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K 민심 현장 르포/“한나라당 후보라면 무조건 OK”
  • 정희상 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2000.0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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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목적 반DJ 정서 확산… 유언비어 난무
3개월 앞으로 다가온 16대 총선 조직책 선정 작업에 착수한 여야 각당은 서로 원내 제1당을 만들겠다고 벼르면서 여론 동향과 선거 판세 예측에 촉각을 곤두세우기 시작했다.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여야 모두 수도권을 핵심 공략 대상으로 잡고 있지만, 영남·호남·충청 등 현재의 여야 구도를 만들어낸 전통적 지지 기반의 동향 역시 빠뜨릴 수 없는 관심사이다. 특히 지난 15대 총선 때 자민련 바람이 일어 사실상 현재 공동 정권의 토대를 제공한 대구·경북 지역의 표심 향배가 이번 총선에서도 또 한번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리라는 전망에는 별다른 이의가 없다.

총 32개 지역구(대구 13석, 경북 19석)를 가진 대구·경북에서 15대 총선 결과는 이변이었다. 전통적인 집권당 압승 구도를 깨고 신한국당(현 한나라당)은 대구에서 2석, 경북에서 11석을 얻는 데 그쳤다. 대신 자민련이 이곳에서 녹색 바람을 일으켜 대구에서 8석, 경북에서 8석을 차지함으로써 당시 지역 정서의 큰 줄기였던 ‘반 YS’ 분위기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나 새로운 선량 배출을 눈앞에 둔 요즘 대구·경북의 바닥 민심은 어떤 출구를 향하고 있을까. <시사저널> 취재팀이 사흘에 걸쳐 구석구석 훑어 본 이 지역 민심은 또 다른 지역 정서(이른바 TK 정서)를 광범위하게 잉태하고 있었다. 그 핵심은 맹목적인 반집권당 정서. 그 결과 이 지역 민심은 무조건적인 한나라당 후보 지지 성향으로 집결되고 있었다. 물론 아직 대부분의 지역구에서 여야 후보가 확정되지 않았지만, 누가 나오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분위기였다.

대구 서문시장에서 의류 도매업을 하는 김 아무개씨는 “대구·경북에서는 이번 선거에서 한나라당 공천장을 전봇대에 붙여놓아도 거기에 표가 다 몰릴 끼다”라고 말했다. 대구 택시 기사 한 아무개씨는 “김대중 정부 근처에라도 갔던 사람은 무조건 떨어뜨릴 끼구마”라고 표현했다. 지난번 대구에서 당선해 공동 정권에 들어갔던 자민련 박철언·박구일·이정무 의원을 두고 하는 말이다. 여당 관계자 “갈아도 갈아도 싹이 트지 않는 땅”

놀라운 사실은, 이런 정서가 특별한 논리와 이유도 없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일부 시민들이 이유를 대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이유라는 것도 사실과는 동떨어지거나 제대로 입증되지 않은 해괴한 내용이 주류이다. 그러나 수많은 시민이 이를 그럴듯하게 믿고 있었다. “집권당 의원을 한명이라도 당선시키면 현정권은 우리를 우습게 보고 대구·경북 지역 공장 시설을 호남으로 다 뜯어갈 끼다.”( 서문 시장 상인) “지금 대구는 실업자투성이이지만 호남 지역은 건설 현장과 공장이 날밤 새는지 모르고 돌아가고 있다. 우리 자식들이 일자리를 얻으러 호남으로 가면 다 쫓아버린다.”(대명동 슈퍼마켓 주인) “지난번 대통령 선거에서 정권을 뺏긴 것은 대구에서 우리가 78%만 이회창 후보에게 표를 찍었기 때문이다. 호남 사람들이 DJ에게 90% 이상 표를 몰아준 것을 생각하면 이회창 후보를 안 찍은 대구 유권자 22%가 대구·경북의 자존심을 배반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번 지자체 선거 때부터 이제 우리도 뭉쳐야 정권을 되찾아 올 수 있다는 여론이 지배하기 시작했다.”(대구의 한 약사)

총선을 앞두고 철옹성처럼 두터워만 가는 TK 지역의 반DJ 정서는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극명하게 나타난다. 새해 들어 이 지역 여론조사 기관인 에이스 리서치와 대구 지역 신문사 <매일신문>이 공동으로 지역 주민 천명을 조사한 ‘16대 총선 TK 정치 의식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반DJ로 요약되는 TK 정서가 한나라당에 유리할 것이라는 응답자가 68.5%로 나타났다. 무소속은 4.5%, 국민회의는 5.8%였다. 놀랍게도 자민련은 국민회의보다 낮은 4.9%를 기록했다. 또 16대 총선의 성격에 대해서는 37%에 이르는 응답자가 현정권에 대한 중간 평가 또는 DJ 정권의 정책에 대한 국민 심판이라고 응답했고, 반드시 투표에 참여하겠다는 응답이 83%에 달했다.

