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에 드러난 ‘후보 본색’
  • 이나미 (정신과 전문의) ()
  • 승인 1997.08.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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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후보 심리 분석/말투·몸짓에 ‘약점’ 고스란히 표출
아무리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이 직업이라고 해도 직접 만나지 않은 상태에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타난 3당 후보의 정신 세계를 분석해 낸다는 것은 무책임하고도 위험한 일이 되기 십상이다.

어쨌든 재미있는 것은 세 후보의 이미지에서 막스 베버가 이야기한 세 가지 지도자 유형을 절묘하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회창 후보는 지금까지의 대통령 후보들과 달리 이성적 판단에 바탕을 둔 관료주의 속의 ‘합리적’ 지도자 이미지를 갖고 있다. 김종필 후보는 한시를 애송하는 등 그의 복고적 스타일에다가 박정희 향수를 업고 있다는 점, 스스로 정통 보수를 자처한다는 점 때문에 ‘전통적’ 지도자 유형에 속할 것 같다. 또 김대중 후보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30여 년 야당 지도자로서 투쟁했다는 경력과 뛰어난 지식과 언변으로 인해 ‘카리스마적’ 지도자로 비친다.

이회창, 두 아들 질문에 눈 깜박깜박

그러나 이회창 후보가 합리적 지도자로 뚜렷이 부각되기에는 그의 도덕성과 관료로서의 능력이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다. 김종필 후보도 4·19 정신의 맥을 끊은 군부 쿠데타의 장본인으로 민주주의 발전이라는 대세에 역행했던 박정권의 핵심 인사라는 점에서 전통적 선비 정신과는 거리가 멀다. 김대중 후보도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가져야 할 일관성이 항상 결정적 순간에 흔들렸다는 점과 그가 강한 비전을 제시한 데 대한 대중의 이해가 부족하다는 점에서 카리스마의 기반이 약하다. 텔레비전 토론 내내 위와 같은 그들의 허점을 언뜻언뜻 읽을 수 있었다.
이후보의 토론은 경직된 채 진행되어 평소 그의 이미지인 ‘대쪽’이나 ‘법대로’의 외형을 갖추고는 있었지만, 정치나 행정 쪽의 실전 경험과 경제 이론이 약한 탓인지 막상 토론 내용은 ‘적당히’ 얼버무리는 대목이 적지 않았다. 게다가 금융개혁안에 대한 답변에서는 명확한 자기 입장을 밝히지 못했고, 노대통령과 김대통령과의 관계와 자신과 김대통령과의 관계의 차이점, 청소년 문제에 관한 질문 등에 대해서는 알맹이 없는 말들로 적당히 끝냈다. 노동법과 실직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반문하는 대목에서는 단호하고 지적인 얼굴 표정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내용 없는 답변으로 일관해 지켜보는 사람을 답답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회창 후보는 마치 아랍 여인들처럼 주로 ‘눈 깜박거림’을 통해 감정을 드러내는 듯한데, 아들 병역 문제에 대한 답변 도중 특히 눈을 많이 깜박거렸다. 회견 초반에는 긴장한 탓인지 입술 근육 이외에는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아, 처음부터 손을 쓰는 등 활달했던 김대중 후보에 비해 정치 면에서는 아마추어라는 느낌을 주었다. 이런 이미지는 물론 텔레비전용 정치 지도자로서는 단점이 될 수 있지만 술수로 가득찬 정치판에서 덜 오염된 것처럼 보이는 장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김종필, 차라리 배짱으로 밀어붙였으면…

김종필 후보는 입끝이 처진 데다 눈이 작고 날카로워 시청자들에게 따뜻한 인상을 주지 못한다. 그는 아마도 30대 초반부터 국정 운영의 핵심에 오랫동안 앉아 있었기 때문에 아예 그런 표정이 굳어진 듯하다. 특히 작은 정부를 표방하면서 재경원을 해산할 것이냐 하는 질문에 평소와 달리 어눌하고 부적절한 단어 선택을 했는데, 이는 철저한 통제와 관치에 앞장섰던 그가 갑자기 자율 경제 또는 작은 정부를 주장하다 보니 당황한 면과, 기업가와 공무원 양쪽 모두를 만족시키려는 애초 실현 불가능한 의도 때문이 아니었을까.

‘포르노 비디오를 본 적이 있느냐’라는 질문과 골프장 문제에 대한 언급에서도 흔들리는 모습이 엿보였다. 요정과 안가 정치 시대에 권력 핵심에 있던 그가 이제 와서 자신이 점잖은 사람이라고 주장한다면 상식적으로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이가 많을 것이다. ‘나는 유신 잔당이 아닌 본당’이라고 배짱을 부릴 때처럼 아예 터놓고 음습했던 전력을 뒤집어 엎는 전략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었을 터인데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김대중, 원색 넥타이로 시선 교란시켜

김대중 후보의 경우는 그의 강점인 논리와 순발력 있는 재치가 비교적 돋보이는 편이었다. 특히 평범한 옷을 입고 나온 이회창 후보나 매우 ‘점잖게’ 보이는 고급스런 양복을 걸친 김종필 후보에 비해 김대중 후보는 원색 넥타이와 손수건 장식으로 시선을 계속 교란했다. 게다가 갈색 톤으로 머리 염색을 하고 마지막에 <청춘>이란 시까지 읊는 바람에 시청자들에게 젊고 발랄하다(?)는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그의 박학다식과 다변이야 널리 알려진 바이지만, 바로 그 때문에 그를 경계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김후보가 풀어야 할 가장 어려운 딜레마이다.

‘머리가 좋은 만큼 술수가 강한 것은 아닐까’ ‘미워하는 사람 닮는다는 말대로 오랜 독재 정권 아래서 제1의 표적으로 살아오면서 호남 출신으로 상대적 소외 계층에 속했던 만큼 그도 독재와 보복 정치를 하면 어쩌나’ ‘시간과 공간에 따라 자신이 했던 중요한 말들을 시치미 뚝 떼고 뒤집었던 전력들처럼 막상 무소불위의 자리에 올라 아무도 그를 통제하지 못할 때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변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을 갖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이 점을 감지했는지 시종일관 김후보는 부드러운 표정을 잃지 않고 특유의 손짓도 아끼지 않았다.

매스컴이 비교적 철저히 정치인을 해부하는 미국의 경우는 오히려 그런 거름 장치들 때문에 정말로 능력 있는 지도자들은 다 도태하고 도덕적이기는 하지만 무능한 사람만 정치판에 남는다고 보는 극단적인 시각도 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강하고 바른 정치 지도자이지 도덕군자나 완벽한 성인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파렴치한이나 무뢰한이 아니었으면 하는 심정에서 궁색하나마 화면을 통해 보이는 그들의 모습을 분석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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