영남은 더 싫어"
  • 전주·목포 이숙이 기자/광주·나권일 주재기자 ()
  • 승인 2000.1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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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반DJ’ 민심 현장 취재/응집력 떨어져 “차기는 나도 몰라”…‘호남 출신 불가’ ‘반昌’은 뚜렷
여수 간 DJ 모처럼 웃었다’. 지난 11월8일자 한 일간 신문의 기사 제목이다. 전날 전남지역 업무 보고를 받기 위해 여수에 들른 김대중 대통령이 시민 수백 명으로부터 환대를 받고 흐뭇해 했다는 내용이다. 청와대 핵심 측근들에 따르면 DJ는 이 날 내내 기분이 들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민주당의 한 호남 출신 의원은 “대통령 눈에 또 한번 콩꺼풀이 씌겠군…”이라며 혀를 끌끌 찼다. 호남 민심은 점차 DJ를 떠나고 있는데, 대통령이 부분만 보고 착각할 것이 두렵다는 이야기였다.

같은 날 저녁, 광주·전남 지역 전·현직 기자들이 만드는 인터넷 신문 <뉴스통>에는 DJ의 잘못된 민심 수집 방식을 꼬집는 글이 올랐다. ‘대통령이 주재하는 광주시의 업무 보고 자리에 광주 시청 출입 기자들의 출입이 봉쇄되고 대신 청와대 출입 기자만 참석했다. 이 지역 기자들은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회의장의 목소리를 수첩에 받아 적어야 했고, 업무 보고가 끝난 뒤에도 대통령이 이 지역 민심을 청취하는 자리는 마련되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이 글을 올린 모문혁 기자는 “김대통령이 제대로 된 민심을 들을 의지가 있었다면 농민이나 시민단체 대표, 또는 이 지역 언론인 같은 밑바닥 민심 전달자들을 만났어야지, 대통령 온다고 멀쩡한 화장실이나 뜯어고치는 시장 보고를 들어서는 안된다”라고 꼬집었다. 지역 방송 소속인 다른 기자는 “DJ가 정치적 고향에 와서까지 경직된 태도를 보인 것은 잇단 악재로 바닥을 치는 정권의 인기도를 호남에서까지 확인하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라고 비꼬았다.

두 사건 모두 화두는 호남 민심이다. 도대체 요즘 호남 민심이 어떻길래 호남 출신 의원이나 호남 지역 기자들이 ‘호남 민심’ ‘호남 민심’ 하고 노래를 부르는 것일까.
강준만 교수(전북대·언론학)는 최근의 호남 민심을 한마디로 ‘벙어리 냉가슴’이라고 소개했다. DJ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했지만, 제 손으로 뽑은 대통령이라는 이유로 싫은 소리 한번 제대로 못 하고 속만 끓이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는 DJ도 문제지만, 그런 DJ를 죽어라고 씹어대는 영남 사람들에게 더 큰 분노를 느끼는 것이 호남 사람의 기본 정서라면서, 이 때문에 위험 수위를 넘어선 호남의 반 DJ 정서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지역에서 발행되는 <목포 투데이>의 한 중견 기자는 목포 사람들은 이제 DJ 정권에 대해 체념하는 단계에 다다랐다고 말했다. DJ 정권 출범 이래 목포권 발전과 관련해서만 장밋빛 청사진이 10여개씩 난무했지만 정작 이루어진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외국인 전용 공단으로 지정된 대불공단은 정부가 대대적인 지원을 약속했으나 전체 분양 면적 2백29만평 가운데 절반 이상이 미분양 상태이고, 북적대야 할 목포항은 한·일 어업협정에 따른 어선 감축과 어획량 감소로 썰렁하다 못해 스산하기까지 했다. 그나마 최근 며칠 조기가 많이 잡혀 숨통이 트였지만, 선주 1인당 3억∼4억 원이 넘는 빚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 수산업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안강망 어선을 소유하고 있는 박 아무개씨(46)는 특히 어선 감척에 대한 보상이 경남에서만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고 호남에서는 꿩 구어 먹은 소식이라며 정부에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호남 역차별의 대표 사례라는 것이다.