여론조사를 기획한 <매일신문>의 한 관계자는 “현재 여론으로 보면 대구·경북 전체 의석을 한나라당이 석권할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일부 지식인 그룹과 지역 원로들은 소속 당과 관계없이 인물을 키워야 한다는 주장을 펴지만 바닥에서 소용돌이치는 DJ 기피 정서 앞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맹목적 지역 정서 속에 고군분투하는 국민회의 대구시지부의 한 간부는 현재 TK 지역 민심을 가리켜 ‘갈아도 갈아도 싹이 트지 않은 척박한 토양’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이어 상당수 주민 사이에 주술처럼 퍼진 맹목적인 지역 차별 정서에 대해 “이번 총선에서 대구는 현대사의 모순을 가장 집약적으로 드러낼 것이다. 말도 안되는 지역 감정 조장 유언비어를 바로잡으려고 말을 걸었다가 오히려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고 있다”라고 말했다.

선거에서 이런 지역 정서의 덕을 톡톡히 볼 곳은 한나라당. 그러나 바닥 모르게 퍼져 가는 특수한 지역 감정에 대해 한나라당 대구·경북 지부 관계자들조차도 혀를 내두른다. 대구시지부의 한 관계자는 “우리 당이 특별히 잘한 일도 없는데 몰표 심리가 퍼지는 것을 보고 현장에 있는 우리가 오히려 놀라고 있다. 무조건적인 김대중 정권 기피증으로 이번 총선에서는 한나라당이 반사 이득을 볼 게 틀림없지만, 솔직히 이런 정서는 일과성일 수밖에 없는 것 같아 오히려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원래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정서가 아니라 반DJ정서가 돌파구를 찾지 못해 ‘임시로’ 한나라당에 머무르고 있다는 진단이다. 한나라당조차 놀랍다는 반응

어쨌든 현재 한나라당 대구시지부 관계자들은 표정 관리에 여념이 없다. 대구시 13개 지역구마다 지역내 유력 인사들이 서로 공천을 따겠다고 줄을 서 있어서 어떻게 교통정리를 해야 할지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것. 이들은 대구에서는 말 그대로 한나라당 공천장이 당선 보증서나 다름없다고 보지만, 다른 지역의 눈을 의식해 요식적인 물갈이라도 해야 한다는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다.

이같은 지역 정서에 가장 당혹스러워하는 쪽은 자민련. 15대 총선에서 대구 지역 13개 선거구 중 8석을 차지한 자민련은 이번 총선에서 단 1 석도 건지기 어려운 분위기라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에 대해 자민련 경북도지부의 한 관계자는 “현재 분위기로는 자민련 간판으로 선거를 치르느니 출마하지 않는 편이 차라리 낫다”라고까지 말했다. 박철언·이정무·김복동·박구일 의원 등 역대 선거에서 나름으로 득표력을 자랑했던 이 지역 중진들도 이번에는 무소속이나 다른 정치 세력과 연대해 출마하지 않고서는 명함도 내밀기 어려운 실정이라는 것이다. 지역 정서가 그들을 얼마나 위기로 몰아붙이고 있는지는 이들 중진 중 일부가 한나라당 공천을 받으려고 비밀리에 가능성을 타진했다가 거절당했다는 자민련 관계자의 귀띔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무조건적인 반DJ 정서로 요약되는 대구·경북 민심이 확고한 대안을 찾지 못해 임시로 한나라당에 쏠린다는 점에 대해서는 여야가 인식을 같이하고 있다. 때문에 이 지역에서는 앞으로 남은 선거 기간에 TK 출신 인사들이 주축이 되는 신당을 띄우면 승부가 가능하다는 논의가 일고 있기도 하다. 김용환 의원과 허화평씨가 주축이 된 ‘희망의 한국 신당’도 지난해 말부터 분주히 틈새 비집기 활동을 벌여 왔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들도 지역 내에서는 아직까지 이렇다 할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다(25쪽 상자 기사 참조). 한나라당은 그런 움직임에 대해 이미 DJ 정권 2중대론을 펴며 바람 차단 작업을 분주하게 벌여 어느 정도 여론몰이에 성공하고 있다.

