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을병 교수의 문민 정부 2년 평가 “YS정권은 귀머거리”
  • 張乙炳(성균관대 교수·정치학) ()
  • 승인 1995.04.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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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민 정부 2년의 초상/“개혁 구호 요란, 내용은 공허”
장을병 전 성균관대 총장이 ‘문민정부 출범 2년이 지난 지금 할말은 하겠다’며 특별 기고문을 보내왔다. 그는 정치 경제 사회 외교 언론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정부 정책을 점검했다. <편집자>

영삼 정권을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 정권’ 혹은 ‘귀막은 정권’이라고 한다. 문민 정부의 출범을 축하하고 개혁 작업에 박수를 보내던 사람들이 최근에 목소리를 낮춰서 하는 소리다. 공직자는 무서워서 비판을 못하고, 언론도 세무 조사 후에 결과를 발표하지 않고 있는 정부의 칼날이 두려워 입을 다물고 있다. 나를 포함한 이른바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은 용기가 없어 침묵의 시절을 보내고 있다.

변절도 싫어하지만, 나는 갑작스레 태도를 바꾸는 표변을 싫어한다. 성균관대학교 총장 직을 물러나더니 표변해서 시끄럽게 군다는 소리가 있을까 망설여지고 주저스러워진다. 그래서 이 글에서 말하는 내용은 총장 시절뿐 아니라, 평소 간직해 왔던 생각임을 밝혀둔다.

성숙한 시민 사회의 척도는 바로 비판 정신이다. 도대체 우리 사회의 비판 정신은 어디로 갔는가. 우리는 오늘 비판이 실종된 무서운 사회에 살고 있다. 그것도 타율적이고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서 말이다.

민주주의가 비판 기능의 활성화를 통해 잘못을 자율적으로 시정하는 반면에, 독재 정치는 비판 기능을 억압하여 그 잘못과 과오를 시정 받으려 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라는 제도는 비판 기능의 활성화를 통해 자생할 수 있기 때문에 그 가치가 중요시되는 것이다. 적어도 문민 정권이라면, 할 말은 할 수 있는 비판 기능이 활성화되어야 하는 당위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문민 정부 출범 후 대통령 지지율이 97%라고 뽐내던 시절에, 민자당 정책위원회의 요청으로 ‘성역 없는 비판도 가능하다’는 조건으로 강연을 수락한 적이 있었다. 강연에서 강조했던 부분은 ‘비판의 적극적인 활성화’였다. 민자당의 정책을 입안하고 기획하는 이들에게 진정으로 이 비판의 정신을 잃지 말아 주기를 간절히 바랬었다. 그리고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정권에는 늘 엄청난 아부꾼들만이 남아 정권의 뿌리를 흔든다고 경고했다.

이제 2년이 지났다. 비판 기능의 활성화가 민주주의의 핵이라는 나의 믿음은 지난 30년간 독재 정권과의 투쟁에서 얻어진 것이다. 이러한 믿음을 재확인하고, 우리 사회의 진정한 민주화를 위해 이제부터라도 ‘할 말’은 좀 해야겠다는 것이 문민 정권 출범 2년을 지켜본 나의 생각이다.

지지율 97%의 의문:문민 정부가 출범한 초기, 국내 언론은 문민 정부에 대한 국민의 지지율이 97%라고 발표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유신체제 출범 당시 박정권이 유신헌법에 대한 지지율이 92.7%라고 했을때, 나는 조작의 의혹을 버릴 수 없다고 주장했다. 평소에 나는 지지율이 75%가 넘어서면 의심을 해야 하고, 80%가 넘으면 조작임을 확신해도 된다고 주장해 왔다.

