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식 전술 전수한 이인제의 승부수
  • 안철흥 ()
  • 승인 2000.11.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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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불행’ 발언 파문…‘후보 쟁취’ 강공 작전 펼 듯
제가 국민의 지지가 없다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러나 국민의 지지가 있는데 후보가 안되면 모두가 불행해집니다.”
민주당 이인제 최고위원이 11월9일 국민정치연구회(이사장 이재정 의원) 초청 특강에서 한 이 말이 당내에 파장을 낳고 있다.

이위원은 이 날 강연을 마친 뒤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시종 웃음 띤 얼굴로 10분 넘게 일문일답을 가졌다. 그러나 한 기자가 ‘후보가 안되면 탈당하겠다는 거냐’고 묻는 순간 그는 ‘그런 말이 기사화하면 (당신과의 사이는) 끝’이라며 정색했다. 그만큼 과거의 경선 불복 사건은 치명적인 그의 약점이다. 그런데도 과거의 일을 다시 떠올리게 만드는 발언을 의도적으로 흘린 것이다.

전당대회 후 한동안 이위원은 DJ의 눈에 들려고 노력했다. 김대통령이 차기 주자 덕목으로 꼽은 것은 ‘통일 문제에 대한 역량’과 ‘당과 국민에 대한 사심 없는 봉사’. 전자가 DJ의 통치 철학을 계승하라는 메시지라면, 후자는 집권 중 레임 덕을 초래해서는 안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이에 따라 이위원은 보스워스 주한 미국대사, 포너 미국 헤리티지 재단 총재 등과 만나면서 남북 문제에 대한 관심의 폭을 넓혔고, 정치권 개혁주체론을 설파하며 위기론에 정면 대응하는 등 DJ가 요구하는 덕목 챙기기에 열심이었다. 한때 불편한 관계였던 JP에 대해서도 ‘정치의 큰 지도자이시다’며 깍듯이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

이렇듯 물밑 행보만을 계속하던 그가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제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현재 민주당의 차기 경선 기상도는 정중동 상황. 겉으로는 움직임이 없다. 차기 후보가 공론화하는 순간 레임 덕도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밑에서는 치열한 차기 논의가 진행 중이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차기 대선은 지역 연합을 통해 돌파할 수밖에 없는데, 백제연합을 택하느냐 동서연합을 택하느냐가 문제 아니겠느냐”라며 당내의 분위기를 설명했다. 중부권 후보와 영남 후보 중 어느 쪽이 승산이 있겠는가를 놓고 물밑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는 말이다.
이 중 중부권 후보론은 이인제 최고위원을 상정한 것. 국민들의 지지에서 가장 앞서고, 영남에서도 DJ가 15대 대선에서 얻었던 15%보다는 많이 얻을 수 있으며, DJP 연합을 통해 승리할 수 있었듯 이번에도 충청권이 뭉치면 된다는 논리가 중부권 후보론을 지탱하는 힘이다. 반면 영남 후보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지금까지의 지지율 조사는 인지도 조사일 뿐 진짜 지지율은 아니라고 반박한다. 중요한 것은 동서 화합이라는 명분을 살리면서 영남 지역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후보가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영남 후보론을 지지하는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대통령에게 남은 과제는 국민 화합이고, 이를 위해서는 영남 후보가 필요하다”라고 주장했다. DJ는 지금껏 평화적 정권 교체,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 남북문제 해결, 국민 화합을 정치적 과제로 설정해 왔다. 그 중 정권 교체는 이미 달성했고,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도 계속 진행 중이며, 남북문제도 남북 정상회담 이후 화해 분위기를 타고 있다. DJ의 과제 중 유일하게 미해결인 것이 지역 감정 해소인 셈이다. 따라서 지역 문제를 풀 수 있는 사람이 차기 후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대통령은 노벨 평화상 수상 발표 직후 대구·경북과 부산·경남을 연이어 방문했다. 김중권 최고위원과 노무현 해양수산부장관이 각각 이를 수행했다. DJ의 이런 행보는 예비 후보들에게 힘을 실어주면서 지역 문제 해결사 역할도 맡기려는 복안으로 받아들여졌다.

