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기 주자 손학규·이명박의 ‘同夢異行’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4.04.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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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두 차기 주자 총선 행보 대조적…손 ‘확실히’ 이 ‘신중히’
한나라당 소속인 손학규 경기도지사와 이명박 서울시장의 행보가 정가의 화제다. 평소 신중한 모습을 보여 온 손지사는 총선 정국에서 저돌적으로 움직인 반면, 추진력이 강하다는 평을 듣는 이시장은 신중한 태도를 견지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엇갈린 움직임은 총선 이후 펼쳐질 한나라당의 차기 대권 주자 경쟁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이번 총선에 ‘올인’했다는 소문이 나도는 손지사는 선거법까지 위반했다. 4월6일 경기도 선거관리위원회는 손지사에게 A4 용지 두 장짜리 공문을 보냈다. 제목은 ‘공무원의 중립 의무 준수 요청’이었다. 선관위는 공문에서 ‘4월4일 오전 10시쯤 경기도 의왕시에 있는 성나자로 마을을 방문해 요양 중인 환자들 앞에서 “육영수 여사가 지어준 이 ‘정결의 집’ 앞에서 따뜻한 햇살을 받고 계시니 얼마나 행복하세요. 잠시 뒤면 박근혜 대표께서 오십니다”라고 말한 것은 선거법 9조를 위반한 것이다’라고 명시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위반한 것과 같은 조항이다.

선거법 9조는 ‘공무원, 기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자는 선거에 대해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해서는 안된다’고 되어 있다. 손지사는 4월8일 기자와 만나 “선관위의 결정을 존중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선거운동을 하는 장소도 아니었고,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발언을 한 것도 아니다. 평소 자주 가던 곳인데 우연히 박근혜 대표를 만났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손지사는 성나자로 마을을 방문한 그 날 오후 수원 팔달에서 열린 한나라당 유세장에도 모습을 드러내, 박대표와의 만남을 단순한 ‘우연’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약해 보인다.

손지사가, 이정문 용인시장이 한나라당을 탈당한 것과 관련해 4월8일 오후 2시 경기도청 기자실에서 가진 기자간담회는 또 다른 논란을 불렀다. 도지사가 산하 단체장이 탈당했다고 기자간담회를 한 것도 이례적이었고, 참석한 기자들 사이에 손지사가 무리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발언 강도가 셌기 때문이다.

손지사는 간담회에서 “아직까지도 이런 비열한 공작이 횡행하는 것을 개탄한다”라고 말했다. 손지사는 이런 내용의 성명서를 중앙당 기자실에도 배포했다. 그러나 그는 증거를 갖고 있다고만 했을 뿐, 기자들의 잇단 질문에도 ‘정치 공작’의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손지사는 “도지사로서 소속 단체장에 대한 부당한 압력과 공작을 방어하는 것은 자치단체의 정치적 중립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주장했지만, 열린우리당은 손지사의 불법 선거운동이 도를 넘었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열린우리당 경기도지부 이재휘 조직국장은 “선관위가 손지사에게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고 있어 유착 의혹마저 일고 있다. 선관위는 손지사를 조사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열린우리당은 4월9일 손지사를 선거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총선 정국에서 드러난 손지사의 행보는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으로 보인다. 원활하게 지사 직을 수행하기 위해서든, 경기도를 노둣돌 삼아 대권을 노리기 위해서든 한나라당이 경기도에서 의석을 얼마만큼 차지하느냐가 손지사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상황은 그리 좋지 않다. 총선을 6일 앞둔 4월9일 현재 한나라당은 경기도와 인천을 취약지로 분류했다. 특히 수원 영통에 출마한 한현규 전 경기도 정무부지사, 광명 갑에 출마한 정성운 전 경기도 서울사무소장, 시흥 을에 출마한 이철규 전 경기개발연구원 원장, 의정부 을에 출마한 정승우 전 경기도 행정부지사, 안양 만안에 출마한 정용대 전 손학규 경기도지사후보선거대책부본부장 등 이른바 ‘손학규 사단’ 후보들은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홍영기(용인 갑) 김홍규(평택 을) 등 도의원 출신으로 손지사와 가까운 후보들도 상황이 비슷하다. 이 때문에 손지사가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기 위해 총대를 멨다는 것이다.

손지사가 ‘집토끼 수호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한나라당이 ‘차떼기’ ‘탄핵’으로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손학규가 뛰고 있다’는 사실을 당원들에게 보여주어 유대감과 신뢰를 확보하려 한다는 것이다. 차명진 경기도 공보관은 “손지사는 행정 수도 이전과 수도권 규제 문제와 관련해 노무현 정권과 대립각을 세우는 등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다”라고 말했다.

반면 이명박 서울시장의 행보는 손지사와 뚜렷이 대비된다. 4월9일, 한나라당 서울 강북 지역의 한 출마자는 서울시 고위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어 ‘이시장이 너무 몸을 사리고 있다’고 항의했다. 이런 전화는 총선 기간에 여러 번 서울시에 걸려왔다. 이시장은 한나라당이 ‘천막 당사’로 옮긴 날, 현장을 방문하러 가다가 열린우리당측이 ‘서울시가 특혜를 줬다’고 주장하자 도중에 차를 돌린 적도 있다.

이시장 대신 현장을 뛰는 것은 부인 김윤옥씨이다. 얼마 전 한나라당 중구지구당을 격려 방문했고, 이시장의 형인 이상득 의원이 출마한 경북 포항에도 다녀왔다. 이춘식 서울시 정무부시장은 “김씨가 프로그램을 짜서 다니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곳을 방문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시장은 현장 대신 후보들의 홍보물에서 맹활약한다. ‘서울시장과 함께 고민했습니다!’ ‘이명박 특보로 활동하며…’ ‘이명박과 ○○○이 뭉쳤습니다!’. 한나라당 서울 지역 후보들의 홍보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구들이다. 이시장과 함께 찍은 사진도 거의 빠지지 않고 들어 있다. 청계천 복원을 계기로 생긴 ‘일하는 시장 이명박’이라는 이미지를 후보들이 십분 활용하는 것이다.

이춘식 부시장은 “이런 저런 방법을 알아보았는데, 선거법이 너무 엄격해서 시장이 움직일 여지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포기하고 시정에 전념하기로 했다”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손지사와 이시장은 3월23일 한나라당 대표 경선을 앞두고 출마 여부를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그러나 손지사는 ‘도지사 자리를 활용해 대권 도전을 한다’는 여론을 의식해 포기했다. 시장 직을 유지하며 당 대표에 출마한 외국 사례까지 조사한 이시장도 막판에 우리 실정과 맞지 않는다고 판단해 출마하지 않았다.

한나라당의 유력한 차기 주자로 꼽히던 두 사람은 ‘박근혜’라는 강력한 변수를 만나 뭔가 활로를 뚫어야 하는 상황을 맞았다. 정치권에서는 두 사람이 총선 이후 어떤 형태로든 승부수를 던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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