97%에 대한 의문이 풀릴 실마리는 쉽게 찾을 수 있다. 바로 언론이었다. 정치인과 관리들 다음으로 사정 대상이던 언론의 생존 전략이었던 것이다. 실상 우리네 언론은 군사 독재 아래서 철저히 공범자 구실을 해왔다. 심지어 유신체제 아래서 주어진 소임을 다하지 못한 ‘부작위(不作爲)의 죄’를 지었다면, 80년대에는 권력을 부추겨 적극적으로 악을 창조한 ‘작위의 죄’를 지었다고 비판을 받기도 했다. 문민 정부 시대에 들어서 이러한 과거를 청산하려는 마당에 언론이 사정 대상이 되어야 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정권의 속성을 잘 이해하고 있던 언론은 문민 정부에 대한 압도적 지지를 밝힘으로써 충실한 동반자임을 확인시키고 사정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왜 그랬을까. 언론의 이같은 행태는 YS 정부의 언론정책 선상에서 파악해야 한다. 김대통령의 언론관이 알려지지 않았던 집권 1년 동안, 정권에 대한 비판이 어느 정도 자유로워 보이던 언론의 논조가 바뀌기 시작했다. 10개 언론에 대한 정부의 세무조사가 정리되어 갈 무렵이었다.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를 실시해 놓고서도 정부가 그 결과를 발표하지 않는 속셈을 모르는 사람은 이제 없다.

갑자기 튀어나온 행정구역 개편 논의와 정당 공천 배제에 관한 소비적 논쟁에 언론이 앞장서서 논의의 본질을 호도했다. 그리고 몇몇 정치·사회적 파장을 불러온 사건에 대한 보도 자세에서 보듯이 언론의 한계는 분명했다. ‘보도 협조’와 ‘언론대책반’설이 나도는 것은 현정권이 언론을 ‘홍보 수단’정도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언론과 정권’의 관계가 ‘당근과 채찍’ 문제로만 끝나지 않는 까닭은 직접적 피해의 대상이 바로 국민이기 때문이다. 몇 달 앞으로 다가온 지방자치 선거에서 언론의 보도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계속되는 언론 왜곡 보도는 어쩌면 현정권이 예측할 수 없는 ‘왜곡’된 선거 결과를 낳을지도 모른다. 나는 현정권의 생각만을 대변하는 언론의 경쟁적 충성 보도와 정권의 경직된 언론관이 국민들로 하여금 현정권에 대한 심각한 수준의 ‘불신(不信)’을 부를 것임을 경고한다.

문민 정부와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한 신문은 요즈음 난데없이 ‘이승만’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승만은 4·19혁명으로 타도된 독재자였는데, ‘위대한 국부’라고 치켜세우고 있으니 어떻게 된 것인가. 무서운 생각마저 든다.

문민 정부는 4·19 묘역을 확장해서 성역화한다고 하고, 교과서에서도 본격적으로 4·19 정신을 떠받들며 교육하고 있는데, 이승만 찬양은 정부의 정책 방향과 상충되지 않겠는가. ‘이승만 추앙 운동’이 활개치고 있는 일은 정부의 비호를 받고 있는 언론이 무소불위의 권능을 시험해 보자는 것인지도 모른다. 요즘 식자들 사이에 언론을 신오적(新五賊) 괴수로 보고 언도(言盜)라고 일컫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듯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렇듯 반역사적이고 시대역행적인 현상이 백주에 빚어지고 있는데도, 대다수 정치인이나 지식인 들은 꿀먹은 벙어리처럼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공룡 앞이라 두려워서 말을 못하고 있는가. 아니면 상충된 이념이 혼재하고 있는 시대라 몰라서 침묵하고 있는 것인가.

다시 4월이 왔다. 4·19 혁명 정신을 계승한다고 내세워 출세한 사람들과 4·19 정신의 계승자임을 입버릇처럼 떠들고 다니던 사람들의 대응을 지켜보고 싶다.

