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 정희상 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2000.05.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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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소장파·차기주자군, 당풍 쇄신 적극적… 동교동계 “시기 상조
지난 4월27일 서울 여의도의 한 음식점에서는 민주당 당선자 모임이 열렸다. 30~40대 초·재선 의원 10여 명이 총선후 처음으로 자리를 함께했고, 이 방 건너편에서는 역시 민주당 재야 출신 50~60대 의원 5명이 자리를 함께한 것. 소장파 모임에는 재선인 정동채·정동영·김민석·김한길 의원과 이번에 새로 원내에 진출한 정범구·이종걸·김성호·장성민·임종석 당선자가 참석했다. 맞은편 방에서 열린 50~60대 모임에는 김근태·임채정·이해찬 의원과 이재정·이창복 당선자 등 과거 재야 출신 정치인들이 참석했다. 우연히 모임 장소가 같은 곳으로 결정되었다지만 두 모임은 민주당 내부의 개혁 세력 움직임이 크게 두 갈래로 태동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풍경이었다.

먼저 30~40대 초·재선 그룹의 모임이 주목된 이유는 공천 과정에서부터 이들이 호흡을 맞추어 왔기 때문이다. 주요한 매개 역할은 재선인 김한길·정동채·정동영·김민석 의원이 맡았다. 이들은 지난 대선 때부터 당내에서 각종 아이디어 뱅크 역을 맡아 활약하다가 총선을 앞두고 공천 과정에서 새 인물을 천거하고 접촉하는 막후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모임의 싹을 틔웠다. 특히 김대통령의 신임을 받고 있으면서도 동교동계 중심의 당 운영 방식에 가장 비판적인 것으로 알려진 정동채 대표 비서실장이 이 날 모임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큰 관심을 끌었다.

이 날 참석자들은 정치 개혁과 정치 발전을 위해 30~40대 당선자들이 주축이 되어 당내 네트워크를 형성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를 위해 당내에 민주적 토론 구조를 정착시키는 데 자신들이 역할을 다하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모임에 참석한 한 초선 의원은 “16대 국회가 김대통령 임기가 끝난 이후에도 계속 가기 때문에 DJ라는 구심점이 사라진 뒤에도 당이 살아 남기 위해서는 당내 민주화 작업을 지금부터 서둘러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라고 말했다. 동교동 직계 중심의 하향식 당운영 풍토가 지배해온 민주당 사정을 감안하면 이같은 초·재선 개혁 지향 그룹의 움직임은 민주당의 당풍 쇄신에 큰 지렛대가 될 전망이다.

따로 모인 50~60대 재야 출신 의원들은 친목 이외에는 별다른 의미 부여를 하지 말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이들 역시 당내에서 누구보다 개혁 지향형 인사들로 분류되고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 초·재선 그룹과 어떻게 관계를 설정하고 당내 민주화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관련해 김근태 지도위원은 “소장파든 다선 의원이든 앞으로는 과거 계보를 답습하거나 재야 운동권 출신 여부를 따지기보다는 합리성을 바탕으로 해서 정책 그룹 형성을 도모해야 하리라 본다”라고 말했다. 재야 출신이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고 합리적인 생각을 가진 당선자들을 상대로 정책 연대를 적극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셈이다.

“당내 민주화만이 DJ 이후의 활로”

이처럼 민주당 내에서 개혁을 지향하는 당내 민주화를 주제로 활발한 모임을 갖기 시작한 것은 나름의 위기 의식 때문이다. 선거를 통해 유권자들의 차가운 시선을 접한 정치 신인들은 공통으로 민주당이 지금 이대로 가다가는 국민에게 버림받으리라는 위기 의식을 느꼈다고 토로한다. 선거 과정에서 그들이 내린 결론은 한마디로 김대통령 중심의 1인 보스 체제 정당으로는 더 이상 안된다는 것이다.

민주당에서 차세대 지도자를 목표로 하는 주자군도 소장파의 개혁 목소리를 수용하는 데 적극 나서고 있다. 특히 이인제 고문과 김근태 지도위원은 정치 개혁 목표에 대해 다소 다른 생각을 갖고 있지만 당내 민주화 흐름을 주도적으로 이끌겠다는 데는 공통적으로 의지를 내비치고 있다.

먼저 이번 선거를 통해 차기 여당 대권 주자 자리에 성큼 다가선 이인제 고문은 당내 민주주의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고 나섰다. 총선후 다시 강연 정치에 나선 이고문은 4월27일 “상향식 민주 정당구조를 갖추기 위해서는 당내에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당헌 당규를 정비해야 한다."라고 밝혔다. 그는 더 나아가 한국 정치의 3대 계혁 과제로 정당 구조개혁, 정치과학과, 헌법 현대화를 역설했다.