영남에 대한 이런 피해 의식은 정권 교체 후 오히려 심해진 분위기다. “공장이 많은 영남에서야 공장 문 닫는 게 눈에 보이니까 죽겄다는 얘기라도 하지만, 이도 저도 없는 전라도는 속만 끓이고 있제라. 그런데도 영남에서는 전라도 사람들만 잘 먹고 잘산다고 한께….” 돈벼락 한번 맞아보고 이런 말 들으면 원이라도 없겠다는 한 택시 기사는, 정권 교체 직후 부산 의회 의원들이 목포가 얼마나 잘 먹고 잘사는지 보겠다며 시찰 왔을 때 정말 기가 막혔다고 말했다.

현재 목포 시민들이 유일하게 기대하고 있는 것이 전남도청 이전에 따른 남악 신도시 개발 특수다. 하지만 권노갑 최고위원과 한화갑·김홍일 의원 등 이 지역 출신 여권 실세들이 앞장서 추진한 도청 이전은, 광주·여수 같은 도내 다른 지역의 거센 반발로 여전히 속도를 못 내고 있다. 게다가 도청을 옮기더라도 자녀 교육을 고려해 가족은 이 지역으로 따라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실제 아파트 수요나 경기 부양 효과가 나타날지는 미지수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렇듯 현정권의 정책 혼선과 경제 불안에 따른 민심 이반으로 호남 지역에서 DJ 인기는 바닥을 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 취임 후 광주시 궁동 예술의 거리에 문을 열었던 ‘DJ 캐릭터 상품점’은 최근 매출 부진으로 소리 소문 없이 문을 닫았다. DJ를 중심으로 똘똘 뭉쳤던 호남 지역의 응집력도 점차 약해지는 추세다.

주류 업계에서는 전라도 대표 소주인 보해소주의 매출 감소를 호남의 응집력이 약해진 징표로 내세우기도 한다. 2년 전까지만 해도 호남에서 97%에 이르렀던 보해소주의 시장 점유율이 90%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현실은 ‘맹목적인 애향심’이라고까지 불리던 과거의 단결된 호남 정서가 변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얘기다. 이는 경북을 대표하는 금복주의 영남 시장 점유율이 1996년 50%에서 올해 95%까지 치솟은 것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수도권으로 진출한 호남 출신들의 응집력 이완은 더욱 심각한 수준이다. 대놓고 DJ 비판도 못하고 속만 끓이는 호남 정주민들과 달리 수도권 호남 출신들의 DJ 비판은 원색에 가깝다. 그동안 호남 사람들에게 신성 불가침 영역으로 여겨졌던 DJ의 고령을 겨냥하는 비판도 부쩍 늘었다. 서울 잠실의 한 주부는 “역시 나이가 많다 보니 결단력이 떨어지는 모양이다”라며 우리나라도 이제는 젊은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물론 ‘어려운 시절에 대통령이 돼 고생하고 있다’ ‘그나마 외교라도 잘 했으니 브루나이 국왕에게 현대 미수금 독촉이라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DJ를 두둔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하지만 DJ 정권에 대한 호남 출신의 누적된 불만은 점차 ‘나 DJ 안 찍었다’라는 식의 외면과 회피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호남의 응집력 이완과 DJ 정권에 대한 불만은 차기 대선에 어떤 영향을 줄까. ‘DJ 공천=무조건 지지’라는 호남의 투표 행태가 과연 달라질 것인가.

이 대목에 이르면 호남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을 아낀다. 아직 민주당의 차기 주자군이 뚜렷하게 부각되지 않은데다, DJ에 대한 애증이 엇갈리며 ‘내 마음 나도 몰라’ 상태를 보이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두 가지 정서는 분명해 보인다. 하나는 ‘호남 출신 불가’이고, 다른 하나는 ‘그래도 이회창은 아니다’는 것. 호남 불가는 영남 지역의 반대로 정권 재창출을 할 수 없다는 표 계산에서 나온 논리이고, ‘반 창(昌)’은 DJ 정권을 망친 훼방꾼이 바로 이회창 총재라는 원망과, 이총재가 정권을 잡으면 호남에 보복 정치를 할 것이라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정서다. 목포의 한 택시 기사는 “전라도 사람과 이총재 사이에는 기본 요금 나올 만큼의 거리가 있다”라고 우회적인 표현을 했고, 전주 중앙시장에서 만난 한 상인은 “그 양반이 워낙 대쪽이라 언제 부러질랑가 몰라서…”라고 말끝을 흐렸다.