또 개인적인 자격인지는 몰라도, 김대통령이 이승만 전시회를 참관했다고 한다. 나는 자라나는 청소년들과 학교 교육을 위해서라도,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오는 ‘이승만 추앙운동’을 부추기는 일과 문민 정부가 표방하고 있는 통치 이념과의 관계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박 홍 총장과 매카시즘:50년 2월 어느날 ‘정부 관리들 중 수천 명이 좌익에 물들어 있으며, 국무부에서 암약하고 있는 공산주의자 57명의 명단이 든 파일이 내게 있다’로 시작된 조셉 매카시 상원의원의 발언으로 미국은 그 유명한 매카시즘 논쟁에 휘말린 적이 있었다. 그 결과 3년 동안 수천 명의 지식인과 관리를 거리로 내몰았고, 수만 명의 시민이 사상 검증을 거쳤다.

지금 시계는 95년의 봄을 지나고 있지만 우리는 50년대 냉전의 벼랑 끝을 힘겹게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해 여름 서강대학교 박 홍 총장의 발언으로 일기 시작해 ‘박시즘’으로 입증된 사상논쟁 때문이다. 박총장 전매 특허인 “주사파 뒤에는 사노맹이 있고…”라는 주장은 언론의 힘을 업고 대단한 위력을 행사했다. 이‘박시즘’의 바람은 나 역시 피해 가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박총장 지지 모임에 불참한 것으로 인해 ‘삐딱한 사람’이라는 입돋음에 오르게 됐다.

가을 학기에 들어서는 봉직하고 있던 학교의 교수 한 사람을 ‘사상이 의심스러운 교수’로 오해받게 만들었던 사건도 있었다.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나는 당시 몇 분의 총장들에게 당시의 시대 흐름에 대해 ‘우리의 입장을 밝히자’고 제의했다. 논의의 주된 내용은, 북한의 지령을 받는 공산주의자들을 단호히 배격하지만 정부는 학생운동 세력 전반을 용공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올해도 역시 ‘박시즘’은 자수 간첩의 ‘폭로’와 더불어 그 바람과 여파를 남기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정부의 대북 강경 발언으로 연결되고 있다. 나는 이미 냉전과 관련된 사상 논쟁은 일단락된 것으로 보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현정부와 상업주의 정신으로 무장한 언론이 국가적 에너지 낭비인 ‘박시즘’을 즐기고 있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이제 소비적 ‘박시즘’ 논쟁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라도, 문민 정부의 입장이 무엇인지 밝혀야 한다.

대북정책 일관성 있는가:요즘 제네바에서는 경수로 문제로 미국과 북한의 협상이 진행중이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어떠한 형태로든 미국과 북한의 정치적 타협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짐작은 누구나가 할 수 있다. 그것은 냉엄한 국제관계 속에서 자기의 이익을 충분히 챙기려고 경주하는 게임의 법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탈냉전 과정에서 미국이 동북아에서 가지려는 전략 우위 개념은 북한과의 화해를 필요로 하고 있다. 북한은 북한대로 탈냉전 진행 과정에서 소외되어서는 국제 경쟁에서 살아 남을 수 없다는 초조감이 그들을 타협의 장으로 밀어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본과 북한은 어떤가. 일본과 그토록 오랫동안 줄다리기를 해오던 북한은 이제 북·일 수교 협상에 적극적이고 진지한 자세로 임하고 있다는 보도가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일본의 연립 여당 대표단은 북한을 방문한 당일 ‘조건 없는 수교 협상’에 합의를 보았다고 발표했다. 경제적 이해관계를 늘 강조하는 일본의 발빠른 움직임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크다.
지금 동북아는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다. 이제 우리의 선택은 무엇인가. 문민 정부 출범 후 갖가지 우여곡절을 겪고 난 오늘, 우리가 설정하고 있는 대북 관계는 과연 최선의 선택인가를 생각해 본다. 대북 관계의 모든 정보를 취합하고 있는 정부의 선택과 결단을 의심해서라기보다는 국제 관계의 변화 속도가 너무나 빠르기 때문이다. ‘민족 문제는 어느 국가나 이념보다도 앞선다’고 선언한 문민 정부에 일관성 있는 정책을 기대하는 것이 무리일까.

