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노갑, 부활 날개 깃 세우다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0.05.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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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 위로 떠오르기 일단 성공… 집권 후반기 전방위 조정 역할 맡을 듯
4월19일 한 신문에 ‘권노갑 대통령 정치특보설’이 실리면서, 권노갑 민주당 상임고문은 다시 뉴스메이커가 되었다. 최근 김대중 대통령은 이틀에 한 번꼴로 권고문을 부를 정도로 그와 매사를 상의하고 있다. 때문에 권고문이 정치특보를 맡든 안 맡든 실세로서 그의 역할이 크게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김대통령이 ‘부담’을 무릅쓰고 그에게 공식 직함을 주기로 한 속뜻을 헤아리기 위해 정치권에서는 설왕설래했다.

정치특보설은 한나절 만에 부인되었다. 박준영 청와대 대변인과 정동영 민주당 대변인이 입을 맞추어 ‘사실이 아니다’라고 공식 발표한 것. 이로써 양지로 나서려는 권고문의 1차 시도는 불발했다.

권노갑 정치특보 기용설이 나오자 당 안팎에는 ‘책임 정치’에 대한 기대와 함께 ‘보스 정치’에 대한 우려 또한 고개를 들었다. 권고문은 애초 경실련이 발표한 공천 부적격자 명단에 포함되는 등 구시대 정치인의 표본으로 분류된 인물. 불출마를 선언함으로써 표면적인 상처를 입지 않고 무사히 총선 기간을 넘겼으나 다시 양지로 나선다면 뒷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런 점들이 김대통령에게는 부담이 되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동교동계 “청와대행은 시간 문제”

김대통령은 결국 권고문에게 정국 돌파 역할은 맡기되 공식 타이틀은 주지 않는 차선책을 택했다. 그를 이인제 전 선대위원장과 함께 당 상임고문에 임명하는 선에서 그친 것이다. 그러나 정치특보설을 둘러싼 촌극은 동교동계 처지에서는 권고문을 정치 전면으로 끌어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권고문은 상임고문으로서 당내 각종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권한도 확보했다. 권고문의 한 핵심 측근은 상임고문에 임명된 직후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리를 만든다”라고 했다. 이만하면 발판은 만들었다는 것이다.

물론 권고문이 장기간 상임고문 자리에 머무를 것 같지는 않다. 측근들은 여전히 정치특보설을 살리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다. 한 측근은 “사실 남궁진 정무수석은 실무자 아니냐. 이제 정국 안정을 위해서는 실무가 아니라 정치를 할 사람이 대통령 옆에 있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했다. 동교동계는 여론의 동향을 주시하면서 시기를 기다리겠다는 심산이다.

그렇다면 왜 갑자기 권노갑인가. 한 측근은, 대통령이 언제 권고문에게 힘을 주었고, 언제 힘을 빼앗았는지 살펴보면 답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권고문은 정치 인생 대부분을 음지에서 보냈다. 권고문이 양지로 나올 때는 우연히도 DJ가 위기에 빠졌을 때뿐이었다. DJ가 1992년 대선에서 패하고 정계를 은퇴했을 때 그는 민주당 부총재로 실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DJ가 일선에 복귀하자마자 다시 음지로 내려갔다. DJ가 대통령이 된 다음 그는 내내 음지였다. 감옥에서 나온 후 일본에 머물렀고, 귀국해서도 잠행을 계속했다. 권고문은 최근 재기를 노렸으나 불출마 선언을 하고 다시 분루를 삼켜야 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그를 되살리고 있다. 권노갑이라는 초특급 구원 전문 투수가 필요하다는 것은 곧 DJ의 국정 운영이 비상 상황을 맞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총선 결과 민주당은 목표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한나라당이 과반수에 근접한 의석을 얻었고, 자민련은 교섭단체 구성마저 실패했다. 정계 지도는 여야 양당 구도로 단순해졌지만, 해법은 훨씬 복잡해졌다. 민주당은 한나라당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자민련과의 관계에서도 고단수 해법을 찾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 직면했다. 민주당 내부의 상황을 추스르는 것도 당면 과제이다. 총선을 거치면서 차기 주자 이인제 상임고문의 입지는 더욱 강화되었다. DJ가 앞으로는 공천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점에서 당 장악력도 일정 부분 한계에 부닥칠 공산이 크다. 더욱이 DJ는 당분간 남북 문제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력’을 가지고 당 안팎의 문제를 실질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사람은 권고문밖에 없다는 것이 동교동계의 생각이다.

권고문은 대야 관계 정상화를 위한 물밑 접촉을 시작으로 그의 ‘역할’을 넓혀 갈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와는 부인끼리 경기여고 동기동창 관계여서 예전부터 잘 알고 지냈다. 따라서 권고문이 공식 직함을 가지고 ‘총대’를 멘다면 정국 정상화의 접점은 쉽게 만들어지리라는 것이 권고문측 주장이다.