이 지역 정가에서는 호남불가론과 반 창(昌) 기류로 이인제 최고위원이 반사 이익을 얻고 있다고 분석했다. 새로운 주자가 없으면 이인제라도 내보낼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대안 심리가 호남 사람들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최고위원은 지난 11월3일 목포대 강연을 위해 목포를 방문해 이 지역 유지와 시민들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DJ 정권의 산실에서 일단 합격점을 받은 셈이다.

하지만 호남 지식인 사이에서는 이인제 불가론도 만만치 않다. 호남 출신 못지 않게 영남의 지지를 얻기 어려우리라는 관측에서다. 노무현·정몽준 같은 영남 후보도 거론되지만 소수 의견에 그치는 형편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정권 재창출이 실패했을 경우를 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섣부른 체념도 나온다. 정권 재창출이 어렵다면 소수 정권으로서 깨끗하게 최선을 다했다는 역사적 평가라도 받자는 주장이다.
안방에서 터져 나오는 불평 불만은 DJ 정권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한번 이완되기 시작한 전라도의 응집력은 여간해서 회복되기 힘들 것 같다.
이런 정서 탓인지 외지인이 호남 사람의 속내를 들여다보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에둘러 토해내는 심상치 않은 DJ 비판은 호남 민심이 더 이상 DJ 편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특히 이 지역 지식인들은 DJ 정권에 걸었던 기대가 무너졌다는 상실감까지 더해 오히려 다른 지역보다 더 강한 불만을 토해냈다.

황광우 민주노동당 광주시지부장은 “YS는 전두환·노태우를 감옥에 보내기라도 했지만 DJ가 남북 문제말고 제대로 한 것이 뭐가 있느냐. 경제 위기 극복한답시고 정규직 노동자를 거리로 내몰아 비정규직 노동자만 양산했다”라고 쏘아붙였다. 차학렬 광주 참여자치21 사무국장은 “의약 분업이나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졸속 추진하는 바람에 행정력을 낭비하고 국론만 분열시켰다. 고집 센 대통령이 혼자만 잘하려다 보니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 이 지역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윤한봉 민족미래연구소장 역시 DJ가 꼼수 정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독설을 퍼부었다. 동방금고 사건에서부터 호남 인사 편중 시비, 경제 불안 등이 다 야당의 일리 있는 문제 제기에도 무조건 반박만 하는 DJ식 대결 정치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다. 강준만 교수는 아예 “DJ 정부는 더이상 비판할 가치도 없다”라고 왕따 선고를 내렸다. 비판도 개선의 여지가 있어야 재미가 나는데 DJ 정권은 도대체 미래가 안 보인다는 것이다.

DJ 정권의 산실이라고 할 호남에서 지식인들이 주저없이 DJ를 향해 독설을 퍼붓는 배경은 무엇일까. 이를 허용할 만큼 밑바닥 민심도 험악한 것일까?

인심은 곳간에서 나온다고, 악화한 경제 사정이 민심 이반을 이끌어낸 1차 원인으로 꼽힌다. 전국적인 경기 침체 현상에서 호남도 예외는 아니어서, 광주 지역의 경우 금남로·충장로 주변 상인들은 전남도청이 이전하면 도심이 공동화하고 상권이 붕괴될지 모른다는 우려로 밤잠을 설치고 있다. 지역 경제의 주축이던 건설업은 동아건설과 현대건설 파동으로 휘청거리고, 악성 부채에 시달리던 광주은행은 자구책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한빛·평화·제주 은행과 함께 지주 회사로 편입이 확정되었다. 다 대량 실업 사태를 예고하는 신호탄이다. 이 때문에 광주 중심 상권인 충장로 상가는 물론 22개나 되는 재래 시장 상인들 사이에서는 한결같이 ‘장사 안 되어 죽겄다’는 비명이 터져 나온다. 광주 롯데백화점 인근에 자리 잡은 대인시장의 한 상인은 “포도시(겨우) 입에 풀칠하고 살제, 장사 잘되는 집 별로 없어라. 전라도는 원래부터 IMF인께”라고 체념한 듯 말했다.

