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 메이커, 대통령 부럽지 않다
  • 최진 기자 ()
  • 승인 1996.10.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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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김 이후’ 군웅 할거, 다계보 시대 전개될 듯…차기 주자들 일찌감치 세 불리기 주력
 
최근 서울 시내 ㄹ호텔에서는 희한한 정치 모임 하나가 몰래 열렸다. 현 정권 들어 YS에게 ‘팽’되어 함께 감옥살이를 한 ‘칠중회’라는 감방 동기들의 모임이었다고 한다. 야당 중진 의원과 군 고위 장성 출신 7명이 회원인데, 매달 한두 차례 모임을 갖는다는 것이다.

확실히 요즘 정치판은 ‘회합의 정치’라고 불릴 만큼 이런저런 모임이 많다. 15대 국회에 등록한 여야 의원들의 연구 모임은 40개가 넘는다. 정치 분석가들은 이러한 정치권의 소집단화 현상을 3김 시대 이후의 다계보 시대와 연결지어 생각하기도 한다. 즉 3김씨의 우산 아래 모여 있던 여야 의원들이 각자 제 갈길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으며, 그것이 자그마한 모임의 활성화로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다.

정치권의 다계보화와 개별화를 주도하는 세력은 단연 여권내 차기 대권 주자들이다. 대권 주자 가운데는 97년 대선을 계기로 3김 시대가 가고 여러 보스가 공존하는 다계보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전망하는 사람이 많다. 요컨대 여권에서는 대통령 1인이 거의 모든 권력을 독점하는 유아독존식 통치 권력이 사라지고, 몇몇 강자가 함께 영향력을 행사하는 군웅 할거 시대가 온다는 것이다. 계보원을 많이 거느린 보스가 국정 전반에 걸쳐 대통령 못지 않게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곧 계보의 파워로 권력의 파워를 가늠하는 70년대식 계보 정치 시대가 오리라는 관측이다.

대권 도전 의지를 강하게 불태워온 최형우 고문은 최근 난데없이 ‘킹 메이커론’을 들먹였다. 정가의 한 분석가는 최고문의 말을 이렇게 분석했다. “그는 자기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안다. 하지만 당내 조직 기반이 가장 탄탄한 최고문이 특정 주자를 지원해 당선시킨다면, 그는 대통령을 능가하는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신한국당 주자 가운데 누가 정권을 잡더라도 YS만큼 강한 카리스마를 발휘하지는 못하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다. 현재 여권에서는 대권 주자로 거론되고 있는 이른바 아홉 용 가운데 과연 누가 1백50명이 넘는 여당 의원들을 통제하면서 양김이 굳건히 버티고 있는 야권을 밀어붙일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김덕룡 김윤환 박찬종 이수성 이인제 이한동 이홍구 이회창 최형우 아홉 주자 가운데 추진력과 조직 장악력이 그나마 낫다는 평가를 받는 주자는 이회창·최형우 고문 정도가 꼽힌다. 하지만 두 사람이 다른 주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성일지 모르나 여권 전체를 휘어잡을 정도의 카리스마를 갖고 있지는 못하다. 여권 내에 YS만큼 뚜렷한 지역 기반이나 탄탄한 대중적 지지도를 갖춘 사람이 없다는 점도 군웅 할거를 점치게 하는 주요인이다. 김윤환 고문이 TK, 최형우 고문이 PK의 새 맹주임을 자처하고 있지만, 그것을 인정하는 정치인은 그리 많지 않다. 자신 있게 지역 기반을 내세울 주자가 아무도 없는 것이 여권의 현실이다. 서로 지역이 다른 주자 간의 연대, 예를 들어 김윤환·최형우 연대설이 나도는 것도 그들의 지역 기반이 취약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대중성도 마찬가지다. 이회창·박찬종 고문이 대중성(인지도) 면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3김씨에게는 아직 역부족이다.

현 시점에서 YS의 지원 없이 순수하게 혼자 힘으로 대권 티켓을 따낼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 주자는 아무도 없다. 설사 YS가 지원한다고 해도 다른 주자의 도움을 받지 않고 단독으로 경선 관문과 본선을 통과할 주자도 없다. 따라서 주자들 간에 합종연횡은 불가피하다.

결국 카리스마·지역 기반·대중성 가운데 어느 하나도 확실하게 내세울 수 없는 주자가 합종연횡을 통해 정권을 잡는다면, 그의 미래는 불을 보듯 뻔하다. 이른바 ‘3두 마차’니 ‘4두 체제’니 하는 사실상의 집단 지도 체제가 등장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당정 인사 때마다 당내 중진 보스들의 눈치를 살펴야 하고, 따라서 집권자가 정부 요로에 자기 심복이나 고교 후배를 모조리 전진 배치하는 식의 편파 인사를 하기는 어렵다. 어쨌든 대통령의 당선을 도운 킹 메이커들로서는 자신의 계보를 관리하면서 국정에 참여할 수 있으니 대통령이 부럽지 않는 상황이 전개될지도 모른다. 탈당 위험 인물 1호로 꼽히는 박찬종 고문의 참모들은 지분이 충분히 인정될 텐데 무모하게 탈당을 감행할 생각은 없다며 탈당설을 일축한다. 또한 서석재 의원은 대권 도전과는 무관하게 부지런히 자파 세력을 늘리고 있다. 정가에서는 이를 다가올 계보 정치 시대에 대한 대비 차원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퇴임 YS, 계보원 통해 ‘원격 조종’도 가능

다음 정권의 권력이 1인에게 집중되지 않고 여러 보스에게 분산되는 형태가 된다면, YS는 퇴임 이후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집권자와 중간 보스들이 모두 합세해 YS를 공격하지 않는 한, 집권 상층부가 서로 견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항간에 떠도는 소문처럼 다음 집권자의 권력을 분산해 놓는다면, YS는 자기가 재임 기간에 심어놓은 계보원을 통해 원격 조종을 할 수도 있다. 야당도 마찬가지다. 김상현 의원과 정대철 고문이 자꾸 자기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는 앞으로 도래할 다계보 시대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라는 관측이다.

계보 정치에 대한 평가는 긍정론과 부정론으로 엇갈린다. 긍정론은 다극화·다양화 시대에 특정 정치인이 권력을 독점하는 것은 민주주의 원칙에도 어긋나므로 군소 계보 등장은 바람직하다는 주장이다. 반면 부정론은, 정치권에 이합집산 현상이 빈발함으로써 정당 정치의 근간을 파괴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정치 평론가 정해구씨는 “계보 정치는 자칫 노선이나 정책을 중심으로 하는 정당 정치의 틀을 뿌리째 뒤흔들 위험이 다분하다”라고 경계한다. 어쨌든 밑으로부터 치고 올라오는 중간 보스들을 억제하고 자기 뜻대로 후계 구도를 관철하고자 하는 YS의 부담이 무겁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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