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리더④/한나라당 박형준 당선자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4.05.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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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세의 정치’ 그리는 신진 기획통
대학 교정에 학생보다 ‘짭새’가 더 많았던 1980년, 친구들은 그를 ‘탄파안(彈破眼)’이라고 불렀다. 최루탄에 맞아 눈이 깨졌기 때문에 생긴 별명이었다. 그 해 5월13일 고려대 복학생협의회 대표이던 박계동(한나라당 당선자)이 이끄는 시위에 적극 참가했던 그는 플라자호텔 앞에서 경찰로부터 최루탄 세례를 받았다. 동료들은 고통으로 절규하는 그를 들쳐 업고 회기동에 있는 경희대병원으로 내달렸다. 다행히 실명은 면했지만, 지금도 그의 오른쪽 눈은 불과 1m 앞에 있는 글자도 제대로 읽을 수 없다.

17대 당선자 가운데 가장 바쁜 사람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한나라당 박형준 당선자(부산 수영)가 그다. 이미 각종 토론과 인터뷰에서 한나라당 대표 선수로 단골 초대되는 그는 신보수운동을 주창하는 신주류의 핵심이자 한나라당의 새로운 기획통으로 떠올랐다. 그가 구상하는 한나라당 쇄신 전략이 성공하는가는 박근혜 체제, 나아가 한나라당의 운명과도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 그가 주목되는 이유는 키(181cm)가 크기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그는 흔히 말하는 골수 운동권은 아니었다. 그러나 고려대 사회학과 3학년 때인 1980년, 교지인 <고대문화> 편집장을 맡으며 나름으로 사회 의식에 눈떴다. 시위에 적극 참가했고 당시 학생회장이던 신계륜(현 열린우리당 의원)의 연설문 작성을 도왔다.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중앙일보에서 기자로 근무한 것을 빼면 1980년대는 그에게 ‘운동’의 시대였다. 민중문화운동과 관련 있는 민요연구회 창립에 헌신했고, 산업사회연구회를 만들어 학술운동에 매진했다. <고대신문> <대학신문> 등에 글을 쓰며 이론가라는 소리를 들은 것도 이때였다. <창작과 비평> <현실과 과학> 등 진보적인 학술지를 중심으로 펼쳐진 사회구성체 논쟁에도 적극 참여해 소장 논객으로 이름을 날렸다.

박당선자는 “당시 마르크스주의를 많이 공부했지만 내면적으로는 현실 사회주의에 많은 회의를 갖고 있었다. 자유나 평등과는 거리가 먼 새로운 전체주의라고 생각했다. 특히 북한 체제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생각이 강했다”라고 말했다. 이런 그에게 소련의 몰락은 실용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볼 계기로 작용했다. 이것만이 진리라는 교조적인 생각을 버리고 나도 틀릴 수 있다는 신사고에 눈뜬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넘어’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 지식인들이 사회주의를 버리고 정보화·세계화 흐름에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1990년에 나온 ‘자동화가 노동 과정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은 정보화가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를 연구한 것이었다. 1980년대 후반에 이미 한국 사회가 계급 갈등보다는 다원적이고 이질적인 집단 간의 다양한 역학 관계를 통해 갈등·조정하며 발전할 것이라고 그는 내다보았다.
“정치와 정책 잇는 가교 역할 하고 싶다”

부산 동아대 교수로 있으면서 부산 경실련 기획실장을 맡는 등 시민운동에 주력하던 그가 국가 경영이라는 새로운 화두를 고민하기 시작한 데는 박세일씨(현 한나라당 당선자)의 영향이 컸다. 1993년 당시 박세일 청와대 정책기획수석비서관의 요청을 받고 외곽에서 김영삼 정권의 각종 개혁 프로젝트에 참가한 것이다. 그와 박세일 당선자는 나라정책연구원에서 함께 일한 경험이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발표한 ‘세계화 구상과 전략’을 최종 집필한 사람도 그다. 그는 “개혁은 비전도 중요하지만 이해 관계를 조정하고 다양한 의견을 모아 가는 개혁 과정을 잘 관리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이때 절실히 깨달았다”라고 말했다.

부산에 있을 때 활발한 활동을 펼쳤기 때문에 그는 일찍부터 주목되었다. 1997년과 2002년의 대선 후보 텔레비전 토론을 진행하는 등 1995년 이후 부산에서 열린 굵직한 토론회는 모두 그가 진행했다. ‘포럼 신사고’라는 단체를 만들어 지역 사회의 여론을 형성하는 일을 주도했고, 부산을 문화 도시로 만들기 위한 ‘문화도시 부산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2002년에는 지방분권부산운동본부를 만들어 집행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그가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하자 열린우리당에서 아쉬워하는 사람이 많았을 정도였다.

학계에 머무르던 그가 한나라당에 입당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대로 가면 나라가 위기에 빠질 가능성이 높은데, 노무현 대통령과 그가 이끄는 세력의 국가 경영 능력을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권력의 정치에서 경세(經世)의 정치로 전환하는 것이 한국 정치의 화두라고 본다. 정쟁의 정치, 패거리 정치, 네거티브 정치에서 벗어나 세상의 문제를 어떻게 풀고 국민의 삶을 어떻게 따뜻하게 할 것인가를 놓고 경쟁하는 것이 그가 그리는 정치다. 그는 한나라당의 부정적인 유산을 정리하고 좋은 점을 살리면 경세 세력으로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다. 지역구 출신인 그는 박세일·윤건영 당선자 등 전문가 그룹과 한몸이다.

그가 지난해 한나라당 미래연대 회원들의 요청을 받고 정리한 리포트 ‘한나라당의 대선 패배 원인과 과제’는 한나라당에 대한 그의 인식과 그가 추구하는 변화의 방향을 보여준다. ‘한국의 표준적 사회 의식이 50대에서 30대로 바뀌었다. 한나라당이 대세론을 뒷받침할 수 있는 자기 비전과 정체성을 보여주지 못했다. 민주당이 기병이었다면 한나라당은 보병이었다. 젊은 세대 잡기 경쟁에서 뒤진 것은 보수 이미지보다 젊은 세대의 심미적 감각을 이해하지 못했고, 미디어 정치에서 실패했기 때문이다’라는 것이 한나라당에 대한 그의 진단이었다.

한나라당에 입당하며 당을 인적으로, 조직적으로, 정치적으로 혁신해야 한다고 주장한 그는 쇄신하지 않으면 20~30년 야당이 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나라가 위험하다고 본다. 17대 등원에 성공한 최근에는 3자 연합론을 소리 높여 외친다. 새로운 리더십을 보여주는 박근혜 대표와 정치력이 있는 개혁 그룹 그리고 정책 능력이 있는 전문가 그룹이 연합해서 당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3자 연합론이 성과를 거둔다면 박대표는 세력을, 개혁 그룹은 머리를, 전문가 그룹은 몸을 얻음으로써 서로를 보완하는 모양새가 된다.

박당선자는 “이를 바탕으로 이념과 전략과 명분 등에서 기득권 그룹과 영남 세력이 동참할 수밖에 없는 흐름을 만들어 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정책을 운반하는 것이 정치라고 믿는 그는 17대 국회에서 정치와 정책을 잇는 가교 역할을 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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