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 시리즈 ③/임종석 열린우리당 의원
  • 이숙이 기자 (sookyi@sisapress.com)
  • 승인 2004.05.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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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본색’ 서서히 드러낸다
3월12일 이후 그에게는 ‘울보 의원’이라는 별명이 새로 생겼다. 대통령 탄핵안이 통과되던 날 국회의사당에서 뒹굴며 ‘울고 불고 몸부림치던’ 그의 모습이 보는 이들에게 각별한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63일,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복귀’를 선언한 날 그는 누구보다 활짝 웃었다. 그가 그토록 목 놓아 울부짖었던 ‘민주주의 수호’가 4·15 총선과 5·14 헌재 판결을 통해 법적·정치적으로 완결되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돌아오고, 열린우리당이 과반 여당이 되고, 본인 또한 재선 고지에 안착한 ‘행복한’ 상황에서 그는 이제 서서히 ‘본색’을 드러낼 채비를 하고 있다.

열린우리당 임종석 의원(서울 성동 을)에게 ‘통일 문제’는 숙명과 같다.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의장 시절이던 1989년 그는 임수경씨를 평양 축전에 보내 한반도 통일 문제를 전세계적 관심사로 만들었다. 수배 당시 그는 철통 같은 경찰 수배망을 뚫고 8개월이나 신출귀몰한 행각을 보여 ‘임길동’이라고 불렸다.

잘생긴 외모와 빼어난 말솜씨로 여고생 잡지사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숱한 스타들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는가 하면, 운동권 남학생들이 ‘의장님’ 경호원으로 발탁되는 것을 훈장처럼 여길 정도로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그가 1989년 12월18일 KBS와 비밀 인터뷰를 하기로 했다가 경찰에 붙잡혔을 때, KBS는 그가 검거된 사실을 보도하면서 ‘KBS와 임의장 검거는 무관하다’는 내용의 자막을 거듭 내보냈을 정도다. 당시 그는 임수경씨 재판에 유리한 증언을 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인터뷰 요청에 응했다.

3년6개월간 감옥살이를 한 뒤 환경운동연합·한국청년연합회 등에서 시민운동을 하던 그는 2000년 16대 국회의 막내로 정치권에 화려하게 입성했다. 그러나 그는 요란했던 운동권 시절과 달리 최대한 몸을 낮추었다. 국회 상임위원회도 일부러 상반기에 교육위원회, 하반기에 재정경제위원회를 선택했다. 가능하면 튀지 않고, 자신에 대한 국민의 신뢰부터 확보해야 한다는 전략적 판단이었다.

하지만 17대 국회에서 그는 본격적으로 통일 문제에 부닥쳐볼 생각이다. 그는 “개성공단을 비롯해 남북 교류 협력의 폭이 커질 것 같다. 미국의 상황 변화에 따라서는 핵문제를 포함한 패키지 딜이 2년 내에 가능하다고 본다. 그런 상황에서 비켜 서 있고 싶지 않다”라고 말했다. 그가 정신적 지주로 여기는 김근태 전 원내대표가 통일부장관으로 입각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상황도 그를 자극했다. 통일외교통상위원회 배정을 신청한 그는 “(김근태 의원이 통일부장관이 되면) 국정감사가 맥 빠지게 되는 점이 못내 아쉽다”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공식으로는 통일 문제에서 비켜 서 있었지만, 그는 지난 2년간 남북 교류 협력을 위한 초석을 다져왔다. 2002년 8월에 만든 ‘남북 경제 문화 협력 재단’이 그 뿌리다. 한완상 전 통일 부총리가 이사장이고, 송영길·우상호 당선자가 동참한 이 재단은 남북한 신뢰 구축과 경협을 잇는 다리 역할을 목표로 삼고 있다. 북한과 사업하기를 바라면서도 개별 접근이 까다롭고, 사업이 계속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 망설여온 중소기업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동안 철강·저작권·타조 가죽 같은 분야의 교류를 중매해 왔는데, 지난해 9월 평양 방문 때는 북한 민족경제연합회(민경련) 산하 6개 총회사 사장단이 모두 간담회장에 나오는 등 상당한 진척을 거두었다. 임의원은 “북한과 실무회담을 해보면 전에는 어떤 성격의 회담이든 나오는 사람이 똑같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저작권 문제를 담당하는 과장, 타조농장을 관리하는 과장 식으로 회담장에 등장하는 인물이 실무자로 바뀌고 있다. 북한도 실질적인 경협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저쪽 사람들은 나에 대한 신뢰가 있고, 나는 상대적으로 북한을 잘 아는 게 도움이 된다. 올해 안으로 경협의 모범 사례를 두세 가지 만들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가 남북 문제를 푸는 열쇠로 거듭 강조하는 ‘신뢰’는 그의 생활 신조이기도 하다. 그가 초등학생이던 시절, 자식 교육을 위해 전라도 ‘깡촌’(전남 장흥)에서 서울로 ‘묻지마 이사’를 할 만큼 교육열이 높았던 그의 부모는 어렸을 적부터 ‘신용’을 제1 덕목으로 가르쳤다.

한양대 총학생회장 시절 등록금 동결 투쟁에 나섰을 때의 일화다. 당시 학교측에서는 학생처장이, 총학생회에서는 그가 협상 대표로 나섰는데 대화가 좀체 진전되지 않았다. 그가 협상의 주요 국면마다 총학생회 간부들과 회의한 뒤 다시 협상 테이블에 나가기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학생처장이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났다. “여기선 약속해 놓고 자기네 회의 갔다 오면 말이 또 바뀌고, 그런 대표와 무슨 협상을 진행할 수 있겠는가.” 그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협상을 한다면서 파트너에게조차 신뢰를 주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는 동지들에게 “원칙을 지키는 선에서 재량권을 달라”고 요청해 관철했다. 그리고 나서야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 후로 그는 대화로 합의한 일은 절대 번복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려 애쓴다.
열린우리당이 과반 여당이 되고부터는 지켜야 할 덕목으로 신뢰에다 ‘책임감’을 하나 더 추가했다. 그가 설정한 여당 역할이 ‘한 발짝 늦게 말하고, 한 발짝 먼저 수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먼저 치고나가는 것은 민노당과 시민단체 몫이고, 여당은 책임감이 우선이다. 이제는 동지들의 다소 보수적이라는 비난도 감수해야 할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라크 파병 반대를 외치며 단식 투쟁까지 했던 그가 ‘좀더 기다리다 보면 굳이 미국과 다투지 않고도 해결책이 나올 것’이라고 하는 것이나,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해 ‘독소 조항을 없애는 선에서 절충하는 게 아예 한 발짝도 못 나가는 것보다는 낫다’고 하는 것 등이 소신보다는 여당의 책임감을 의식한 발언들이다. 이 때문에 그는 4·15 총선 이후 최대한 인터뷰를 피하고 있다.

그는 “전대협 출신들은 일이 터졌다 하면 토론부터 한다. 그래서 먼저 치고 나가거나 혼자 튀는 사람은 없다”라고 말한다. 앞으로 운동권 출신이 주축이 된 재선 그룹이 당과 국회에서 허리 구실을 하겠지만, 개인 플레이보다는 팀 플레이에 중점을 두리라는 점을 예고한다. 그가 정치권에 들어가 가장 많이 들은 얘기가 “어? 순하게 생겼네!”라는 것도 이제 이해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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