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구룹 대북 사업 막후 스토리
  • 吳民秀 기자 ()
  • 승인 1998.11.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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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그룹 대북 사업 막후 스토리/장석중씨는 계기 제공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이 10월27일 소떼 5백1마리를 몰고 재방북했다. 정명예회장은 지난 6월 민간인으로는 처음으로 소떼 5백마리를 몰고 판문점을 통해 방북했었다. 최근 그가 두 차례 방북한 막후 과정이 밝혀졌는데, ‘총풍 사건’이 비밀을 푸는 한 계기를 제공했다. 바로 수사 당국에 의해 반국가단체(북한)와의 회합죄로 기소된 총풍 3인 중 한 사람인 장석중씨가, 현대그룹의 대북 사업 추진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장씨는 지난 1월24일∼2월3일 옥수수 박사 김순권 교수와 함께 방북했다(두 사람은 5월에도 함께 방북했다). 방북 기간에 두 사람은 정주영 명예회장의 고향인 강원도 통천을 방문했다. 북한 당국은 김박사 일행의 통천 방문 때 카메라 기자를 동행시켰다. 김박사와 장씨는 정씨의 생가를 둘러보았고, 특히 정명예회장의 숙모를 비롯해 일가와 만났다. 북한 당국은 당시 전과정을 카메라에 담았고, 정명예회장에게 전달하라며 김박사 일행에게 비디오 테이프를 건넸다. 또한 현대그룹의 대북 사업과 관련한 메시지도 두 사람을 통해 전달했다. 한마디로 정명예회장을 평양으로 초청하겠다는 뜻이었다. 북측과 정명예회장은 장씨를 매개로 초청장 문제를 협의하기도 했다.

한편 김박사와 장씨는 1월 방북 직전 인사차 정명예회장을 접견했고(이때는 주로 통천의 육종연구소 문제로 담화했다), 북한을 다녀와서는 북측의 메시지와 비디오 테이프를 전달하기 위해 정명예회장을 다시 찾았다. 특히 김박사 일행이 정씨 숙모를 만나서 나눈 대화 내용을 담은 비디오 테이프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리만큼 감동적이었다. 정명예회장이 국제 옥수수 재단의 명예이사장 직을 수락하고 5억원을 선뜻 기증한 것은, 김박사 일행의 노고에 대한 답례였다.

정명예회장은 김박사와 장씨를 만난 직후 곧바로 대북 사업을 추진했다. 현대그룹 내부 사정에 밝은 한 정통한 소식통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북한 방문과 대북 사업 재개를 추진하기 위해 여러 아들들에게 ‘확실한 북한 라인’을 뚫도록 지시했다. 이 소식통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재산 10%를 대북 사업에 투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정명예회장이 재산 10%를 대북 사업에 투자하겠다는 결정은, 현대그룹의 경영권 승계와 관련해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대북 사업권을 따내는 인물이 경영권 승계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북한 라인 잡기’ 경쟁에서 정몽헌 회장 승리

정명예회장이 이러한 결정을 내린 뒤 현대그룹 내에서는 ‘북한 라인 잡기’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주로 정몽구 회장과 정몽헌 회장 간의 경쟁이었다. 1라운드는 정몽헌 회장의 승리였다.

이 경쟁은 그동안 현대그룹과 관계를 맺어 온 대북 사업가를 활용하는 일종의 ‘대리전 성격’을 띠었다. 여기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인물이 바로 장석중씨와 일본인 요시다 다케시(吉田猛) 씨다. 장씨가 정몽구 회장을 대신해 북측과 접촉했다면, 요시다 씨는 정몽헌 회장이 개설한 대북 채널이었다.

물론 현재 정몽헌 회장이 현대그룹의 대북 사업을 총괄하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장석중과 요시다의 경쟁에서 장씨는 패했다. 그렇다면 지난 4월 베이징에서 열린 남북 비료 회담을 막후에서 중개할 정도로 북한내 실력자들과 두터운 친분을 쌓아 온 장씨가 경쟁에서 진 이유는 무엇일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요시다라는 인물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요시다 다케시 씨는 도쿄와 평양에 사무실을 둔 무역회사 ‘신일본 산업’ 회장. 취급 품목은 철강·광물이었는데 얼마 전부터 수산물 거래에도 뛰어들었다. 부친이 5년 전 사망하자 사업을 물려받았다. 그의 부친은 함경도에서 태어나 귀화한 일본인. 북·일 관계에 밝은 한 소식통에 따르면, 신일본산업은 요시다의 부친 시절부터 북한이‘뒤’를 보아준 회사라고 한다. 현재 요시다의 평양 사무실은 보통강 호텔 안에 있다. 요시다의 대북 채널은 아태평화위 송호경 부위원장·황 철 국장·강종훈 서기장 등 북한의 일본 담당 라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배경을 활용해 요시다는 YS 정권 시절인 95년 일본 자민당의 쌀 북한 지원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당시 그는 일본 자민당의 가토 고이치 정조회장 막후에서 대북 채널로 뛰었다. 물론 요시다의 이러한 활약은, 그의 부친이 쌓아놓은 북한 고위층과의 관계 덕을 본 것이라고 한다. 요시다의 부친은 생전에 김일성 주석과 매우 가깝게 지냈고, 김일성으로부터 공로 훈장까지 받았다.

