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원, 정당 민주화의 꽃인가 암초인가
  • 안철흥 기자 ()
  • 승인 2000.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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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원, 상향식 공천 붐 타고 상종가… 자질 부족으로 역기능 초래하기도
16대 총선 이후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초·재선 의원들에게는 정당 민주화가 ‘화두’가 되어 있다. 자치단체장 7명, 광역 의원 32명, 자치 의원 57명을 뽑는 6월8일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 두 당에서 상향식 공천 바람이 일고 있는 것도 같은 현상이다. <시사저널 designtimesp=9595>이 총선 직후 실시한 국회의원 당선자 여론조사에서도 53.5%가 상향식 공천 제도를 정당 민주화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꼽아, 상향식 공천은 현재 정당 민주화의 잣대처럼 인식되고 있다.

민주당 서울 도봉 을 지구당(위원장 설 훈)은 5월15일 지역구 전당원 1만2천명을 상대로 비밀 투표를 해서 서울시의원 후보를 뽑았다(34쪽 상자 기사 참조). 민주당은 이밖에도 서울 금천 지구당(위원장 장성민), 서울 동대문 을 지구당(위원장 허인회), 인천 남동 을 지구당(위원장 이호웅) 등 상당수 지역에서 대의원 대회를 통해 상향식 공천을 실시했다.

한나라당도 마찬가지. 경북 구미 지구당(위원장 김성조)과 대구 동구 지구당(위원장 강신성일)이 5월 6일과 8일 대의원 투표를 통해 시·도 의원 입후보자를 결정했다. 이 중 민주당 서울 도봉 을 지구당을 제외하고는 대의원 투표를 통해 입후보자를 뽑았다. 대의원 투표를 통한 후보 선출 방식이 아직까지는 상향식 공천의 일반적인 형태인 셈이다.

그러나 대의원 투표를 통한 상향식 공천이 정당 민주화의 바람직한 방법인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목소리가 높은 것도 사실이다. 상향식 공천이 실험된 몇몇 지역에서 벌써부터 잡음이 새나오고 있다.

대의원 투표를 통한 상향식 공천이 최근에 시작된 것은 아니다. 자치단체장이나 광역·기초 의원의 경우 1995년 지방자치단체 선거 실시 이후 몇몇 지역에서 실시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번처럼 여론을 업고 붐이 조성된 것은 처음이다. 그만큼 상향식 공천에 대한 문제점도 많이 노출되고 있는 셈이다.

40세 이하 대의원은 10% 남짓

대의원들의 투표로 광역 의원 후보를 뽑은 수도권의 한 386 세대 위원장은 요즘 마음 고생이 심하다. 후보 선출 결과 ‘적임자’는 떨어지고 엉뚱한 사람이 뽑혔기 때문. “대의원 숫자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후보자들이 대의원을 매수하기가 너무 쉽다는 것만 배웠다”라고 그는 난감해 했다.

대의원 투표를 통해 도의원 후보를 뽑은 경기도의 한 정당 지구당도 마찬가지. 후보 선출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았다는 의원 보좌관 ㅈ씨는 “대의원들이 능력 미달이라고 평가되던 한 후보에게 동향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표를 몰아 주고는 서로 민망해서 웃더라”면서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지역내 참신한 인사를 영입하려고 시도했던 경기도 한 지역 민주당 위원장은 “우리는 30년 동안 야당 생활만 했다. 우리가 고생할 때 아무런 도움도 안 줬던 ××를 우리가 왜 뽑아야 하느냐”라는 대의원들의 항의에 밀려 영입을 포기해야 했다.

상향식 공천이 우리 실정에서는 아직 무리라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민주당의 한 당직자는 “우리나라 정당의 대의원 분포를 볼 때 상향식 공천이 역기능을 가져올 가능성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대의원 대회에서 복수 후보를 결정한 다음 중앙당의 낙점을 기다리는 것이 차라리 낫다”라고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수도권에 있는 민주당의 한 지구당 대의원은 1백34명. 이들을 나이·직업·출신지 별로 세분하면 문제가 무엇인지 한눈에 드러난다.

전체 1백34명 대의원 중 50대 이상이 55.2%인 74명이다. 민주당 당헌에는 40세 이하 대의원을 최하 20% 이상 선발하라고 되어 있지만, 정작 40세 이하 대의원은 18명(13.4%)에 불과하다. 젊은 사람을 끌어들이려고 노력했지만 하겠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지구당 관계자의 말이다.

직업 분포를 보면 더욱 심란하다. 이 지역은 공단 지역인데도 대의원 1백34명 중 노동자 출신은 5명뿐이다. 더욱이 화이트칼라는 한 사람도 없다. 대부분이 자영업자와 주부이다. 직업 분포를 보아도 대의원들이 지역 민심을 전혀 대변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또한 원적지 별로 보면 호남 출신이 80%를 넘고, 영남 출신은 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한나라당 사정도 거의 비슷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대의원들의 원적지 비율에서 호남 출신이 극소수로 줄어들고 영남 출신이 과반수로 늘어난다는 점뿐. 총선 직전 영입된 한나라당의 한 386 세대 위원장은 “처음 지구당에 갔을 때 대의원 대부분이 50대가 넘는 자영업자라는 점에 놀랐다”라면서, 어떻게 하면 젊은층을 끌어들이고 직업 분포를 다양화할 수 있는지 고민 중이라고 털어놓았다.