JP와의 관계 개선도 그의 몫이 될 가능성이 크다. 동교동계의 한 핵심 인사는 “애초 한광옥 비서실장에게 JP 방문 역할을 맡긴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라고 말했다. JP가 편안하게 생각하고, 무게도 지닌 인사가 나서야 했다는 말이다. 그런 차원에서 이 다음에 JP를 찾아갈 ‘진사 사절’은 권고문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9월 전당대회를 앞둔 당내 정지 작업과 장기적으로는 차기 정권 창출을 위한 밑그림을 만드는 것이 권고문에게 주어진 대통령의 숙제이다”라고 동교동계 출신인 핵심 당직자는 말했다. 한마디로 권고문은 DJ가 믿고 쓸 수 있는 유일한 올라운드 플레이어라는 것이다.

권고문의 이후 행보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또 한 사람의 동교동계 인사는 한화갑 의원이다. 권고문이 음지를 떠돌 때 한화갑 의원은 당내에서 DJ 대리인 역할을 맡아 왔다. 한의원은 권고문이 없을 때 원내총무와 사무총장을 지내면서 입지를 확보했고, 이제 최고위원 출마를 준비 중이다.

한의원은 총선을 거치면서 이미 소계보를 형성할 수 있을 정도로 힘을 얻었다는 평을 듣고 있다. 한의원은 YS 시절 김덕룡 의원처럼 동교동 안에서 독자적으로 클 수 있는 유일한 정치인이라는 평도 있다. 그의 이런 독자 움직임은 이미 맹아 단계를 넘어섰다는 것이 주변의 시선이다.

JPㆍ이회창 총재와도 통하는 사이

한의원은 9월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이 될 것이 확실하다. 한화갑 의원을 통해 당권을 장악해 집권 후반기 권력 누수를 막고, 이인제 상임고문과 동맹을 맺어 정권을 재창출하자는 것이 동교동계와 권노갑 고문의 구상이다. 동교동은 이와 관련한 마스터 플랜의 초안을 이미 잡아놓고 있는 단계이다.

권고문은 또한 민주당의 전반적인 리모델링 작업에도 손을 대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주목되는 것이 동교동계와 386 그룹의 연대 가능성이다.

동교동계는 이번 총선 기간에 권노갑 고문과 최재승 의원 등이 중심이 되어 젊은 세대에 대한 대대적인 지원에 나섰다. 당 차원의 공식 지원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물량을 투입했고, 정성을 다했다. 최재승 의원은 애초 열세로 분류되던 이창복 당선자를 돕기 위해 강원도 원주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이밖에도 임종석 김성호 이인영 허인회 우상호 등 386 세대 주자들의 승리를 위해 온갖 정성을 들였다. 386 세대들과 동교동계의 정치적 인연은 짧은 것이 아니다. 권고문이 귀국 이후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이 있다면 386 세대를 정치권에 흡수하는 일이었다. 그는 DJ가 1999년 3월19일 젊은피 수혈론을 공식 제기하기 훨씬 전부터 이미 30∼40대 중심의 각계 신진 인사들과 폭넓게 접촉하고 다녔다. 1999년 5월에는 386 세대의 정치 모임인 ‘젊은한국’의 상임고문 자격으로 이들과 제주도 회합을 갖기도 했다. 권고문은 이들을 만나면서 ‘밀알론’을 계속 제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젊은층이 정치 개혁과 21세기 새로운 정치 지도 세력 형성에 밀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반면 권고문은 기존 인사들에게는 386 세대를 위한 거름이 되라고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인연 때문에 동교동계와 386 세대 정치 신인들과는 상당한 연대감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 동교동계 인사들의 주장이다.

386과 연대해 ‘회춘’ 꿈꾸는 동교동계

이것은 동교동계의 장기 구상과도 맞물려 있다. “지금 같은 지역 정당 구조로는 차기를 도모할 수 없다. 대안은 민주당을 내부에서부터 바꾸는 것이다. 그래야만 민주당이 차기를 노릴 수 있고, 동교동계가 DJ 이후에도 살아 남을 수 있다”라고 동교동계 한 의원은 말했다. 즉 386 세대와 동교동의 연대는 동교동으로서는 ‘회춘’을 의미하고, 민주당으로서는 개혁 정당으로 탈바꿈함을 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권고문이 꿈꾸는 동교동계의 장기 구상이 열매를 맺을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동교동계가 386 세대 등 당내 개혁 세력들을 ‘친동교동계’로 분류하고 있는 데 반해, 정작 이들은 독자 노선 쪽에 더 매력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들 사이에 권고문은 동맹 대상이 아니라 극복할 대상이기도 하다. 한 재야 출신 당선자는 계보 정치를 없애야 한다면서, 민주당의 미래 모습은 동교동계가 일방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당내 민주화가 선행되어야만 가능한 것이라고 못박았다.

당내 386 세력은 4월17일 밤 시내 한 음식점에서 당선자와 낙선자가 함께 참석한 모임을 갖고 앞으로 정치?경제 개혁과 당내 민주화를 위해 한목소리를 내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한 참석자는 “거수기 역할에 머물러선 안되며, 특정 계파에 편입되는 일이 있어서도 안된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라고 소개했다.

과연 권노갑 고문과 동교동계의 장기 구상이 빛을 발할 수 있을까. 386 세대의 한 당선자는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동교동계만이 민주당을 책임지고 있다는 자세부터 버리는 것이 좋다”라고 충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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