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연방제 반대' 이회창의 속마음
  • 김종민 기자 ()
  • 승인 2000.10.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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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총재 “낮은 연방제 반대”…통일방안 논의의 개헌 연결 가능성에 ‘쐐기’
영수회담을 하고 나면 항상 뒤통수를 맞는다는 피해 의식을 가지고 있던 이회창 총재가 이번에는 선수를 쳤다. 영수회담 이틀 후인 10월11일 이총재는 “어떤 식의 연방제 논의든 자유민주주의를 훼손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라고 북한이 주장하는 ‘낮은 단계 연방제’를 분명히 반대하면서, 청와대가 북한의 주장을 환영하는 듯이 말한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했다. 모처럼 영수회담으로 여야 간에 협력 분위기가 만들어진 상황에서 자칫 선제 공격으로 비칠 수 있는 주장이었다.

이총재가 선제 공격의 부담을 감수하면서도 ‘낮은 단계 연방제 반대’를 굳이 강조한 것은, 통일 논의가 이제 문제의 핵심을 향해 진입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6·15 남북 공동선언에서 합의한 5개항 가운데 남북 경제협력, 이산가족 상봉, 남북 당국자 회담 등 3∼5항은 그동안 어느 정도 진척되어 왔고, 그 과정에서 상호주의와 속도 조절 문제를 둘러싸고 여야 간에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선언의 핵심이라고 할 1항의 자주적 통일 문제와 2항의 통일 방안 문제에 대해서는 남북 사이에 논의가 진전되지 않았다. 한나라당도 특히 통일 방안 문제가 민감한 문제라고 보아왔지만, 남북 당국 사이에 논의가 별로 진전되지 않자 이 문제가 언제쯤 불거질지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지난 10월6일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가 통일 방안 문제와 관련한 성명을 발표했다. 조평통 안경호 서기국장이 “낮은 단계 연방제안은 정치·군사·외교에 관한 권한 등 현존하는 북남 정부의 기능과 권한을 그대로 두고 그 위에 민족통일기구를 세운 뒤 북남 관계를 조정해 나가는 방안이다”라고 밝힌 것이다. 청와대는 이에 대해 “6·15 공동선언의 정신을 한걸음 진전시킨 것이다”라고 평가하면서 남북 간에 통일 방안의 차이를 둘러싼 오랜 장애가 제거된 것이라고 환영했다. 따라서 가장 민감한 사안이라고 생각했던 통일 방안 문제가 이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고 판단한 이총재가 지난 10월9일 영수회담과 11일의 발언을 통해 강하게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다.
이총재와 한나라당이 통일 방안 문제를 가장 중요한 문제로 보는 이유는 우선 그 내용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이총재는 지난 6월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나름의 남북 협상 3대 원칙을 제시하면서 ‘대한민국의 국체 보존’을 첫째 자리에 올려놓은 바 있다. 이총재는 앞에 어떤 식의 수식을 붙이든 연방제 논의는 결국 대한민국의 국체를 훼손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물론 정부·여당은 이총재의 문제 제기에 대해 ‘이총재가 뭘 몰라서 그런다’며 평가 절하하고 있다. 청와대 박준영 대변인은 “낮은 단계 연방제를 환영한 것이 아니라 북한이 우리의 남북연합 방안에 접근하고 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이다”라고 해명했다. 통일부 김천식 총괄과장도 “이번에 북한이 밝힌 낮은 단계 연방제안은 사실상 우리의 남북연합제안을 수용하겠다는 의사 표시이다”라며 북한의 자세 변화를 강조했다.

북한의 조평통 성명만으로 본다면 북한의 낮은 단계 연방제안은 사실상 남한의 남북연합제안과 크게 다르지 않다. 현상태를 그대로 두고 남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중앙 기구를 두자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고, 다만 상징적으로 국호를 통일해 하나의 국가를 이루자는 점이 다를 뿐이다(42쪽 표 참조).

그러나 이총재측은 비록 상징적이라 하더라도 국호를 통일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총재의 한 측근은 “중앙 정부의 기능과 권한을 상징적인 수준으로 설정하더라도, 하나의 국호로 통일 국가를 구성하게 되면 기존 자유민주체제에 대한 헌법 규정과 한·미 방위조약 등을 개정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라며, 이렇게 되면 현재의 대한민국 국체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북한의 연방제안은 통일 전선 전술의 일환이라는 비판도 하고 있다. 이총재의 또 다른 측근은 “남한은 사상적으로 다양한 편차가 있는 반면 북한은 일사불란하다. 북한이 자꾸 연방제를 주장하는 것은 하나의 국호로 통일 국가를 이룬 후 남한의 친북 세력을 끌어들여 상황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들겠다는 속셈이다”라고 경계심을 나타냈다. 보수적 입장에 서 있는 백진현 교수(서울대·정치학) 역시 “정부가 북한의 태도 변화를 너무 쉽게 인정하는 듯해 불안하다”라면서, 북한측의 말과 실제 의도가 다르다는 점을 감안하면서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그러나 이총재측이 통일 방안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는 더 큰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통일 방안을 논의하는 과정이 국내 정치에 적지 않은 파장을 미칠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특히 이번 영수회담에서 김대통령이 “(국민투표를 통해) 국민의 뜻을 물어야 할 상황이 올 것이다”라고 언급한 것을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박관용 한나라당 의원은 “DJ가 오랫동안 마음에 묻어두고 있던 말을 한 것이다”라고 해석하면서, 남북 관계가 진전되면 통일 방안과 관련해서 국민투표를 추진할 것이고, 이때 권력 구조 개편 문제가 포함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이총재는 영수회담 직후 겉으로는 김대통령의 ‘국민투표’ 발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적지 않게 경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총재의 한 측근은 “이총재가 정말로 우려하고 있는 것은 남북연합이든 연방제든 통일 방안을 빙자해서 남한의 국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구조 개편이 진행되는 것이다”라고 전했다. 이러한 구조 개편은 필연적으로 개헌 등 권력 구조 개편과 연결되면서 차기 대선의 틀을 뒤바꾸리라고 우려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총재가 영수회담 직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반응한 것에 대해 이총재 주변에서는 두 가지로 해석했다. 우선 국민투표 문제가 당장 쟁점으로 떠오를 사안이 아니기 때문에 벌써부터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으리라는 것이다. 또한 DJ가 설마 그런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겠느냐는 반응을 보임으로써 그런 상황이 절대로 있어서는 안된다는 메시지를 반어적으로 전달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총재측도 청와대에서 밝힌 대로 이러한 구조 개편 상황이 당장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현재의 남북 관계 변화 속도로 본다면 차기 대선의 틀이 짜이기 전인 내년 말 이전에 이러한 상황이 펼쳐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이총재측 전망이다. 결국 이총재가 고민하는 핵심은 남북 문제와 차기 대선의 함수 관계이다. 최근 북·미 관계 개선이 급류를 타고 있고 DJ가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것은 이총재와 한나라당의 고민을 더 무겁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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