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쩡한 정책 줄타기…딜레마에 갇힌 한나라당
  • 김종민 ()
  • 승인 2000.1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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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기념관 건립 등에 태도 애매… “분명한 노선 없이 차기도 없다”
“다음 대통령이라고 소개하고 싶지만 다른 당 분들도 와 계시니 참겠습니다. 한국 정치의 중심에 서 계신 분, 이회창 총재님을 소개합니다.” 지난 11월28일 오후 한나라당 10층 강당에서 열린 중앙당 후원회에서 사회를 맡은 이윤성 의원은 이회창 총재를 이렇게 소개했다. 실제로 이총재는 11월24일 ‘무조건 국회 등원’을 선언하면서 파행 정국을 단숨에 유턴시켜 자신이 한국 정치의 ‘대주주’임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이총재 측근들은 “앞으로 이총재가 ‘49% 지분’을 가진 차기 지도자에 걸맞게 각종 현안을 주도적으로 해결해 나갈 것이다”라고 자신있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한나라당과 이총재가 수권 정당, 차기 지도자로서 합격점을 받으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특히 각종 현안에 대해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는 책임 정당의 면모를 보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사실 그동안 한나라당은 민감한 현안에 대해 여권이 실수하기만 기다리거나, 대립하는 주장의 사이에 끼어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개혁도 하고 인심도 얻고’ 두 토끼 잡기 욕심

대표적인 예가 의약 분업. 의사들의 반발로 몇 달 동안 온 나라가 의료 대란에 시달렸는데도 한나라당의 당론은 6개월 연기라는 미봉책에서 더 진전하지 못했다. 심지어 한나라당 내에서는 가만히 놔두면 어차피 정부·여당이 비난을 뒤집어쓸 터이니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을 필요가 없다는 분위기마저 있었다.

최근 문제가 된 한전 민영화에서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애매한 당론이 문제가 되었다. 한나라당은 11월28일 오전 정책위원회 간부들과 산업자원위원회 소속 의원들 연석회의를 열어 정부안에 찬성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이 발표가 나간 후 한전 노조가 강하게 반발하자 오후에 ‘시행 시기를 조정한다’는 문구를 집어넣었고, 이후 한국노총의 요구를 받아들여 시행 시기를 1년 유예하자고 주장했다. 정부·여당이 사실상 한전 민영화를 하지 말자는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했지만, 한나라당은 한손에는 구조 조정이라는 떡을, 다른 한손에는 노동자 표라는 떡을 들고 어정쩡한 모습을 보였다.

국가보안법 개정 문제도 한나라당과 이총재를 괴롭히는 ‘뜨거운 감자’다. 최근 김원웅·서상섭 등 한나라당 의원 4명이 민주당 송석찬 의원이 주도한 국가보안법 폐지안 발의에 참여했다. 한나라당 지도부는 당원으로서 당론을 신중하게 검토하고 당과 상의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이들에게 불만을 나타냈다. 정창화 총무는 보안법 폐지가 당론이 아니라고 못박았다. 그러나 김원웅 의원은 “언제 의원총회나 당무회의를 열어 당론을 정한 적이 있느냐”라며 반발했다. 지난 7월 의원 연찬회 때 이총재가 표결을 시도한 것이 고작인데, 공식 회의도 아닌 자리에서 강행한 표결을 당론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지난 대선 때까지만 해도 한나라당 당론은 국가보안법 개정 불가였다. 그러나 최근 남북 관계가 급류를 타면서 부분 개정이 불가피하다는 분위기가 대세를 이루었지만 어떤 조항을 어떻게 개정한다는 구체적인 당론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김용갑 의원 같은 현행법 고수론자도 있지만, 원희룡 의원같이 3조 반국가단체 조항은 유지하되 인권 침해 조항은 개정하자는 부분 개정론자가 다수를 이루고 있다. 폐지하거나 폐지에 가깝게 대폭 개정하자는 의견을 가진 의원도 적지 않다. 김원웅 의원은 폐지에 우호적인 한나라당 의원이 30∼40명에 이른다면서 “이번 폐지안 발의 때는 법안 발의 정족수를 채우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일부만 참여했다”라고 밝혔다.