이고문은 자신이 주장하는 상향식 정당 개혁 없이 치러지는 경선이라면 출마하지 않겠다는 배수진을 치고 나섰다. 이는 사실상 전당대회를 연기하자는 주장이나 다름없다. 이에 대해 이고문측은 "대의원 1만2천여명이 사실상 지구당위원장들의 거수기인 현실에서 최고위원주자들이 지구당위원장을 편 가르고 즐 세우는 식으로 경선이 치러질 텐데, 그런 경선은 민주주의에 역행한다는 것이 이고문의 확실한 생각이다"라고 전했다. 따라서 먼저 상향식 대의원 제도를 위한 기초 당원제를 마련해야 하고 거기에는 시간이 걸리므로 자연히 전당대회는 연기되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고문이 9월 전당대회 연기론을 들고 나온 배경에는 당내 민주주의라는 명분 외에도 1997년 신한국당에서 경선에 패한 쓰라린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깔려 있다. 이고문은 당시 국민 여론조사에서 36%라는 높은 지지를 얻었음에도 대의원 경선에서는 14%로 2위에 그쳐 경선에 불복했다. 이고문은 경선이 끝난 뒤, 당시 지구당 별로 30여명씩 대의원이 참석했는데 이들의 표결 방향을 사실상 지구당위원장이 좌지우지함으로써 민심과 어긋나는 표결이 나왔다고 주장하고 탈당을 감행했다. 이고문은 현행 민주당 대의원 구조에서도 그런 시행 착오가 되풀이되리라고 보고 선(先) 정당 민주화를 기치로 내건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가 제기한 개헌론(4년 중임 대통령제)에 화답해 대통령 4년 중임 및 부통령제 신설과 감사원 감독 기능 국회 이관을 골자로 하는 개언론까지 주장하고 나섰다. 당내의 과제인 정당민주화에서부터 정치권 전반의 관심사인 권력 구조 개편문제까지 화두를 선점하기 위한 공세를 펴고 있다. 당내 개혁 세력 및 신규당선자들을 상대로 직접 만나 모임을 꾸리는 대신 이같은 큰 그림을 내보이며 "(DJ시대와 달리) 이인제 시대의 공천은 당원들이 하는 것이다" 라는 말로 DJ 이후 시대의 불안 심리를 파고들겠다는 전략인 셈이다.

반면 이인제 고문과 차기 대권을 겨루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는 김근태 지도위원은 개혁 세력의 정책 연대를 꾸리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그는 이고문의 9월 전당대회 연기론에 대해 원칙적으로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경제가 어렵고 정상회담에 국가의 역량이 집중되어야 한다는 점을 근거로 내세우는 연기론도 경청할 만한 주장이기는 하다. 그러나 9월 전당대회는 국민과 한 약속이므로 정치에 대한 신뢰를 높이고 예측 가능한 정치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능한 한 당헌에 따라 예정대로 치러야 한다고 본다.” 그는 아울러 국회가 대화와 타협의 정치 공간이 되도록 만드는 일이 정치 개혁의 급선무라고 보고 있다. 이를 위해 미국식 예비선거 제도 도입과 당내 토론 활성화를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이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특히 국회에서 표결 실명제·자유 투표제·법안실명제가 실현되기 위해 여야 간에 의사 규칙을 민주적으로 만드는 작업에 구체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다. 당론에 따르는 투표는 몇 가지 사안에 국한한다는 규정을 만들고 나머지는 모두 자유 투표에 부치는 방식을 여야가 합의해 채택하자는 주장이다. 그는 이같은 정치 개혁 과제들을 주제로 민주당내개혁 세력 연대에 나서는 것은 물론 야당쪽 개혁 지향 인사들과 토론을 추진할 뜻도 밝혔다.

민주당 내부의 이런 다양한 개혁 목소리에 대해 정작 당의 주인 격인 동교동계는 시기상조라는 반응이다. 특히 선거후 국가적 대사인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김대통령이 여야 화해를 추진하는 상황에서 당내에서 불거지는 소장파 중심의 개혁 목소리에 대해 `해당 행위라는 거부 반응까지 보이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16대 원구성과 정상회담이 마무리되고 나면 당내 민주화 흐름은 걷잡을 수 없는 대세가 될 전망이다. 당내 민주화를 떼놓고 차기 대권과 당권을 논하기 힘든 것이 민주당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집권 후반기 과제로 각종 개혁을 내세운 김대통령으로서도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민의와 이를 수용하고자 하는 당선자들의 명분을 마냥 모른 척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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