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신파 의원들 “당론이 죽어야 국회가 산다
  • 안철흥 기자 ()
  • 승인 2000.07.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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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론 정치’에 맞서는 소신파 잇따라…“만병통치식 당 처방은 난센스”
사례 하나.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기자회견이 끝난 직후 김원웅 의원이 당사 기자실에 나타났다. 그는 이회창 총재가 발표한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한나라당의 입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개인 성명을 발표했다. 한나라당 기자실은 벌집을 쑤신 듯 소란스러워졌다. 김의원을 징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 날 내내 한나라당을 지배했다.

사례 둘. 같은 날 오후 한나라당 의원총회장. 김문수 의원이 마이크를 잡았다. 김의원은 이 날 본회의 통과 예정이었던 인사청문회 여야 합의안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김의원은 청문회를 실시하는 의원들이 허위 사실을 질문하면 징계받도록 해놓고, 정작 공직 후보자는 어떤 거짓말을 해도 전혀 처벌받지 않게 되어 있는 합의안이 통과된다면 국회무용론을 넘어서서 치매국회론까지 나올 것이라고 당 지도부에 맹공을 퍼부었다. 결국 인사청문회법은 여야간 재협상에 부쳐졌고, 의원 징계 조항을 삭제하고 공직 후보자가 상징적인 선서를 하도록 하는 선에서 본회의를 통과했다.

사례 셋. 다음 날 오후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회의. 한나라당 김홍신 의원이 ‘의약 분업은 반드시 실시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유인물을 돌리고 의약 분업 6개월 연기를 주장한 한나라당 당론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의약분업안은 여야 합의로 국회에서 통과되었으나, 의사 파업 이후 한나라당은 6개월 연기 쪽으로 당론을 바꾸고 있던 상황이었다. 한나라당에 소신파가 더 많은 까닭

위에 소개한 세 가지 사례는 6월19~20일 이틀 동안 국회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총선 직후에는 젊은 당선자들을 중심으로 당론과 소신이 다를 때 소신을 펴겠다는 선언이 이어진 적도 있다. 반 세기를 이어온 ‘당론 정치’가 소수의 소신파 의원들에 의해 위기 상황을 맞고 있는 형국이다.

15대 때도 물론 소신파 의원은 있었다. 한나라당 소속이던 이미경 의원은 1999년 정부가 동 티모르 파병 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하자 한나라당 안에서 유일하게 찬성했다. 한나라당 이수인 의원도 1998년 말 당론과 위배되는 전교조 합법화 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이 둘은 결국 당에서 제명되었다. 민주당에서도 조순형·추미애 의원 등이 소신파의 맥을 이었다. 조의원은 1998년 초 안기부를 국정원으로 개명하는 안기부법 개정안이 상위법인 정부조직법에 위배된다고 반발해 여권 지도부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추의원은 야당 시절 국민회의의 특검제 당론이 집권 이후 특검제 불가 쪽으로 바뀐 것에 대해 여러 차례 반대 의사를 공개 표명했다. 15대 이전에는 유성환 의원이 통일 국시를 주장하다가 구속되었고, 이부영 의원이 김일성 조문을 주장하다가 정치권 안팎으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은 일도 있었다. 15대까지 이런 소신파들은 대대로 소수였다. 그런데 16대 국회 들어 소신파 의원이 집단으로 등장할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소신파는 민주당보다 한나라당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민주당의 경우 집권당이어서 당론을 거스르기가 상대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목진휴 교수(국민대·행정학)는 한나라당 의원 중에서 소신파가 많이 나타나는 현상에 대해 ‘이회창 총재의 카리스마가 약하고 다양한 구성원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한나라당 의원들이 소신 발언을 펼 수 있는 것은 당권 도전 과정을 거치는 동안 내부 언로가 트였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이 관계자는 민주당에도 김대통령에게 레임 덕이 생기면 소신파가 나타나기 시작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처럼 소신파가 늘어나는 현상은 역으로 보면 보스 중심의 우리 정당 정치가 한계를 맞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정당들은 보스 1인과 측근들에 의해 모든 결정이 가능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의원들은 단지 당론에 충실히 따르기만 하면 되는 거수기였다. 16대 개원 국회 직후 민주당의 한 초선 의원은 ‘나는 의원이 아니라 당원’이라고 자조하기도 했다.

이처럼 의원으로 하여금 ‘당원’ 이상의 역할을 못하게 막는 족쇄가 바로 당론을 앞세우면서 비대해진 중앙당 정치이다. “총재 직을 없애자”

