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중대' 발언 파문…진땀 흘리는 '이회창식 합리주의'
  • 김종민 (jm@e-sisa.co.kr)
  • 승인 2000.1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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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껴안고 '진보' 달래고 …
11월16일 국회 의정회관에 마련된 맹형규 한나라당 의원 후원회장. 사회자가 이틀 전 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문에서 ‘조선노동당 2중대’ 발언을 한 김용갑 의원을 소개하자 장내에는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김의원은 행사의 주인공인 맹형규 의원은 물론이고 당 총재인 이회창 총재보다도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김의원은 이제 선거운동 다 끝냈다. 차기 대권 후보로 나와도 되겠다”라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러나 한나라당 내에는 김의원의 발언을 강하게 비판하는 이도 적지 않다. 발언이 있은 다음날인 11월15일 소장 개혁파 의원 모임을 주도한 김원웅 의원이 대표적인 인물. 김의원은 김용갑 의원의 발언이 “북한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보는 과거의 냉전적 시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라고 비판했다. 북한을 화해와 협력의 파트너로 인정하는 새로운 시대적 흐름에 수구 세력이 초조감을 느낀 것이라는 평가도 덧붙였다. 물론 개혁적인 소장 의원 가운데도 북한의 독재 체제를 비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지만, 현단계에서 북한과의 화해 협력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듯한 김용갑 의원의 주장에 대해서는 거개가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특히 대북 정책을 둘러싼 한나라당 내의 입장 차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사안은 국가보안법 개정 문제이다. 한쪽에서는 현시점에서 국가보안법을 한 자도 고치면 안 된다는 김용갑 의원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고, 다른 한쪽에는 남북 화해 시대를 맞아 국가보안법을 전면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김원웅 의원이 버티고 있다. 그 중간에는 북한을 반국가단체라고 규정한 조항은 유지하되 북한에 대한 고무찬양죄·불고지죄 등은 개정해야 한다는 부분개정론이 다수를 이루고 있지만, 개정 폭을 두고서는 역시 미세하게 의견이 갈리고 있다.
11월 초 이회창 총재가 국회 대표 연설에서 “북한에 경제를 지원하고 평화를 얻자”라며 ‘전략적 상호주의’를 주장한 것에 대해서도 당내에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김원웅 의원을 비롯한 개혁 성향 의원들은 대부분 이총재가 북한을 대화 파트너로 인정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게 해준 바람직한 주장이라며 이총재의 합리적 접근을 높이 샀다. 반면 보수 성향인 한 의원은 이총재가 너무 이리저리 따져 정통 보수 노선이 흐려지는 것 아니냐면서 우려했다.

한나라당의 한 인사는, 다양성이 존중되고 폭이 넓은 것은 민주 정당으로서 장점 아니냐고 애써 자위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다양성은 이질성에 가깝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개혁적인 소장파 의원 중에는 당이 이런 식으로 가면 정계개편이 필요한 것 아니냐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이러한 이질성은 이총재를 비롯한 한나라당 지도부로서 곤혹스러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번 발언 파동에서도 당 지도부는 ‘무지개 정당’의 왼쪽과 오른쪽 스펙트럼을 오가며 진땀을 흘려야 했다. 총재단 회의가 김용갑 의원의 발언을 부적절하다고 했다가 당 안팎의 보수적인 분위기에 밀려 이를 거두어들였는가 하면, 소장파 의원들에 대해서는 조만간 연찬회를 다시 열어 의견을 조율해 보자며 달랬다.