정몽헌 회장이 현대그룹의 대북 사업을 총괄하게 된 1차적인 요인은, 이처럼 70년대부터 북한 최고위층과 두터운 관계를 맺어온‘요시다 부자’의 인맥에 힘입은 바 크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요시다를 정몽헌 회장과 연결한 인물이 바로 이익치 현대증권 사장이다. 한 정통한 소식통에 따르면, 이익치 사장과 요시다는 오래 전부터 친분을 쌓아 왔고, 이사장은 대북 투자 결정이 내려지자마자 곧바로 요시다를 파트너로 끌어들였다. 요즘 현대그룹에서 이익치 사장을 ‘소몰이 방북의 숨은 주역’으로 꼽는 이유이다.

어쨌든 대북 투자 사업에 대한 정주영 명예회장의 방침이 결정된 직후, 정몽헌 회장의 행보는 재빨랐다. 그는 2월8일 베이징에서 극비리에 전금철 아태평화위 위원장과 회동했다. 이익치 사장과 요시다 라인이 이 회동을 주선했고, 전금철 위원장과의 회동에도 동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동에서 정명예회장의 방북과 대북 투자 사업이 논의되었고, 일부가 양측 간에 합의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시사저널>은 이익치 사장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응답이 없었다.현대 대북 채널 가동 시점, 비료회담과 일치

여기서 눈여겨 보아야 할 대목은, 정몽헌 회장측과 북측 간의 채널이 재가동된 시점이 지난 4월 베이징의 남북 비료 회담 개최 시점과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북한 당국은 한국 정부와 비료 지원 협상을 벌이면서, 한편으로는 현대그룹과 대북 사업을 논의했다. 당시 현대그룹은 베이징에서 북측과 접촉했고, 북측이 이산 가족 상봉 문제로 비료 회담(4월11∼17일)을 결렬시킨 다음날인 4월18일 김윤규 현대건설 부사장(현재는 사장)을 비롯한 3인이 평양을 방문했다. 당시 방북 3인 중에 이익치 사장이 포함되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문제는 북측이 비료 회담을 결렬시킨 배경 중의 하나로, 현대그룹의 대북 사업 추진을 거론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북측 인사와 접촉했던 한 정보원이 작성한 보고서에서 확인된다. 다음은 보고서에 나오는, 북한의 고위 관계자가 이 정보원에게 전한 말이다. ‘남측에서 쉽게 비료를 주기로 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 이럴 바에는 민간 쪽으로 방향을 돌려 지난날처럼 해버리고, 당국간 회담은 힘을 싣지 않겠다. (북한은) 급해 죽겠는데, 민간에서는 주겠다고 안달인데, 남측(한국 정부)에서는 무슨 말이 그렇게 많은가.’

또 다른 소식통은 “북한 군부가 ‘한국 기업체에서는 공짜도 저렇게 많이 주겠다고 하는데, 한국 정부는 겨우 비료 20만t 지원하겠다면서 그토록 까탈스럽게 구는 이유가 뭐냐(이산 가족 상봉 조건을 지칭). 당장 철수하라’고 당시 베이징 비료회담팀에게 지시했다”라고 증언했다.

통일부 국정 감사에서 한나라당 이신범 의원은 현대그룹이 2030년까지 금강산 지역 단독 이용 및 개발권을 갖는 조건으로, 북한에 2004년까지 6년간 총 9억4천2백만 달러를 다달이 나누어 지급하기로 북한과 이면 계약을 맺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강인덕 통일부장관은 ‘협상 중인 사안은 공개할 수 없다’고 버티다가, 이틀 뒤 이면 계약 의혹을 뒷받침하는 일부 자료를 이의원에게 제출했다.

또한 <시사저널>은 현대그룹의 한 핵심 인사가 북한의 아태평화위에 ‘대북 사업 통합 추진 담보서’를 요청한 사실을 확인했다. 이는 금강산 관광 개발을 포함해 앞으로 현대그룹의 ‘모든’ 대북 사업에 대해, 북한과 일괄 타결하자는 제안. 한마디로 정몽헌 회장이 현대그룹의 대북 사업을 총괄한다는 데 북측이 공식 합의해 달라는 얘기이다. 그러나 현대그룹의 이러한 요청을 북측이 수용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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