물론 의회 정치는 정당 정치를 기반으로 삼는다. 따라서 정당이 당론을 정하고 의원들에게 이를 따르도록 요구하는 것은 당연할 수도 있다. 민주당 조순형 의원은 당론이 있어야 한다고 전제하면서 “당론이 민주적이고 공개적이고 투명한 절차를 거쳐 형성된다면 소속된 의원은 당의 기율과 당론에 복종할 의무가 있다”라고 말한다. 다만 정파의 이익이 국가의 이익이나 개인의 양심에 반할 때만 당론을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대부분의 당론이 투명하고 민주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당 지도부에 의해 사전에, 일방적으로 결정된다는 데 있다. 15대 때 국회 보건복지위원을 지낸 민주당의 한 의원은 자기 ‘전공 분야’인 통합의료보험법 당론이 자신도 모르게 결정된 사실을 알고 당 지도부에 이의를 제기했다가 ‘당론이니 따르라’는 말에 무안해 했던 경험을 털어놓기도 했다. 한나라당의 한 초선 의원은 “당론으로 정해진 사안에 반론을 제기하려면 목을 내놓는 심정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벌써 알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이런 정치 구조를 감안할 때 의원 개개인에게 소신 행동을 요구하는 것보다는 당론 자체를 없애거나 최소화하는 쪽으로 정치 문화를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우리나라 정당 정치의 구조는 지역 중심 대결 구도이다. 정권 교체가 수십 년간 지연되면서 여야 관계도 정책 대결보다는 정권 투쟁 관계로 형성되어 왔다. 여야는 지금껏 한 번도 상대방을 동반자로 생각한 적이 없다. 그래서 한쪽이 A를 주장하면 다른 한쪽은 으레 B를 주장하는 식이었다. 정책이 단순한 반대 논리에서 나올 때가 많았던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 정당은 이념적 색깔도 없다. 지역 차이만 있을 뿐이다. 정치 구조가 이렇다 보니 정책은 정쟁 대상이 될 뿐이다.

임혁백 교수(고려대·정치학)는 현대의 다원화 사회에서 한 정당이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분야를 파악하고 지침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 “정당은 소속 의원들에게 이념의 틀만 제공하고, 나머지 정책 문제들은 의정 활동을 하는 의원에게 맡겨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임교수는 의회 정치 발전의 가장 기본적인 장치로 크로스보팅 정착을 들었다.

나아가 중앙당을 축소하고 1인 보스의 영향력을 줄이는 것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임혁백 교수는 “책임 정치를 위해서도 대통령의 당적 이탈을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대통령이 집권당 총재 직까지 맡는 것은 문제이다”라고 지적했다. 박찬욱 교수(서울대·정치학)도 “여소야대 상황에서 정치를 정쟁 대결이 아니라 정책 대결로 몰아가기 위해서는 대통령이 집권당 총재 직에서 물러나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나아가 박교수는 정당의 힘이 너무 강하다 보니 국회가 마비되고, 의회의 행정부 견제 기능도 발휘되지 못한다면서, 총재직 자체를 없애고 중앙당을 대폭 축소해서 원내 중심의 정당 운영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행정학자들은 비대한 중앙당의 당론 정치가 국가의 일관된 정책 노선에까지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지난 총선 전에 쏟아져 나온 각종 총선용 경제 대책들. 목진휴 교수는 1인 보스의 붕당 정치가 형성한 인기몰이 당론이 정부의 정책을 좌충우돌하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한다면서 “행정부 관료들을 만나보면 집권당 때문에 곤혹스럽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라고 전했다. <행정권과 국민권 확보를 위한 정당권 축소에 관한 연구 designtimesp=9375>라는 논문을 발표한 김천붕 교수(전주대·행정학)는 정당의 힘이 강할수록 행정부와 국회가 제 구실을 못한다는 사례를 들면서, 정부와 국회에 대한 정당의 침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정당권을 축소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젊은 초선들이 견인차 되어야

그러나 무어니 무어니 해도 국회 기능을 정상화하려면 의원 스스로 국회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지적이 높다. 1980년대까지는 사실상 정치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었다. 또한 1990년대 이후 10년 간은 반 세기 동안 야당을 통치해온 ‘보스’들의 시대였다. 보스 시대가 저무는 지금이야말로 정치권에 ‘정치다운 정치이자 최초의 정치’를 도입할 시점이라는 것이 정치학자들이 의원들에게 던지는 조언이다. 그리고 그 역할은 기존 정치인보다는 젊은 초선 의원들이 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정치 분야는 절대적인 상부 구조이다. 어느 누구도 정치권을 변화시킬 수 없다. 정치권 스스로 변할 수밖에 없다. 소신파 의원들의 돌출 행동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러나 돌출 행동이 별로 나오지 않는 이유는 의원 개인의 기반이 약하기 때문이다. “당이 공천하지 않아도 의원 스스로 당선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면 누가 건드리겠는가. 의원들은 자신의 정치 생명을 총재가 아니라 지역 주민에게서 찾아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도 상향식 공천을 통해 공천 민주화와 지역 기반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정치 개혁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한나라당 김영춘 의원의 말이다.

그러나 총재 한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은 쉽지만 다수의 지역 주민을 상대하기는 어렵다. 공천권은 의원 스스로 보스 정치의 족쇄를 뚫고 나오지 못하게 하는 ‘족쇄’이자 보스에게만 잘 보이면 손쉽게 재선을 보장하는 ‘사탕’이기도 하다. 때문에 의원 스스로 기득권을 버리고 독립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만 정치 개혁이 가능하다는 것이 정치권을 바라보는 주변의 충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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