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대선, 사조직은 가고 공조직이 온다
  • 吳民秀 기자 ()
  • 승인 1996.1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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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국당 “대선은 당 중심으로” 공조직 강화론 대세… 강삼재 총장 주도해 체질 개선 한창
역대 대통령 선거 때마다 여권 주변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던 공통점 한 가지. 다름 아닌 ‘사조직의 위력’이다. 87년 민정당 노태우 후보 당시에는 박철언이 이끌던 월계수회가, 92년 민자당 김영삼 후보 때에는 최형우의 민주산악회(민산)와 서석재의 나라사랑운동실천본부(나사본)가 사실상 여권의 주력군이었다. 노태우 후보나 김영삼 후보 모두 여권 공조직을 불신했다. 공조직에는 ‘아군인지 적군인지 분간이 안가는’ 사람이 수두룩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기 당 후보 진영의 동향을 염탐해서 계파 보스에게 전달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물론 당시 여권 후보 진영에서는 득표 전략 때문에라도 사조직에 힘을 실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즉 민정당은 싫지만 노태우를 좋아하는 유권자를, 마찬가지로 민자당은 싫지만 김영삼을 좋아하는 표를 끌어모아야 한다는 ‘명분’이 있었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표를 긁어모으는 데 사조직만큼 강력한 효과를 거두는 것도 없다.

그렇다면 내년 대선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벌어질 것인가. 정권이 들어서고 실업자 신세를 면치 못했던 ‘정치 예비군’ 사조직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정치권이 대선 국면에 접어듦에 따라 새롭게 떠오르는 화두이다.

그런데 요즘 정치권, 특히 여권 일각에서는 사조직 무용론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있다. 물론 아직 요란한 소리를 내지는 않는다. 그러나 내년 선거만큼은 당 중심으로 치러야 한다는 공조직 강화론이 이미 대세를 형성하는 형국이다.

신한국당 강삼재 사무총장이 첫 시동을 걸었다. 11월28일 신한국당 당무회의는 당 사무처 조직 개편과 관련한 당규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연말 대규모 당 사무처 인사를 앞두고, 당 조직을 선거 체제로 재편한다는 방침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전담 팀제를 적극 도입한다는 점이다. 기업체의 조직 기법을 정치판에 원용하자는 생각이다. 이에 따라 종교팀·정보관리팀 등 4~5개 분야의 전담 팀이 만들어질 예정이고,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별도의 전담 팀을 구성한다는 계획이다. 기업체처럼 연공서열도 파괴할 것으로 보인다. 능력이 있는 인물은 언제든지 발탁해서 쓰겠다는 것이다.사조직 가동 비용도 엄청난 부담

당 기간 조직도 대규모 수술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성격상 사조직 지향이기 마련인 방대한 직능 조직들을 이제는 당이 관리하도록, 직능국을 확대 개편한다. 정치 쟁점에 대한 대변인의 성명과 논평 업무를 보좌하는 기능에 머물렀던 대변인실도 적극적인 언론 홍보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인력을 보강할 예정이다. 또한 여야 총무가 내년 대선에서 후보 간에 텔레비전 토론을 하기로 합의함에 따라 당 홍보국 안에 ‘TV토론 준비팀’을 꾸리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그밖에 당의 정책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정부 부처의 고위 관료를 파견 형식으로 당에서 끌어다 쓰는 방안도 적극 모색하고 있다.

현재 이러한 모든 작업은 강삼재 총장이 주도하고 있다. 한마디로 사조직 위세에 눌려서 당이 제구실을 못했던 92년 대선과 달리, 내년 대선에서는 철저하게 공조직 우위로 선거판을 만들어가겠다는 것이 강총장의 생각이다. 가뜩이나 당직자들이 제각기 차기 주자들 쪽에 선을 대려는 움직임에 대해 경계의 목소리가 제기되던 차였다. 청와대의 한 인사는 강총장이 지금부터 잘 챙기지 않으면 앞으로 별 희한한 일이 다 벌어질 것이라며, 여권 핵심부가 어떤 구도로 이번 당 조직 개편을 진행하고 있는지 내비쳤다.

즉 당내 경선 과정에서부터 불거져나올 것이 뻔한 차기 주자들의 사조직 세 확산 경쟁을 막지 않으면, 권력 누수 현상이 예상보다 일찍 찾아오고, 당이 사분오열되는 사태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여권 특유의 위기의식도 작용했다고 보인다. 한마디로 YS는 당내 차기 주자 어느 누구에게도, 집권자를 상대로 권력을 ‘쟁취’한 자신의 전철을 되밟게 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민주계 핵심 인사들 중에는 사조직 무용론을 반증하는 전거로 ‘92년의 특수 상황’을 거론하는 이들이 많다. 트로이 목마에 병사를 숨겨 성을 함락시켰던 YS에게 사조직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면, 내년 대선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그런 인물이 나와서도 안되고 될 수도 없다는 논리다. 차기 대선 후보는 어디까지나 민주계 스스로의 정권 재창출 차원 아니면, 최소한 민주계를 중심으로 하는 정권 재창출 차원에서 후보가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공조직 강화론의 배경에 꼭 권력의 논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근본적으로 내년 대선이 과거와는 판이한 환경에서 치러질 수밖에 없다는 인식도 짙게 깔려 있다.

우선 제아무리 집권당이라고 해도 과거처럼 돈을 무한정 투입하는 선거 방식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점이다. 비록 허점투성이지만 금융실명제 아래에서 돈의 이동이 쉽지 않은 데다가, 철저하게 돈 선거를 막고 있는 선거법도 적잖게 신경이 쓰이는 대목이다. 즉 ‘사조직은 공중전화’라는 선거 전문가들의 격언에 비춰보면, 대규모 사조직을 가동하는 것 자체가 여권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이다. 공중전화를 걸려면 동전을 넣어야 하듯이 사조직을 움직이려면 반드시 거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공조직 대 사조직 비율 5:1이 적당”

여야 총무 협상에서 여당이 순순히 ‘후보 TV토론’을 받아들인 배경에도, 내년 대선이 사조직을 동원해서 물량 공세를 펴는 세력 과시 싸움이 아니라, 기획 선거 또는 홍보전으로 갈 수밖에 없음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지난 서울시장 선거 때 극명하게 드러났다. 당시 조 순 후보와 박찬종 후보로 압축되던 서울시장 선거에서 성패를 가름했던 분수령은 누가 바닥 표를 훑는 데 주력했느냐 하는 점이 아니라, 텔레비전 화면에서 누가 더 호소력 있게 유권자의 마음을 움직였느냐 하는 점이었다.

현재 여권에서 ‘공조직 강화론’은 일종의 대세이다. 여권 핵심부의 결론도 그 쪽으로 기울고 있다고 알려진다. 그렇다고 사조직의 역할을 완전히 무시하는 ‘무용론’으로까지 발전하지는 않은 것 같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공조직 대 사조직의 비율을 4:1 또는 5:1로 짜는 것이 바람직하다. 내부 가상전쟁의 결과가 그렇다”라고 전한다.

그러나 사조직에 대한 통제가 뜻대로 이루어질지는 알 수 없다. 우선 여당 후보가 과연 YS의 뜻대로 움직일지 모르는 데다가, 다급하기 마련인 후보 처지에서 사조직의 유혹을 쉽사리 뿌리칠지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권력의 공유라는 절묘한 ‘힘의 균형’ 아래에서도 쉽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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