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릴 사람 없는 이원종 정무수석의 强性
  • 徐明淑 기자 ()
  • 승인 1995.05.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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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종 정무수석 막강 영향력에 정치권 불만 높아…“여야 대립 원인 제공자”
이원종 청와대 정무수석. 그는 세인에게는 낯선 이름이다. 그러나 93년 말 대통령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하는 정무수석 자리에 취임한 이후, 여야 간에 혹은 집권 세력 내에서 주요한 정치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빠짐없이 이름이 오르내리면서 정치권에서 지명도가 매우 높은 인물이 되었다.

집권 민주계의 JP 밀어내기 과정에서 눈길을 끌었던 이수석의 정치적 역할은, ‘신기하 총무 파동’ ‘공천 배제 정국’ ‘5월 단독 국회 강행’ 국면에서도 끈질기게 거론됐다. 여야 대치 국면이 조성될 때마다 민주당은 이수석을 주된 원인 제공자로 지목한다. 최근에는 민자당 내부에서도 그에 대해 지나치게 강공 드라이브를 펼친다는 불만이 터져나오고, 김윤환 정무장관과의 불화설마저 나돌고 있다.

‘YS 정권의 홍위병’ ‘YS 정권의 프로파간디스트’로 불리는 이수석은 과연 어떤 인물이며 어떤 역할을 했기에 이렇게 말도 많고 탈이 많은 것일까. 또 막강한 그 영향력의 원천은 무엇인가.

그가 김영삼 정부의 첫 문공부 차관에서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 대부분의 민주계 인사들은 이 인사를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언론에서도 30여년 동안 보기 드문 충성심과 성실성으로 ‘야당 정치인 김영삼’을 보좌했던 그의 헌신과 그에 대한 대통령의 애정에 비추어 ‘예상됐던 포석’으로 풀이했다. 물론 민정계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아무리 아끼는 측근이라고 해도 두 차례나 지역구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인물을 정무수석 자리에 앉히는 것은 무리라는 뒷말이 무성했다.

민자당 내에서도 “너무 한다”

하지만 그는 정무수석으로서 첫 과업을 ‘멋있게’ 처리함으로써 주변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언론에 전혀 노출되지 않은 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김대통령과 세 전직 대통령의 청와대 회동’을 감쪽같이 성사시킨 것이다. 이수석의 활약은 그뒤 두 차례나 여야 영수회담을 주선했지만 보안 문제와 후유증 때문에 오히려 곤욕을 치렀던 서청원 정무장관의 ‘불운’과는 대조적이었다. 자연히 ‘이원종 수석-서청원 장관’ 시절 내내 이수석에게 무게가 실렸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수석은 JP 파동 때에는 오히려 보안을 일부러 깨뜨리는 정치력을 발휘했다. 그는 김대통령과 김종필 민자당 대표의 마지막 청와대 회동 내용을 보도진에 미리 흘렸다. 그 주된 내용은 김대표가 대표 퇴진을 겸허하게 수용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JP는 “배석자도 없이 단둘이 나눈 대화를 누가 엿들었다는 말인가”라고 분통을 터뜨리면서 “그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를 또 꾸미고 있다. 두고 보라”고 맞불을 질렀다. JP가 말한 `‘그 사람들’이란 다름 아닌 최형우 내무부장관과 이원종 수석이다. 실제로 김종필 자유민주연합 총재는 민자당을 탈당한 후 주변 사람들에게 `‘김대통령을 잘못 보좌하는 오른팔의 존재’를 자주 거론해 왔다. 어쨌든 JP 퇴진 과정에서 `‘피할 것은 피하고 알릴 것은 알리는’ 이수석의 노련한 언론 플레이는 대세를 굳히는 쪽으로 작용함으로써 효력을 십분 발휘했다. 이수석은 민자당 부대변인 시절 소수 민주계의 정서를 대변한 `‘상도동의 입’이었다.

이수석은 여야 관계가 껄끄러워질 때마다 원인 제공자로 거론되곤 하는데, 민주당은 특히 지난번 ‘`공천 배제 정국’ 당시 이수석을 김덕룡 민자당 사무총장과 함께 강경론의 대표 주자로 지목했다. 여야 타협이 이뤄진 직후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은 사석에서 “대통령을 가까이서 보좌하는 사람들이 야당의 존재를 인정하고 협상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자꾸 소모적인 극한 상황으로 치닫는다. 국회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이끌어야 한다”고 언급했다. 이수석 문제를 우회적으로 건드린 것이다.

이수석의 정치적 입장과 영향력에 불만을 터뜨리는 것은 비단 야권만이 아니다.
공천 배제 정국 당시 유럽 순방중이었던 김대통령이 귀국 후 민자당 주요 당직자 초청 만찬에서 황낙주 국회의장에게 대로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정가에서는`‘이원종 보고서가 황의장 봉변을 불렀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민주당이 의장과 부의장 공관을 점거한 동안 집권당 주요 인물들이 어떤 발언을 했으며,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를 이수석이 소상히 보고했다는 것이다.

