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의 한반도 문제 해법
  • 金鍾民 기자 ()
  • 승인 2000.05.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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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풀되 받을 것은 받아내야”… ‘유연성 부족’ 지적 받기도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에게는 이번 남북 정상회담이 작지 않은 도전이 된다. 남북 정상회담이라는 메가톤급 사안과 관련해 제1당 총재로서 책임 있는 역할을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 전개될 ‘정상회담 정국’에서 총선 승리에 걸맞는 발언권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또한 2002년 차기 대선은 한반도가 탈냉전으로 접어드는 역사적 전환기에 치러질 가능성이 높아 한반도 문제에 대한 안목과 문제 해결 능력이 중요한 이슈가 될 것으로 보인다. 차기 수권 의지를 분명히 밝혀온 이총재로서는 남북 문제와 관련해 자신의 정치력을 보여주어야 하는 과제도 안고 있는 것이다.

이총재는 그동안 남북 문제와 경제 문제를 가장 중요한 문제로 보고 정책 능력을 보강하기 위해 나름으로 준비해 왔다. 당내 전문가들뿐만 아니라 당 밖의 전문가들로부터 폭넓은 조언을 받아왔다. 특히 미국외교협회(CFR)의 한국쪽 파트너인 서울포럼(공동 회장 김경원·한승주) 인사들과 가까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포럼은 미국통인 김경원·현홍주 전 주미대사를 비롯해 이상우 서강대 교수와 백진현 서울대 교수 등 김대중 정부의 햇볕 정책에 비판적인 인사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들은 남북 관계 및 대미 관계와 관련해 이총재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북 관계가 급류를 탈 가능성이 작지 않은 상황에서 이총재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제1당 총재로서 국정 운영에서 나름의 책임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력한 차기 대선 후보로서 경우에 따라서는 김대중 정부의 뒤를 이어 대북 정책을 주도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선택적 포용’이 기본 전략

이총재는 지난해 7월 열린 임시국회 대표 연설에서 남북 문제에 대한 자신의 정책 기조를 비교적 일목 요연하게 밝혔다. 이총재는 이 연설에서 북한의 대남 전략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고 있다는 점을 전제하면서 ‘선 평화, 후 통일’이라는 긴 안목에서 통일 정책이 추진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상호주의에 바탕을 둔 ‘선택적 포용 전략’을 대북 정책의 기조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정부의 낭만적 햇볕 정책으로는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고, 북한에 지원과 협력을 제공할 때는 반드시 군사적 반대 급부를 끊임없이 요구하고 받아내야 한다는 주장이다. 서울포럼이 1998년 미국외교협회와 공동으로 작성한 한반도 관련 보고서에서 북한에 경제 지원을 할 때 기초적인 시장경제 체제 도입을 요구해야 한다며 ‘연계론’을 강조한 것과 연결되는 맥락이다.

이총재는 이번에 <시사저널>과 가진 인터뷰(28∼30쪽 기사 참조)에서도 이러한 기본 입장을 재차 강조하면서, 그 연장선상에서 이번 남북 정상회담과 관련한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다. 이총재는 특히 경제 지원과 북한의 군사적 양보를 연계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번 정상회담에서 핵과 미사일 등 대량 살상 무기에 대한 북한의 성의 있는 변화를 최우선으로 촉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입장은 지난 5월 초 한국을 방문한 셔먼 미국 국무부 자문관이 “이번 남북 정상회담에서 대량 파괴 무기 문제가 의제로 다루어질 것이다”라고 기대한 것과 호흡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이총재는 남북 문제에서 상호주의와 연계론, 미국과의 견실한 공조 등을 기본 원칙으로 세워놓고 있다.

이총재의 이러한 방침은 첨예한 논란의 한복판에서 검증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우선 이총재가 주장하는 상호주의가 너무 직선적이 아니냐는 지적이 있다. 현정부에서도 집권 초기인 1998, 1999년에 열린 남북회담에서 비료 지원과 이산 가족 문제를 상호주의에 따라 연계했으나 북한의 반발에 부딪혀 실효를 거두지 못한 경험이 있다. 남한과 북한이 문제를 보는 인식 차이가 큰 상태에서 등가성(等價性)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즉, 남한에서는 이산 가족 문제를 인도주의 차원으로 보고 비료 지원과 연계할 수 있다고 보았으나, 북한은 이산 가족 문제를 체제 유지와 관련된 정치적 문제로 보고 있기 때문에 생산적인 대화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번 정상회담에서 핵과 미사일 등 대량 살상 무기 문제를 최우선으로 제기해야 한다는 이총재의 주장에 대해서도 너무 원칙적인 접근이라는 반론이 있다. 권만학 교수(경희대·정치학)는 “이번 정상회담이 한반도가 탈냉전으로 가는 첫 단추가 되게 하려면 남북이 기본적인 신뢰를 구축하는 데 가장 큰 목표를 두어야 한다”라고 정상회담의 의미를 정리했다. 그는 또 “핵과 미사일 문제를 중점적으로 제기하면 실효성 있는 남북 대화가 진행되기 어렵다”라며 그 문제는 앞으로 실무 회담을 통해 논의를 진전시켜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또한 핵과 미사일 문제는 한·미·일 공조가 필수이기 때문에 남북 정상회담에서 중심 의제로 삼기보다는 북·미, 북·일 회담 등과 조율해 실질적인 논의를 발전시켜 갈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정부도 경제 협력과 이산 가족 문제를 우선적인 의제로 놓고 남북 대화 국면을 안정적으로 조성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이총재의 주장과는 약간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총재의 입장을 기본적으로 지지하는 인사 가운데도, 이총재가 6·25 책임론을 제기하는 등 대북 문제에서 강경한 원칙론을 펴고 있어 앞으로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 관계가 큰 변화를 맞게 되면 입지가 좁아질 수 있다고 우려하는 이들이 있다. 현재의 상황을 볼 때 앞으로 예상을 뛰어넘는 변화가 일어날 수도 있는 만큼 이러한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좀더 유연성을 보완할 필요가 있는 것 아니냐는 문제 의식이다.‘남북 신뢰’ 앞서 ‘여야 신뢰’ 필요

남북 문제와 관련해서 초당적 협력이 중요하고 여야의 인식 차이가 가능한 한 좁혀져야 한다는 점에서 정부측 자세에 대한 문제 제기도 적지 않다. 이총재가 야당 총재이며 유력한 차기 대선 후보인 만큼 당장의 남북 관계를 풀기 위해서나 장기적으로 연속성 있게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도 이총재와 긴밀하게 협력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이총재가 불만을 토로한 것처럼 영수회담에서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의 비료 지원 건이나 최근의 남북 정상회담 준비 상황과 남북 접촉 과정에 대해 진지하게 설명하고 협력을 구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모양새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얼마 전 김대통령과 이총재는 영수회담에서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고 의미 있는 합의를 이룬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자는 최근 이총재에게 김대통령을 신뢰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이총재는 웃으면서 “그 점에 대해서는 예의상 뭐라고 말하기 어렵고 다만 김대통령이 약속한 대로 잘 해주기를 바랄 뿐이다”라고만 대답했다.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여기에 나설 대통령에 대해 제1 야당 총재가 흔쾌하게 ‘신뢰한다’고 덕담을 보태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분명 문제가 있어 보인다. 김대통령이 정상회담에 앞서 책임지고 풀어야 할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정국 주도권과 차기 대권에 집착해온 ‘여의도 정치’에서 민족의 운명을 좌우할 ‘한반도 정치’로 차원이 크게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김대통령이나 이총재 모두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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