맹목적인 반DJ 정서는 대구를 벗어나 경북 각지의 시·군으로 가면 더욱 확대·증폭되는 분위기이다. 도시나 농촌이나 가릴 것 없이 경북 19개 선거구에는 지난 대선에서 TK가 압도적으로 뭉치지 못해 호남에 정권을 빼앗겼다는 피해 의식이 팽배해 있었다. 듣기에도 흉측한 지역 차별 관련 유언비어는 경북 각지의 시골에서 더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한나라당 탈당한 의원들 고군분투

국민회의·한나라당·자민련 3당의 경북도지부 관계자들은 현 상태대로라면 경북 19개 전체 지역구를 한나라당이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는 데 이의를 달지 않는다. 다만 몇몇 지역의 경우 한나라당을 탈당해 여당으로 간 의원이 과연 교두보 확보에 성공할 수 있을지가 지역 정치권의 관심사로 남아 있는 정도이다. 군위·칠곡의 장영철 의원(국민회의 예결위원장)과 안동의 권정달 의원(국민회의 부총재), 그리고 15대 총선에서 낙선한 울진·영양·봉화의 김중권 전 청와대 비서실장, 김용환 의원과 손잡은 포항 갑 허화평 전 의원이 그들이다.

허화평씨를 제외한 여권 소속 3명은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TK 정권 창출에 몸 담았다가 현정부에 합류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만큼 지역 내에서 적지 않은 인맥과 명망성을 갖추고 있는 후보들. 바로 그런 점에서 집권당은 최소한 이들만큼은 당선시킨다는 목표를 세우고 총력전을 펴고 있다.

김대통령이 집권 후 자신을 향한 맹목적인 거부 정서를 희석하기 위해 공을 들여온 TK 민심 달래기 작업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역사와의 화해를 내걸고 추진된 ‘박정희 기념관 건립’지원 정책이고, 다른 하나는 낙후한 경북 북부권에 대한 집중적인 지원(유교 문화권 개발)이다.

우선 장영철 의원의 지역구인 군위·칠곡 지역에는 요즘 가로 곳곳에 특이한 경축 플래카드가 내걸려 있다. 칠곡군이 전국 최우수 지자체로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는 내용이다. 지난해 장의원이 한나라당을 탈당해 여당에 입당하면서 군수를 포함해 군의원 대부분이 행동을 통일한 칠곡군에 대해 현정부는 집중 지원을 했다. 경북 과학대학과 전문대가 들어섰고, 왜관 공단이 들어서게 되었다. 장의원은 자기가 여당으로 옮김으로써 이런 성과들이 나타났다며, 왜관읍과 칠곡군을 묶어 시로 승격시키겠다는 공약까지 내걸고 표 모으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나 이 지역 바닥 민심은 좀체 호응할 기미가 없다. 왜관읍 상인들은 장의원에 대해 크게 두 갈래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 ‘TK 자존심을 저버린 배신자’라는 평과 ‘지역 발전을 위해 한번 밀어보자’는 반응이 그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배신자라는 평이 주류. 이에 대해 지구당 사무국장은 “당적을 옮긴 후 4천여 당원 가운데 절반도 따라오지 않고 있다. 사방에서 적군이 포위하고 있는 형국이지만 권투에서 몇 번씩 쓰러지다가 마지막 라운드에 KO승을 하겠다는 자세로 선거를 치를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이변만을 고대하고 있는 셈이다.

그 밖에도 여권이 강고한 TK 정서에 맞서 총력전을 경주하는 곳은 역시 경북 내에서도 북부 지역. 권정달 부총재(안동) 김중권 전 비서실장(울진·영양·봉화) 조은희 전 문화관광비서관(청송·영덕)을 후보로 배치해 교두보를 확보한다는 전략이다(26쪽 딸린 기사 참조).

그러나 대구·경북 전지역은 이미 지난해 실시된 국회의원 보궐 선거를 통해 반DJ 정서가 뿌리 내려 있음이 확인되었다. 4명을 뽑은 TK 지역 보선에서 한나라당이 4석 모두 석권했던 것. 정창화(의성) 신영국(문경·예천) 박승국(대구 북 갑) 박근혜(대구 달성)의원이 그들이다. 그만큼 북부권이라고 해서 TK 정서로부터 자유롭다고 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결국 대구·경북 지역에서 이변을 일으키겠다는 여권의 선거 전략은 3개월이 채 안 남은 선거 운동 기간에 TK 정서의 벽을 얼마나 깨뜨릴 수 있느냐에 달려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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