대의원들이 지역 민심을 제대로 대변할 수 없다는 점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각각 전국 대의원·시도지부 대의원·지구당 대의원 등 세 종류의 대의원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전국 대의원은 전당대회에서 당헌 제정과 개정, 총재와 대통령 후보 선출, 당무위원 선출 등 중요한 권리를 행사한다. 그러나 이들 중 당원들의 투표를 통해 선출되는 대의원은 없다. 민주당은 각 지구당의 대의원대회에서 전국 대의원 15명씩을 선출하도록 하고 있으나 이 조항은 거의 지켜지지 않고 있다. 한나라당도 당연직 대의원을 제외하고는 시·도 대회와 지구당 대회 등에서 선출하도록 하고 있으나 이 규정은 거의 지켜지지 않는다. 그나마 전국 대의원의 경우 지역내 정예 당원들이 임명된다는 점에서 ‘순도’는 높은 편이다.유권자에게도 예비 선거 문호 개방해야

지구당 대의원의 상황은 전국 대의원에 비하면 너무 열악하다. 각종 의원이나 당직자 등 당연직 대의원을 빼고는 대부분 지구당위원장이 임명하는데, 주로 지역내 이권과 관련되어 있거나 위원장과 가까운 사람을 중심으로 구성된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이다. 민주당은 당헌에 아예 당연직을 제외한 나머지 지구당 대의원은 위원장이 임명하도록 해놓았다. 한나라당도 형식적으로는 당연직 대의원 외에는 읍·면·동 당무협의회에서 선출하도록 되어 있지만 이 규정을 지키는 지구당은 거의 없다. 한나라당의 한 위원장은 “지역 유지·자영업자·건축업자 등 지역내 이권과 관련된 사람들이 대의원을 맡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정당 활동이란 것이 대부분 당원을 동원하는 일이고, 동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들을 대의원으로 임명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라고 말했다.

대의원들의 성향이 이렇다 보니, 자치단체장이나 광역·기초 의원으로 뽑히고 나서도 대의원들 눈치 보느라 제 할 일을 제대로 못하는 경우도 많다. 호남의 한 광역 자치단체장은 민주당 안에서 4년 내내 선거운동만 하는 사람으로 낙인 찍혀 있다. 그는 현지 시찰이라는 이름으로 지역 순방을 자주 한다. 그런데 숙식을 꼭 대의원 집에서 한 뒤 대가로 금일봉을 주고 오는 일이 그가 현지 시찰을 하는 주요 목적이라는 것이 당 관계자의 지적이다. 공천이 곧 당선인 지역 사정에서 대의원 관리만 잘 하면 재선이 보장되는 현지 시찰을 마다할 자치단체장은 없을 것이라고 이 관계자는 말했다.

당원으로서 기본 소양도 채 갖추지 못한 대의원들이 정실이나 이해 관계로 후보자를 뽑고, 선출된 자치단체장이나 광역·기초 의원들은 임기 내내 대의원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것. 이것이 현재까지 드러난 상향식 공천의 문제점이다.

그래서 대안으로 대의원 숫자를 대폭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민주당 위원장 시절 몇 차례 지방 선거에서 상향식 공천을 실험한 적이 있었던 박우섭씨는 “대의원 수를 대폭 늘려 후보 매수를 원천적으로 막아야만 상향식 공천을 하는 의미가 있고, 올바른 정당 민주화도 가능하다”라고 지적했다. 한나라당 김영춘 당선자도 “지구당 대의원 수를 현재의 백~2백명에서 천명 정도로 늘려야만 지역 민심을 제대로 반영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무작정 대의원 숫자만 늘려서는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지적이 만만치 않다. 민주당 설 훈 의원은 전체 당원 투표로 서울시 의원 후보자를 뽑은 후 지구당 대의원 대회에서 추인받는 절차를 거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민주당 서울 도봉 을 지구당의 대의원 수는 다른 지역에 비해 두 배 정도 많은 2백50여명. 그런데 대의원들의 참여 의식은 배양시키지 못한 채 숫자만 늘려놓다 보니 대의원 대회 정족수를 채우기가 생각 밖으로 어려웠던 것. 설의원은 “대의원 숫자를 늘리는 것만으로는 대안이 안된다. 대의원들에게 당 활동에 참여할 유인책을 마련해 줘야 하는데, 그게 힘들다”라고 토로했다.

학계에서는 현재의 대의원 구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대의원 제도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임혁백 교수(고려대·정치학)는 “전체 당원이 후보를 뽑는 예비 선거가 도입되어야만 정당 민주화가 가능하다”라면서, 대의원 제도 자체를 없애고 당원 중심의 정당 활동을 활성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 또한 한국적인 상황에서는 현실성이 많지 않다. 당비를 내는 당원이 전체 당원의 1~2%에 불과한 실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진민 교수(명지대·정치학)는 “예비 선거를 할 때 당원뿐 아니라 비당원 유권자에게도 문호를 개방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우리나라 정당의 경우 당원이 당비도 내지 않고, 선거 때 급조된 당원이 많기 때문에 일반 유권자와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 정교수의 진단이다. 그는 일반 유권자에게 문호를 개방해야 국민의 자발적 정치 참여를 높이고 정당의 사당화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대의원은 정당 민주화의 꽃이 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 그런 대의원이 정당 민주화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점, 이것이 우리 정치의 현주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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