분배 외면하는 복지:최근 정부가 발표한 ‘복지국가론’은 누구의 아이디어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복지 국가를 지향하는 것은 세계 어느 나라나 꿈꾸고 있는 이상이다. 그러나 김대통령이 유럽 순방에서 과연 그 국가들의 경제력만이 복지의 전부라고 보고 느꼈는지 의아하다. 전통적으로 유럽은 사회 복지를 강조하고 있는 국가들이다. 복지의 핵심이 부의 적절한 재분배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유럽 순방 직후, 김대통령은 경제 5단체장을 초청하여 ‘경제력’을 몹시 강조했다고 한다. ‘첫째도 경제, 둘째도 경제, 셋째도 경제’라며 재벌들에게 분발을 촉구한 김대통령의 진의는 과연 무엇인가. 김대통령이 재벌들에게 격려한 진의가 따로 있는 것인가. ‘파이를 크게 키워서 나눠 먹자’는 박정권 때의 ‘파이론’에 근거한 성장론자들의 주장은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문민 정부 출범 후, 그동안 김대통령은 우리나라 재벌의 역할과 의무에 대해 많은 것을 주문해 왔다. 대기업들이 문민 정부를 과소평가하지 못할 정도로 적절한 의무를 강조해 왔다. 그리고 그런 대로 문어발식 기업 확장의 자제 등 정부의 의지가 일정한 실효를 거두고 있다고 평가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경제 현실은 아직도 ‘분배’와 ‘노동의 질’이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최근 세계 초일류 기업을 지향하고 있는 기업 중 하나가 독일에서 국제적 기준의 노동조합 활동을 못하게 금지해 국제적 망신을 당하고 있으며, 얼마 전에는 장애인 노점상이 분신 자살해 국제적인 이목이 집중되어 있다.

유럽 여러 나라들이 이러한 복지 문제를 얼마나 진지하게 다루고 있는지에 대한 이해도 김대통령이 이번 순방에서 얻은 적지 않은 교훈일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김대통령이 언급한 복지국가론이, 많은 사람이 우려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정경유착에 의한 ‘재벌 보호’로만 이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세계화 비전 제시해야:문민 정부 출범 후 가장 눈에 띄는 것이 구호다. 에이펙(APCE) 1차 회담에 다녀온 김대통령은 ‘국제화’라는 말로 문민 정부의 지향점을 정했다. 국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라고 했다. 2차 회담 후에는 ‘세계화’를 주장했다. 선진국 반열에 오르기 위해 우리가 선택한 신개념이라고 한다.

그러나 문민 정부의 정치 구호로 전락한 ‘세계화’에 이제 지식인들은 역겨움을 느끼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해서라도 ‘선진국’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할 정도로 우리 모두가 허위의식에 차 있지는 않다. 개방 시대에 국가 경제의 내실을 기하기보다는 정권 홍보를 위해 사무총장에 한 전직 장관을 떠밀어 내 겨우 얻어낸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차장이란 자리가, 진정 우리에게 어떤 효과로 나타날지 궁금하다.

우리로 하여금 할 수밖에 없도록 강요되고 있는 세계화라는 것을 바로 인식해야 되겠다. 마치 미국을 흉내내야만 세계화가 되는 것 같은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냄비 행정’이 일조한 바는 없을까. 국경을 없애는 세계화만 강조되고 있는 요즈음 ‘국적 없는 세계인’으로 전락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우리 스스로가 요란스럽게 떠들어 댈 것이 아니라 냉철하게 짚어 보고 따져 보는 자세여야 하겠다.

국제 관계 속에서의 생존 전략으로 정부가 내세운 국제화와 세계화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러나 구호와 함께 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국가 경영의 비전을 국민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김영삼 정권은 이제 집권 후반기를 향해 달리고 있다. 구호만 난무하는 개혁은 공허할 뿐이다. 지금 문민 정부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관성 있는 정책을 실천하는 것과 실질적인 개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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