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마당]박관용·이회창·김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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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97.04.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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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보 태풍’에 끄떡 없어 더 미움 받는 박관용

람보의 무차별 사격으로 초토화하고 있는 속수무책 부대. 요즘 민주계 처지이다. 최형우·김덕룡 의원에서 김수한 국회의장에 이르기까지 웬만한 민주계 중진 치고 ‘정태수 리스트’ 도마에 오르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러나 딱 한 사람, 민주계 중진이면서도 한보 사태의 불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 있다. 바로 박관용 사무총장이다. 한보 사태가 막 터졌을 때 괴문서에 잠깐 이름이 거론된 것을 제외하고 박총장은 지금까지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

그런 박총장이 민주계 눈에 곱게 비칠 리 만무하다. 애당초 이회창 대표의 부름을 받고 사무총장 직을 수락했을 때부터 그를 ‘배신자’라고 비난했던 민주계로서는 부아가 치밀 대로 치밀었다. 민주계 일각에서는 정태수 리스트를 흘린 배후로 이회창-박관용 라인을 지목하기도 한다. 얼마전 “배신자는 반드시 응징하겠다”라는 서석재 의원의 발언도 박총장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와 관련해 박총장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지만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다. 권력의 비정한 흐름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실력자 이회창’ 과시용 방미 정태수 리스트 탓에 취소

한국의 실력자로 떠오르고 있는 자신의 존재를 미국에 알리려던 신한국당 이회창 대표의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다. 당초 이대표는 4월19일께 미국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미국 버클리 대학에서 민주화에 기여한 공로로 특별상을 수상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대표는 수상식에 참석해 강연한 뒤 미국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과 두루 접촉하며 낯을 익힐 예정이었다. 그리고 교민들과도 만나 신고식을 하고 김현철씨 청문회(4월25일)가 열리기 직전 귀국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이대표는 김윤환 고문 등 일부 민정계의 지지를 받고 있어 ‘5·6공 세력에 업혀간다’는 비난까지 받는 마당이다. 그로서는 버클리 대학으로부터 민주화 공로상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이 여간 반갑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도 민주화에 기여한 공로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보 청문회가 열리고 있는 숨가쁜 정국 속에서도 시간을 내기로 결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대표는 정태수 리스트 파문이 커지자 미국 방문 일정을 무기한 연기하고 말았다.
“포항 보선에 총재가 나서야 민주당이 일어설 수 있다”

‘포항에서 다시 시작합시다.’민주당 일부 당직자들은 요즘 이기택 총재를 설득하기 위해 열심이다. 4월17일 12·12와 5·18 관련자들에 대한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나면 무소속 허화평 의원(포항 북)이 의원 직을 상실할 것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에, 늦어도 6월까지는 포항에서 보궐 선거가 치러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민주당 당직자들이 이총재에게 보궐 선거에 나서라고 강권하는 것이다.

그들이 이총재에게 출마를 권유하는 까닭은 간단하다. 정치권의 변방으로 밀려나 요동치는 정국 속에서도 구경꾼으로 전락한 민주당이 아직 살아 있음을 보여주자는 것이다. 그리고 3김에 대해 거의 적개심에 가까운 반감을 보이는 민심을 포항에서부터 사로잡아 대선까지 밀고 나가자는 계산이다.

하지만 이총재는 아직 보궐 선거 출마에 부정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 생애를 부산에서 마감하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당분간 이총재는 당의 활로를 찾기 위해 총대를 메달라는 당직자들의 요구와 부산 유권자들과의 의리 사이에서 고민할 것 같다.
송곳 질문 빛나던 김재천 당 지도부 압력에 특위 사퇴?

공부 잘하던 학생이 갑자기 가출했다. 뚜렷한 이유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몹시 궁금해 한다. 바로 신한국당 김재천 의원을 두고 하는 말이다. 김의원은 지난 4월10일 한보특위 위원을 그만두겠다고 사퇴서를 냈다. 같은 날 사퇴 의사를 밝힌 이신범 의원이 ‘특위가 제대로 가동되지 않아서’라고 거창한 이유를 댄 것과 달리, 그의 사퇴서에는 ‘일신상의 이유’라는 짧은 문구만 달랑 적혀 있었다.

야권에서는 즉각 그 일신상의 이유가 바로 여당내 압력일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김의원이 그동안 야당 못지 않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면서 한보 외압의 진실 규명에 앞장서자, 당 지도부가 긴장해 견제하기 시작했으리라는 분석이다. 한보특위 소속 야당 의원들은 그 근거로 김의원의 발언 순서가 자꾸 뒤로 밀리는가 하면 아예 빠지기도 했다는 사실을 든다.
김의원의 한 측근도 ‘외압’부분을 어느 정도 시인했다. 국정조사 산업은행 보고 때 김의원이 92년 대선 자금을 추궁한 적이 있는데, 그 후 당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는 얘기다. 그는 김의원이 공인과 당인 사이에서 갈등이 심했던 것 같다고 전했다.

사퇴 선언 뒤 김의원 사무실에는 복귀를 권하는 사람들의 전화가 쇄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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