한나라당 지도부는 자칫 이 문제가 당내 이념 갈등을 증폭시켜 분열의 씨앗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내심 여당이 이번 정기국회 때 처리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그러나 정기국회를 무사히 넘긴다 하더라도 일부 개혁파 의원들이 조만간 국가보안법 문제를 비롯한 한나라당의 대북 정책에 대해 본격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겠다는 분위기여서 진통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정기국회에 예산안이 올라와 있는 박정희기념관 국고 지원 문제도 이총재가 가타부타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는 사안이다. 이총재측은 당론을 정해야 할 만한 사안이 아니라며 짐짓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고 있지만 속사정은 좀 복잡하다. 이총재 주변 인사들에 따르면, 이총재는 박정희기념관 문제에 DJ 정권의 정략적 의도가 깔려 있다고 보고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때 한나라당은 이러한 내용을 담아 논평을 내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총재로서는 이 사안에 강하게 집착하고 있는 박근혜 부총재와 대구·경북 의원들의 처지를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김영삼 전 대통령은 “독재자 기념관 건립에 국고를 낭비한다면 공사 현장에 가서 농성하면서라도 막겠다”라며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박부총재와 YS를 모두 ‘건사’해야 하는 한나라당과 이총재로서는 이 사안에 대해 굳이 당 차원의 입장을 정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 최근 이총재는 예산안을 다루는 예결위원들에게 조용히 통과시켜 주라는 입장을 비공식으로 전했다고 한다.

김대중 대통령의 당적 이탈과 거국 내각 문제도 간단치 않은 문제다. 최근 국정 난조와 민심 이반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DJ가 당적을 버리고 거국 체제를 구성해야 한다는 여론이 만만치 않다. 한나라당도 그동안 대통령이 당파의 이해를 떠나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해 왔으며, 여권 내에서도 비슷한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쯤 되면 야당으로서는 대통령 당적 이탈과 거국 내각을 주장할 법도 하다.

그러나 이총재는 지난 11월9일 국회 대표연설에서 거국 내각 대신 비상 내각 구성을, 대통령의 당적 이탈 대신 민주당 총재직 사퇴를 촉구했다. 국정 쇄신이라는 여론을 반영하면서도 거국 내각 얘기를 피해 가기 위해 비상 내각이라는 애매한 용어를 동원한 것이다. 또 당초 대표 연설문 원고에는 대통령 당적 이탈 요구가 포함되어 있었으나, 정작 연설할 때는 총재직 사퇴로 수위를 낮추었다. 대통령 당적 이탈은 곧바로 거국 내각으로 연결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총재가 거국 내각에 부정적인 이유는, 거국 내각을 구성할 경우 핵심 요직을 차지하지도 못하면서 국정 운영에 동반 책임을 져야 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또 그동안 한나라당을 단결시키는 접착제 구실을 해 온 반DJ 전선이 흐트러질 수 있다는 점도 우려하고 있다. 최근 김덕룡 부총재가 김대통령 당적 이탈과 개헌을 전제로 한나라당 일부 세력이 이탈할 가능성을 시사한 것은 이러한 우려가 기우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최근 한나라당은 이총재가 정국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차기 주자로서 앞서가고 있는 것에 한껏 고무되어 있다. 그러나 이총재의 정치력을 감안할 때 이러한 호시절을 얼마나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은 여전히 가시지 않고 있다. 의사 결정 과정을 민주적으로 바꾸고 정책 노선을 뚜렷하게 설정하지 못하면 경쟁력을 인정받기가 어렵다.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모두에게 좋은 결정은 없다”라면서, 이총재가 피고와 원고를 모두 만족시키는 ‘명판결’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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