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 리더 시리즈 ②/원희룡 한나라당 의원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4.05.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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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갈아엎어 보수 세력 판갈이
그는 외유내강형이다. 항상 웃음 띤 얼굴로 사람을 맞는다. 작은 키에 천진난만한 얼굴, 논리적이면서도 부드러운 어투에서는 강인함을 느낄 수 없다. 1982년 대입 학력고사와 1992년 사법시험에서 수석을 했다는 경력 때문에 ‘천재’ 이미지도 있다. 그러나 그의 가슴 속에는 마그마가 들어 있다. 끓어 넘치기 전까지는 조용하지만 일단 분출하면 무섭다.

올해 41세인 한나라당 원희룡 의원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외친다. “한나라당은 이대로는 집권이 불가능하다. 한나라당 또는 한나라당 개혁 세력을 집권 가능한 정치 세력으로 만들기 위해 야전 사령관이 되겠다.” 그의 가슴 깊은 곳에 잠자고 있던 마그마가 본격적으로 용트림하기 시작한 것이다. 17대 국회에서 ‘재선 의원 원희룡’이 주목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원의원의 강력한 실천 의지를 엿보게 하는 단적인 사례는 새벽기도다. 그는 지난 3월 말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기도를 해왔다. 격동의 시대에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영혼과의 대화가 절실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신앙적으로 성숙해 가고, 정치적으로 자신을 단련해 가는 과정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종(從)’이 되어 보수 세력을 변화시켜 내겠다는 것이 그의 뜻이다.

신앙제일주의 운동권 출신의 ‘전향’

원의원의 세계관을 독해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코드를 주목해야 한다. 우선 모태 신앙이다. 제주도에서 유기농법으로 귤을 재배하는 원의원의 아버지는 제주도에서 교회를 여럿 개척한 독실한 기독교 장로이고, 어머니는 집과 교회를 오가는 것이 생활의 거의 전부인 권사이다. 하나뿐인 원의원의 형도 목사다. 원의원은 “우리 집안은 신앙제일주의다. 자식 둘 가운데 한 명은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것이 아버지의 평생 기도 제목이었다. 만약 형이 목사가 되지 않았다면 내가 목사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교회를 가고 예배를 보는 것은 어릴 적부터 그의 생활이고 문화였다.

그가 항상 미래를 긍정하는 낙천적인 성격을 갖게 된 것도 신앙과 관련이 깊다. 그는 결과는 신에게 맡기고 겸허하게 노력하면 건강한 사회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제주의 촌놈 수재’였던 그가 사회 의식에 눈뜬 것은 서울대 법대 1학년이던 1982년, 5·18민주화운동의 실상을 알고 나서다. 교과서에서 배운 민주주의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의 머리를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경찰에게 쫓기고 얻어맞아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피 흘리는 선배들을 보며 그는 1982년 5월 도서관을 나와 광장으로 갔다. ‘개벽’한 것이다.

알려져 있지 않지만, 원의원은 대학 1학년 때부터 서울대 문과대학이 중심이 된 이념 동아리 ‘사회복지연구회’에 가입해 체계적으로 사회과학을 공부했다. 서울대 총학생회장을 지내고 행정·외무·사법 고시에 합격한 이정우 변호사가 당시 사회복지연구회 선배였다.

그는 1980년대를 광주 학살에 분노한 그 힘으로 보냈다. 2학년 때 시위 현장에서 붙잡혀 유기 정학을 받았고, 이후 구로공단의 한 교회에서 여성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6개월간 야학을 했다. 당국의 주목 대상이 되어 수배된 것도 이때다. 1985년 1월에는 인천에 있는 한 금속 공장에 일당 2천9백원을 받는 노동자로 취업해 6개월간 일한 적도 있다. 잔업과 철야 근무를 다반사로 했는데, 심지어 3일 연속 철야한 적도 있다. 공장에 한두 달씩 위장 취업하는 일은 방학 때면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이 과정에서 죽음의 고비도 겪었다. 한 금속 공장에서 일할 때였는데 서투른 솜씨로 기계를 끄다가 날카로운 금속 휠에 목이 스쳐 기절하는 위험천만한 일을 겪었다. 원의원은 “순간적으로 아! 이렇게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 몰아닥친, 소련을 필두로 한 사회주의권 몰락으로 그의 세계관은 다시 한번 뒤바뀌었다. 충격 속에서 나름의 해답을 찾기 위해 발길 닿는 대로 떠난 50일 간의 여행에서 그는 나환자·승려·농민 등 민초들을 두루 만난 뒤 생각을 정리했다. 사회주의적인 모델을 우리 사회에 적용하려고 했던 근본 전제가 틀렸고, 더 이상 인간을 목적의식적으로 대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운동권 논리로 치면 ‘전향’한 것이었지만, 그는 “내 생각의 진솔한 흐름을 따라 갔다. 고통스런 시기였다.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방황을 끝내고 내면의 자유를 얻었다”라고 말했다.

1992년 사법고시에 수석 합격한 뒤 서울과 부산 등에서 검사를 지내고 변호사로 있던 2000년, 원의원은 16대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언뜻 보면 그가 걸어온 1980년대와 어울리지 않는 선택이었기에 논란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확고하다. “전통적인 산업화 세력과 개혁 세력이 결합해 있는 정치 세력이라는 데 의미를 두었다. 우리 나라가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한나라당의 개혁 세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라는 것이다. 소련의 몰락을 겪으며 정립한 세계관은 1990년대 이후의 그를 이해하는 데 여전히 유효한 코드다.
그는 지금 보수 세력 판갈이를 노리고 있다. 현재의 한나라당은 갈아엎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런 그의 생각은 경우에 따라 집을 새로 짓는 것으로 비약할 가능성도 있다. 17대 총선을 통해 한나라당내 앙시엥레짐(구체제)은 일정 부분 붕괴했지만, 영남 세력과 일부 강경파가 개혁 그룹에 대한 공세를 멈추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원의원은 “한나라당이라는 거함을 끌고 가는 예인선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거함이 예인선에 끌려오지 않고 오히려 예인선을 침몰시키려 한다면 새로운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그는 남경필·정병국·권영세 의원 등 이른바 ‘골통 모임’ 개혁파 의원들과 이런 공감대를 넓혀가고 있다. ‘주인’된 처지에서 한나라당을 변화시키겠다는 원의원의 노력은 일단 박근혜 대표 체제를 강화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가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정치인’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것이 그의 가장 큰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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