택시 운전 13년째라는 이 아무개씨(53)는 “IMF 때도 아침 7시부터 저녁 9시까지 영업하면 하루에 10만원은 벌었는데, 요즘은 아무리 돌아다녀도 고작 7만∼8만원 선이다”라며, 호남에는 이제야 진짜 IMF 태풍이 불어닥치는 모양이라고 걱정이 태산 같았다.

올 하반기 들어 잇달아 터지고 있는 이 지역의 대형 금융 사고는 가뜩이나 심란한 민심을 더욱 흉흉하게 만들고 있다. 9월에만 3건의 억대 금융 사고가 난 데 이어 지난 11월10일에는 조흥은행 광주 화정동 지점장이 고객 돈 27억원을 인출해 홍콩으로 달아나는 충격적 사고가 발생한 것. 이런 대형 사고가 유독 호남 지역에 집중되는 데 대해 세간에서는 정치권과 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해이를 보고 배웠다는 해석이 나온다.

전남대에 다닌다는 한 남학생은 “요즘 주변에서는 DJ 정권도 과거 정권처럼 썩었다는 비난이 많다. 동방금고 사건에서 불거진 대통령 측근 관련 의혹이나 청와대 청소부까지 억대 돈을 챙긴 배경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으면, 여론이 가만 있지 않을 것 같다”라고 경고했다.

전북 지역의 경제 사정은 전남보다 훨씬 심각하다. 서울보증보험 전주지점 김 아무개 과장(35)은 보증서 발행 건수를 지표로 삼아 전북 지역의 경기 동향을 설명했다. 공사 현장이 많고 돈이 돌아야 보증서를 떼러 오는 손님도 많아지는데, 갈수록 보증서 발급 건수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근 대우자동차 부도는 전북 경제에 치명타를 날렸다. 도내 전체 수출 실적의 27.8%에 해당하는 대우자동차 군산공장이 가동을 중단하면서 그 파장이 전북 수출 전체로까지 확산될 공산이 커졌기 때문이다. 무역협회 주창현 전북지부장은 “대우자동차 수출이 차질을 빚을 경우 2천만 달러에 이르고 있는 도내 20여 자동차 부품업체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라고 걱정했다.

주머니 사정이 어려워지자 이 지역 사람들에게 ‘삶의 질’은 딴 나라 얘기가 되어 버렸다. 새만금 간척 사업이 대표 사례. 개펄을 살려야 한다며 새만금 개발을 반대하는 환경단체와, 농지 확보를 위해 간척지 개발이 필요하다는 전라북도 사이의 팽팽한 대결 구도에서 대다수 도민은 ‘개발 찬성’ 쪽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경제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무조건 개발하는 것이 낫다는 논리다. 여기에는 환경을 따질 만큼 살기가 여유롭지 않다는 절박함이 담겨 있다.

사정은 대통령의 고향인 목포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다. 아니 정권 교체 당시의 감격과 기대에 비하면 오히려 상실감이 더 크다고 해야 할까. 영산강 하구언 입구 ‘미관 광장’에서 포장마차를 운영하고 있는 신 아무개씨(45)는 “목포가 왜 이렇게 되부렀는가 몰러”라고 한숨부터 내쉬었다. 1930년대에는 전국 6대 도시 가운데 하나였고, 광주보다 먼저 시로 승격된 목포가 이제는 ‘돈이 말라가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도시가 되었다는 푸념이다. 그의 하소연이 과장이 아니라는 것은 단박에 드러났다. 하당 신도시에 위치한 이 미관광장에는 관광 버스를 개조한 ‘관광 포장마차’를 비롯해 포장마차 20여 곳이 문을 열고 있었지만, 손님은 분위기를 즐기러 오는 몇몇 아베크족이 전부였다. 유달산 기슭 신안비치호텔 주변에 형성된 카페촌도 한산하기는 마찬가지. 카페 ‘헤밍웨이’에서 만난 한 대학생은, 취직을 걱정하는 학생들이 다 외지로 나가 목포 대학들은 정원을 반 채우기도 어렵다면서, 자기도 어떻게든 목포를 빠져나갈 궁리중이라고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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