예비 후보들의 움직임도 적극적이다. 아직은 정중동이지만, 노무현 장관 주변에 이미 몇몇 동교동계 인사들과 과거 YS의 측근들이 드나들고 있다. 김중권 최고위원도 대구로 이사하는 등 본격적으로 영남 민심 잡기에 나섰다. 이런 점들 때문에 당내에서는 DJ가 영남 후보론 쪽으로 마음을 움직이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대두하기도 했다.

권노갑 최고위원과 이위원의 관계가 최근에 약간 소원해졌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권위원의 한 측근은 이를 부인하면서 “권위원이 이위원 지지를 확정한 적은 없다. 이위원은 유력한 후보 중의 한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원론적인 언급이다. 그러나 총선 전 이위원이 유일한 대안인 듯 발언하던 때와는 미묘한 뉘앙스 차이가 있다는 것이 주변의 분석이다. 한동안 다소곳이 DJ의 통치 철학 계승자라는 이미지를 쌓아가던 이위원이 갑작스레 강공에 나선 것도 이런 당내 기류의 변화를 감지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위원이 단순히 초조감 때문에 이번 발언을 한 것 같지는 않다. 그는 강연 중에 자신의 발언은 ‘준비된 답변’이며, 10월25일 광주를 방문했을 때도 비슷한 발언을 했지만 언론에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즉 기자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다시 한번 흘린 셈이다.
이런 이위원의 행보에 대해 당내 일부에서는 이위원의 YS식 후보 쟁취 작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과거 YS는 3당 통합 때 소수파 민주계를 이끌고 합류한 후 당내 주류의 반발에 강공 작전으로 맞서 후보를 쟁취했다. YS 밑에서 정치를 시작했고, 한때 ‘YS의 양아들’로도 불렸던 이위원도 이제 본격적인 여당 후보 쟁탈전에 돌입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위원은 15대 대선 패배후 1998년 현 여권에 합류할 때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YS식 전술을 펼쳐 왔다. 1999년 여름 오랜 외유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DJ 2선 후퇴론을 주장하며 독자적인 목소리를 냈고, 민주당 창당 과정에서도 탈당 가능성을 흘리며 자신의 주가를 끌어올렸다. 이로써 그는 민주당 창당과 함께 선대위원장 직을 ‘쟁취’했고,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재개했다.

총선후 전당대회 기간에 보인 행보도 ‘YS식’이었다. 그는 권노갑 당시 고문과 밀월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권고문과의 친밀감을 드러낸 적이 한번도 없다. ‘권은 권, 나는 나’라는 태도였다. 밀월이 한창일 때조차 “나는 권고문의 도움을 받은 것도 없고, 권고문에게 빚 진 것도 없다”라고 말해 왔다. 오히려 두 사람이 밀월 관계라는 사실은 권고문 측근들을 통해서 확인될 정도였다.

그는 10월 말 마포에 계보 사무실을 하나 더 내는 등 최근 본격적인 차기 행보를 시작했다. 겉으로는 관리자가 박범진 전 의원이지만, 사실상 그의 계보 사무실이라는 것을 주변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21세기산악회라는 지지 모임이 있는데도 최근 경북 출신들을 중심으로 대동산악회를 새로 만드는 등 외연 확장에도 정성을 쏟고 있다.

그런 차에 당내의 기류가 변화하는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이번 발언은 그런 당내 기류에 대한 또 한 차례의 YS식 정면 돌파인 셈이다. 당내에 여전한 이인제 불가론에 경고를 보내고, 국민적 지지를 바탕으로 대세론을 굳힐 필요성이 제기되었다는 뜻이다. 또한 국민들을 향해 금역을 넘나드는 용기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을 수도 있다.

YS는 대통령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 ‘용기와 정의감’을 들었다. 이위원도 이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을 터이다. 문제는 그의 ‘용기’가 레임 덕 없는 집권 후반기를 꾀하는 여권 핵심부의 의중과 정면 배치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위원은 이런 위험 부담을 무릅쓰고 YS식 승부수를 던지고 있다. YS는 민주계라는 절대적인 지지 집단이 있었고, 지역 기반이 탄탄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반면 이위원에게는 탄탄한 당내 기반도 없고, 지역 기반도 아직은 약하다. 과연 그의 도박이 성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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