물론 정무비서실은 이런 소문을 `‘정치 현실을 모르는 무지의 산물’이라고 일축한다. 김대통령이 유럽을 순방하는 동안 한승수 청와대 비서실장이 일일 전화 보고를 올렸고, 정치 9단인 김대통령이 국내 신문을 다 보고 있었기 때문에 구태여 따로 보고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민자당 안팎에서는 ‘이원종 보고서가 대통령이 대로한 근거가 됐다’고 믿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진위야 어찌 됐든 그만큼 이수석이 김대통령에게 가장 유효한 보고 채널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는 이야기다.

‘정무수석-정무장관’ 불화 역시 공천 배제 정국 때부터 본격화했다는 시각이 유력하다. 그 당시 당리당략과 무관한 것이므로 타협의 여지가 없다며 강경론을 고수했던 이수석-김덕룡 총장 라인과는 달리, 김윤환 장관은 처음부터 여야 협상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엇갈리는 입장 차이는 그뒤에도 계속 드러났다.

“이수석이 MBC 정치부장인가”

사실 이수석과 김장관의 갈등은 이미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다. 정무수석과 정무장관은 일의 영역과 범위가 비슷하다. 두 자리 모두 안되는 일도 없고 되는 일도 없는 자리다. `‘무소불위의 자리’가 되느냐 `‘할일 없는 능참봉 자리’가 되느냐 여부는 전적으로 대통령의 신임과 역할 부여에 달려 있다. 두 사람 모두 만만찮게 대통령의 신뢰를 받는 인물이다. 허주가 지난해 말 ‘3수 정무장관’으로 임명되자 `‘허주에게 큰 정치를 맡기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대두했다. 그러나 JP가 퇴진한 후 김장관에게는 일이 맡겨지지 않았고, 날이 갈수록 여권의 핵심 구조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흔적만 뚜렷해졌을 뿐이다.

김대통령 귀국 후 두어 차례 청와대에 들어갔던 김장관은 이수석과 마주치자 `“당신들 내가 필요없나? 없다면 언제든지 이야기하라”고 고함쳤다는 후문이다. 김장관이 `‘신주체론’을 치고 나온 것도 역할이 주어지지 않는 여권 내부 상황에 대한 불만인 동시에 사실상 김대통령과 이수석을 향한 발언으로 풀이됐을 정도이다.

이수석은 집권당과 민주당뿐 아니라 언론계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대통령의 공식 일정과 공식 발언을 다룬 보도성 기사 외에 모든 청와대 기사는 이수석의 코멘트를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청와대 출입 기자들이 이수석을 가장 주요하고도 신뢰할 만한 취재원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수석의 정세 분석과 상황 인식, 사고 방식이 언론의 보도 방향에 알게 모르게 깊숙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난 4월10일 방영된 MBC 텔레비전 ‘`9시 뉴스데스크’의 한토막은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삽화이다. 이 날 뉴스를 진행하던 앵커는 일본 지방선거 결과를 보도하면서 “이원종 수석은, 일본의 지방선거 결과가 깨끗한 선거와 돈 안 드는 선거 등 세계적인 추세가 되고 있는 정치 개혁 의사를 반영한 것으로 우리 지방선거에도 교훈이 될 것으로 본다고 말하고, 정당도 이제 생산성 있는 집단으로 변해야 된다는 경고의 의미가 있다고 덧붙였습니다”라는 멘트를 내보냈다. MBC 노조는 뉴스 편집의 상례를 벗어난 이 이례적인 `덧붙임에 대해 `‘MBC 정치부장에 이원종 비서관이 취임했는가’라고 꼬집었다.

이수석의 영향력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이를 둘러싼 해석은 구구하다. 우선 오랜 세월 변함없이 유지해온 강도 높은 충성심과 사심 없는 열정을 드는 사람이 많다. 그만큼 열심히 고민하고 맹렬하게 상황에 대처하므로 자연히 역할이 주어진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그는 다수 민정계에 둘러싸인 적지에서 소수 민주계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핏대’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열정적이고 다혈질이다. 새 정부 들어 강력한 세를 형성하고 있는 경복고 출신이라는 점도 거론된다. 거산 김영삼 대통령의 신임에다가 `‘소산’으로 불리는 차남 현철씨와의 관계까지 좋기 때문에 더 힘이 붙는다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정가에는 여야 관계를 다루는 그가 ‘반YS 세포는 단 한개도 없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대통령 개인에 대한 강한 충성심만 내세워서는 곤란하다는 비판론이 점차 강하게 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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