이번 2중대 발언 파동으로 촉발된 한나라당 내의 불협화음은 며칠 만에 가라앉았다. 당 지도부나 개혁 성향 의원들 모두 검찰총장 탄핵안 표결을 둘러싸고 여야가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당내 이견이 드러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데 공감하는 분위기여서 파문이 확산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한나라당이 안고 있는 구조적 불안정성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이번 사건을 두고, 이총재가 김용갑 의원부터 김원웅 의원까지를 한 울타리 안에서 언제까지 끌고 갈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우려했다. 물론 차기 정권 탈환을 유일한 공동 목표로 삼고 있는 한나라당 내에서는, 이총재가 차기 대권을 거머쥘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현재의 체제가 그대로 갈 것이라는 전망이 아직은 우세하다. ‘이회창 대세론’이 뿌리를 내려 가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김용갑 의원의 발언을 강하게 비판한 이부영 부총재도 개혁파 일부에서 정계 개편 얘기가 나오자 “개혁 세력이 따로 살림을 차리면 정권을 잡을 수가 없다. 일단 정권 교체가 중요하다”라며 현실론을 폈다.

그러나 이회창 대세론이 끝까지 간다고 단정하기에는 여전히 불안하다. 이회창 대세론이 당을 봉합하는 데는 성공하고 있지만 당을 통합시키려면 결국 이총재의 ‘개인기’가 발휘되어야 한다는 지적이 적지 않은 것이다. 이총재측의 한 인사는 “이총재가 김용갑 의원과 김원웅 의원의 색깔을 통일시킬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문제는 이러한 이견을 제압할 수 있는 이회창 노선이 확고하지 못하다는 데 있다”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합리성과 논리성을 중시하는 이총재의 스타일이 YS 식의 ‘화끈한 노선’이 잘 통하는 한국 정치 풍토에 맞지 않는다는 점도 고민거리다. 최근 <내일신문>과 한길리서치가 공동으로 한 여론조사 결과는 이러한 이총재측 우려를 뒷받침하고 있다. 당 지지도에서는 처음으로 민주당을 앞섰으나, 차기 대통령 지지도에서는 이총재가 이인제 민주당 최고위원에게 뒤진 것이다.
반 DJ 정서는 확산되고 있는데 이총재 개인은 왜 안 뜨는가. 이 점이 이총재측의 고민이다. 특히 DJ 정권이 예상보다 빨리 민심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있어 조기 레임 덕이 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그동안 이총재와 한나라당이 원동력으로 삼았던 반 DJ 정서가 어느 정도 약해질 가능성이 있고, 이총재로서는 반 DJ 정서에서 말미암는 반사 이익에만 기대기가 어려워지게 될 것으로 보인다. YS가 전망한 대로 여권에서 차기 후보가 떠올라서 DJ 정권과 이총재의 대결 구도가 아니라, 여권의 차기 주자와 이총재의 대결 구도가 형성되면 이총재의 비전과 지도력, 즉 개인기로 승부해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되는 것이다.

지금은 이총재를 대신할 인물이 없다는 것이 중론이지만, 만일 앞으로 이회창 대세론이 틈을 보이고 경쟁 상황이 조성되면 ‘다크 호스’로 떠오를 인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총재측의 한 인사는 박근혜·최병렬·이부영 부총재 등이 잠재적인 다크 호스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박근혜 부총재는 이미 이총재와 시시비비를 냉정하게 가리겠다고 여러 차례 내비친 바 있고, 실제로 영남에서의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영남 후보로 떠오를 가능성이 있다. 최병렬·이부영 부총재의 경우 일단 이총재를 중심으로 정권을 탈환하는 쪽에 무게를 싣고 있다. 그러나 추진력이 강한 보수 성향의 최부총재는 지난 5·30 전당대회 부총재 경선에서 1위로 당선되었다. 특히 서울과 자신의 출신 지역인 경남에서 지지세가 강했다. 개혁 성향을 대표하고 있는 이부총재의 경우, 앞으로 노선 정립 과정에서 한나라당의 보수 색채가 강화되어 선을 넘게 되면 독자 행동을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들 세 사람이 각각 영남·보수·개혁이라는 한나라당 내의 세 가지 변수를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

이총재는 이들을 모두 안고 간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총재의 의지보다도 영남 변수를 제압하고 보수 세력과 개혁 세력을 통합할 수 있는 실력이다. 바야흐로 ‘반 DJ 노선’ 일변도에서 벗어나 이회창 개인의 비전과 지도력으로 승부를 걸어야 하는 시기가 점점 가까워 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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